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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5.06 11:33
20. 십년을 버려지더라도, 십년물용(十年勿用)
/양선규
‘십년물용’(十年勿用), 십년 동안 물건이나 인물의 쓰임이 없었다면 이미 그 존재의 의의, 용처(用處)가 사라진 것이 아닐까요? 문득, 주역 스물일곱 번째 ‘산뢰이’(山雷頤), 이괘(頤卦)를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뜬금없이 그냥 든 생각입니다. 경문(經文)이나 효사(爻辭)의 취지와는 별개로 든 생각입니다. 텍스트의 내용보다는 읽는 사람에게 절박한 문제를 더 중시하는 투사적 독서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주역에서는 ‘쓰이는 것’들의 문제가 아니라 ‘도(道)의 운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육삼은 기름의 바름을 거스리니 흉해서 십 년이라도 쓰이지 못하니라.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六三 拂頤貞凶 十年勿用 无攸利). -- 부정한 데에서 위를 봉양하니 위에 아첨하여 드리는 자이다. 바름을 기르는 의의에 어그러지므로 ‘불이정흉(拂頤貞凶)’이라 하였다. 기르는 데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니 십 년을 버려지는 자이다. 이같이 행동하면 배풀어서 이로움이 없다.
「상전」에서 말하기를, ‘십년물용(十年勿用)’은 도가 크게 패함이라. (象曰 十年勿用 道大悖也)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19쪽]
‘십년물용(十年勿用)’은 어쨌거나 ‘도가 크게 어그러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도의 운용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십년 동안 쓰임이 없다’라는 자구적 의미만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천장지구(天長地久)’가 ‘하늘과 땅은 장구하다’가 아니라 ‘사랑의 정한(情恨)’을 대변하는 말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 년 동안 쓰임을 당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합니다.
첫째는 연이어 선거에 나가서 떨어지는 경우입니다. 보통 선출직 임기가 4년이니 두 번 떨어지면 10년쯤 쓰임을 당하지 못한 경우가 됩니다. 세 번째는 선거에 나가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10년이면 의리로 뭉쳤던 사람들도 이리저리 다 흩어질 시간입니다. “도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겠다”라며 ‘가르치고, 오기로 하는 정치’는 어쩔 수 없이 도(道)와 크게 멀어집니다.
둘째는 책을 써서 독자를 구하는데 실패하는 경우입니다. 10년쯤 해서 성과를 보지 못하면 작가 노릇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도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겠다”라며 어렵고 지루하고 읽기 불편한 책을 연이어 출간하는 것은 우매한 일입니다. 온오프 라인 어느 곳에서도 그런 글쓰기를 10년 이상 하면 안 됩니다.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배움을 청하는 이들이 없는데 선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생 대접에 소홀하다고 짜증을 내거나 장소 막론하고 훈계를 일삼으면 어쩔 수 없이 도(道)와 크게 멀어집니다.
마지막으로 교우관계입니다. 10년쯤 서로에게 ‘각별한 쓰임’이 없는 경우라면 우정에 대한 기대를 접고 바로 철수하는 것이 ‘도(道)’에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하는 일도 없이 기대만 주고 받으며 앙앙불락(怏怏不樂, 마음에 차지 않아 불쾌해함)하는 것은 서로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는 바라 자세한 언급을 삼가겠습니다.
물론, 위의 세 가지 경우에 대한 말씀이 불문곡직하고 ‘철수해라’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십년물용’의 상태가 오기 전에 ‘도(道)’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자는 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 본 것입니다. 당연히 제가 최근에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철수’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물러나 앉는가? 그것이 중요하지 싶습니다. 산뢰이(山雷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