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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01.06 03:15
<부문 2-4>
오로지 시인으로 살아 온 나날
-빅청륭 시인 인물론
지난 해 가을 인천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박청륭 시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지막 시집이 될지 모르겠으나 시집 『각혈하는 도시』를 내었다면서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1978년 그의 첫 시집 『불의 가면』을 내던 무렵이 생각났다. 그 무렵 우리는 『절대시』 동인(창간 동인 하현식, 진경옥, 유병근, 양왕용, 박청륭, 김성춘)으로 모이면서 동인지를 내자는 데에 뜻을 모아 광주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1980년에 창간호를 내었다. 박 시인은 <아쟁이 풍>이라는 연작시 5편을 투고하였으며 속 포지화도 그렸다. 시나 그림이나 ‘절대시’라는 순수시의 극단적 경향과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다. 1981년 『잠든 자의 바다』라는 2집에는 직접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1937년생인 박 시인은 일본 교도에서 출생하여 해방 직전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해방과 더불어 아버지 고향인 경북 청도군 각북면으로 귀국하였다. 그의 선친은 자동차수리업을 하는 엔지니어였으나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많지 않아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1946년에는 고향에서 대구로 나와 역시 자동차 부속품에 관련된 사업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박 시인의 대구 시절 가운데 가장 유의미한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다. 대구중학교을 거쳐 계성고등학교에 진학하였는데 거기서 박 시인은 평생의 지기인 권기호 시인(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시인의 길에 큰 영향을 준 정점식(1917-2009) 화가를 미술 선생으로 만난 것이다. 정점식 선생은 그 후 계명대학 미술과 교수가 된 우리나라 1세대의 서양화가로 추상화풍의 그의 작품세계와 생애에 대하여 최근의 조선일보(2023.7.22.)에 소개되었다. 그의 작품은 철학적 깊이가 있는 것으로 한국 서양화 역사에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박 시인은 계성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반장이었다. 그런데 미술반 반장이 바로 권기호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수시로 미술반 교실에 출입하였으며 정 화가로부터 미학 이론을 비롯한 예술론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대학은 박 시인은 계명대 교육과로 권 시인은 경북대 국문과로 진학했다. 1962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그는 마산의 창신고등학교와 성지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70년대 중반 부산의 동주여상 국어교사를 지냈다.
마산 성지여고 교사였던 1970년대 초반 그 당시 마산 대학(지금의 경남대학교)에 출강을 하던 권기호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만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너 아직도 시 쓰고 있냐?”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그는 서정주 시인의 시에 매료되어 그러한 시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10편정도 전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요즈음은 1」외 1편이 1974년 4월호 《현대문학》에 김춘수 시인의 추천작품으로 게재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김춘수 시인이 자기 이름으로 《현대문학》에 추천한 첫 작품이었다. 말하자면 박 시인은 김춘수 시인의 《현대문학》 첫 제자가 된 것이다. 솔직히 그는 그 당시 김춘수 시인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서점으로 가 《현대시학》(1969년 5월 창간)에 연재되고 있는 김춘수 시인의 장시 「처용단장」을 읽고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시가 김 시인의 시작 경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습작한 시들은 모두 버리고, 다시 습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결과 완료추천이기도 한 「무제」 외 1편은 초회 추천작과는 전혀 다른 경향이었으며 이러한 트레이닝의 과정 때문에 초회 추천으로부터 1년 7개월이 지난 1975년 11월호에 완료 추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박 시인이 마산성지여고에서 동주여상으로 옮겨와 부산 시단에 편입한 후 집은 수영이었으나 연산동에 거주하는 하현식 시인과 박철석(1930-2016) 시인 그리고, 양정에 거주하다가 연산동으로 이사한 유병근(1932- 2021)시인과 더불어 많은 문학적 교류를 가졌다. 이 시기의 교류에 대하여 하현식 시인이 2016년 박철석 시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련한 《부산시인》2016년 봄호의 특집에 「연산문단시대의 추억」이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은 박철석 시인 중심으로 쓰여 졌으나 이 시기에 박청륭 시인은 부산대학교에서 1급 정교사 자격 강습을 받은 것 같다. 하 시인은 이들 네 사람의 모임을 ‘연산문단’이라고 별칭하고 있으며 이 때에 하 시인과 박청륭 시인은 각각 《현대문학》과 《현대시학》에 초회 추천을 마친 상태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들 네 사람은 술을 못하는 점과 내성적이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의 진지함이라는 특성으로 엮어졌다고 한다. 이들 네 사람은 1975년부터 1985년까지 거의 매일 만나 시는 물론이고 박철석의 비평이론, 유병근의 수필 작법 등을 두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사실 이 시절의 박 시인의 면모는 하현식 시인이 필자보다 훨씬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네 사람 가운데 이미 두 사람은 고인이 되었다.
1980년부터 시작한 《절대시》 시절의 박 시인의 열정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대단했다. 그리고 1975년 추천 완료한 초기라 매호마다 발표하는 시도 실험정신이 투철했다. 그리고 이 무렵 필자와의 다른 인연은 김성춘 시인과 함께 필자가 속한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에 입학하여 수료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입학한 김석규 시인과 김성춘 시인은 석사논문을 썼으며 이를 바탕으로 울산광역시 교육청에서 교장도 역임하고 교육청 고위직도 역임하였다. 그러나 박 시인은 끝내 논문을 쓰지 않았다. 아마 박 시인의 학교가 사립이라 진로의 변화가 어려웠던 탓도 있었겠으나 이 시절 그는 《현대시학》에 현대시 작품에 대한 글을 연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대시평설』을 1984년에 내기도 했다. 한동안 필자는 박 시인의 논문 작성과 진로문제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한 점을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면 그는 데뷔초기부터 지금까지 시적 긴장감을 잃지 않는 시작활동을 하여 13권의 시집과 한 권의 시선집을 발간한 초지일관 오로지 시인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한다면 추천인으로 스승인 김춘수 시인에게 제자인 필자보다 정성스럽게 섬겼다는 점에서 존경을 표한다. 특히 창작 탈공예가인 천재동(1915-2007)씨의 탈을 구하여 김춘수 시인에게 드려 김 시인의 애장품인 동시에 시의 소재(시 「천재동씨의 탈」)가 되고 있는 점은 부럽기도 하였다.
필자가 시인 박청륭의 시적 열정 가운데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2008년에 엮은 「백향목십자가」와 2010년에 엮은 「카인의 부적」 등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그의 신앙이기도 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형상화이다. 이러한 시집을 중심으로 그의 시작 과정에 신앙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싶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시인론을 써볼 작정임을 밝히고 우선 간단한 인물론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