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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산신령
작성일 : 2024.12.31 12:58 작성자 : 김하기
유세차! 모월 모일
삼가 우리 산악회 회원 일동은 백두대간 낙동정맥 금정산 고당봉에서 한반도의 산과 골짜기를 두루 보살피시는 산신령님께 엎드려 고하나이다.
<시산제 축문 들머리>
시산제는 우리나라 산악인에게 1년 산행을 시작하면서 산신령께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차리고, 한해의 안전 산행을 기원하며 올리는 제로서, 회원들의 친목과 결속을 다지겠다는 다짐 등의 내용으로 시작한다.
서두에서 여러 번 거론했지만, 태초에 우리 조상을 데리고 마고성을 나온 황궁씨는 복본의 명세를 분명히 전하고, 장자인 유인씨에게 천부인天符印 단검 거울 방울을 물려주고 천산으로 들어가 큰 돌이 되었다고 모두 여겼다. 돌은 즉 산의 신 산신령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우리의 산신령 사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가 기원전 6,100년, 지금으로부터 8,400년 전이라고 신라 박재상은 말했다. 그러니 산은 우리의 모태며 나중에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돌아갈 안식처라 여겼다. 산에는 큰 돌 즉 산신인 산신령이 있었고, 산신령은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
황궁씨의 장자 유인씨나 환인의 서저 환웅도 삼위태백 백두산으로 들어가 큰 돌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도 죽으면 돌, 즉 산신이 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 때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전 세계의 40%) 문화를 남기게 되었던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천제의 서자 환웅과 웅녀가 낳았다는 단군왕검도 홍익인간 재세이화로 나라를 다스리다 1,908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산신령이 되고, 가야의 김수로는 구지봉에서, 부여의 해모수는 하늘에서 오룡거를 타고 내려와 웅심산熊心山 (곰을 숭배하는 백두산)의 산신령이 되었다. 신라의 석탈해도 동악 토함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이렇듯 나라를 다스리던 임금은 모두 산으로 들어가 산신령이 되었고 죽어서도 백성을 보살피며 보호해준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조상들은 북방문화를 따라 불교가 들어오면서 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불국토 사상과 접화군생하여 백두대간 풍류의 꽃을 피웠다.
산의 주인인 산신령을 우리는 산신, 산신령님, 산왕, 산왕대신, 산군, 산령, 산 귀신 등으로 칭했고 통상 산명을 붙여 태백산 산신령, 지리산 산신령 등으로 불렀다. 이러한 산신령은 나라를 다스리던 통치자가 사후에 산으로 들어가 신격화된 경우다. 그러면서 넓게는 국가, 좁게는 부락을 수호하는 신으로 추대받았다.
신라는 국토의 중요한 명산 다섯 곳 토함산吐含山, 계룡산鷄龍山, 지리산智異山, 태백산太伯山, 팔공산八公山을 나라의 오악五嶽으로 지정했는데, 이들 산은 모두 나라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토함산의 경우는 신라 4대 이사금이었던 석탈해가 죽어서 묻힌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대왕의 꿈에 석탈해가 나타나, "내 무덤을 파서 내 뼈와 진흙을 섞어서 소상을 만들고 토함산에 모시라"고 명령했고, 이후 석탈해가 동악대신東岳大神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신라 말기의 산신령은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왕의 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49대 헌강왕의 앞에 남산 산신령이 나타나서 춤을 추어, "지혜롭고 현명한 자들이 모두 떠나버려서 나라가 멸망하고 말 것" 을 미리 경고했지만 산신령의 모습은 왕 말고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어리석은 헌강왕은 어처구니없게도 산신령이 추는 춤을 따라 추면서, 산신령이 나타나 태평성세를 축하해 주신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5대조인 호경은 부소산(송악산) 여자 산신령에게 장가들어서 송악산 신령이 되었는데, 몽골의 침공 때는 산의 소나무가 일제히 사람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몽골군이, "산신령이 있는 산이다"라며 물러갔다고 한다. 고려 둘째 임금인 혜종의 외가이기도 했던 나주의 금성 산신령(광주 무등산)은 ”나는 임금의 고향 산신령으로 나라를 지킨다.“ 해서 정녕공定寧公에 봉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지리산, 삼각산을 오악으로, 새로운 수도가 된 한양의 사방에 위치한 산신령에게 작호를 내려 한양의 안위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때 북악 산신령을 진국백鎭國伯, 목멱 산신령을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고 작호를 내렸다.
마고 할미의 영향을 받은 신라는 여성 산신령으로 오악 외에도 신라삼산新羅三山이라고 해서 20, 21화에서 말한 김유신이 고구려의 첩자 백석에게 속아 고구려로 납치될 뻔한 위험을 막아준 호국신이 바로 삼산신령이다. 세분의 산신령은 국가 제사 편제에서 격이 가장 높은 대사大祀로 모셨다. 삼산(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의 위치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신라가 진한 소국이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산신령이라고 한다.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의 어머니도 정견모주正見母主로 최치원이 지었다는 「석이정전」 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야산의 여자 산신령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남해 차차웅의 부인으로 노례 이사금의 어머니인 운제부인이 운제산 성모라 했다.
지리산 산신령도 지리산 성모라는 이름의 여자 산신령으로 그 석상이 지금도 천왕봉 자락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여기서 잠깐, 필자의 오랜 산 벗이 직접 목격한 지리산 할미 산신령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학창시절 산 벗이 지리산 벽소령 고개를 돌아서는데, 아시다시피 벽소령은 천왕봉과 노고단 중간쯤 있는 고개로 굴곡이 무척 심하고, 벽소한월碧莦寒月이라 할 정도로 달빛이 푸르고 아름다운 곳이다.
어스름 해거름 저쪽 산마루에서 웬 할머니가 함지박을 이고 과일을 팔고 있었단다. 지치기도 하고 허기를 느낀 친구는 반가워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샛길도 없는데 함지박을 인 할머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단다. 지금도 그 친구는 가끔 그때 본 벽소령 할머니를 입에 올린다. 그 후 또 다른 산 후배도 벽소령에서 소복을 입고 함지박을 인 할머니를 해거름에 보았다고 하니…?
지리산 노고단 산신령은 신라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仙桃聖母다. 노고단은 선도성모에게 제사를 올리던 신단이란 뜻이고, 바로 마주 보이는 곳에 반야봉이 있고 멀리 보이는 곳에 벽소령 고개가 있다. 선도성모는 도인 반야를 만나 딸만 여덟 명 낳아 전국 팔도에 시집보냈단다. 아마 해거름이면 노고단 선도성모가 달맞이나 딸 맞이를 나가나 보다.
조선의 천예록에는 북악산의 산신령이 여신으로 마주 보고 있는 목멱산(남산)의 신과 부부사이로 설정되어 있는데, 조선 권필이라는 선비가 북악산 여신의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이까짓 여자 귀신 따위가 뭐라고" 하고는 산신령의 초상화를 찢고 제삿상도 엎어버렸다가 산신령의 저주를 받아 귀양을 가게 되고 유배지로 가는 길에 죽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명산은 물론 주, 군, 현 단위로 산악제를 주관하게 된다. 고대의 산악숭배 신앙은 집단, 즉 국가·부족·마을 단위 형태의 신앙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개인과 마을 단위의 신앙으로 변모하게 된다. 전국의 500여 고을에서도 주산主山이나 진산鎭山을 설정하고 정기적인 산신제를 봉행하여 자연재해로부터 백성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했고, 마을마다 등급이 하나 낮은 서낭신이나 솟대, 장승 등 마을신을 모셨다.
우리의 토속문화인 산신령이 대륙문화인 불교와 잘 접화군생 한 것이 사찰의 산신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대산이다. 오대산은 동서남북 중앙에 각각 1만씩 오만의 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신앙은 신라가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토라는 믿음에서 나왔다.
법기보살이 일만이천의 보살을 거느리고 있는 금강산, 부처님이 계시며 불법을 설한 영축산은 모두 명산에다 불교의 불국토 사상을 대입한 것이다. 명산에 유서 깊은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한 것도 불국토 사상이 만연하던 통일신라시대부터다.
불교의식인 연등회와 더불어 고려의 국가적 행사인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33년에 시작된 전통적인 산천제를 계승한 것으로서 양생(陽生)하는 중동(仲冬)에 가무백회로 국태민안을 위해 행사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도산 성모설화는 고대의 산신신앙이 불교와 신선사상이 융합된 것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산신령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산신도이다. 그림에 보면 산신령이 호랑이 등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산신령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에서 근엄하게 백발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간혹 선녀나 동자를 데리고 다닌다.
산신탱화를 자세히 한번 보자, 우선 탱화의 중심인물이 남자인 경우와 여자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여자인 경우 대표적인 것이 속리산 천황사,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의 산신탱화와 계룡산 동학사의 산신상 등이다. 이 경우 할머니는 트레머리에 댕기를 둘렀으며 치마 저고리를 입은 인자한 모습으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고, 손에는 불로초를 들고 있다. 우리의 토속 마고 할미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남자 산신탱화는 도교 유교 불교적인 것의 세 종류로 구분된다. 도교적 산신탱화는 백발의 수염에 머리는 벗겨지고 긴 눈썹이 휘날리는 신선의 모습이다. 손에는 하얀 깃털 부채나 파초선 불로초 등을 들고 있다. 산신의 뒤쪽에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을 상징으로 묘사했다.
유교적 산신탱화는 머리에 복건이나 유건 정자관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의 산신령이다. 옆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책거리나 대나무 등의 장식물 차를 달이는 도구가 있다.
불교적 산신탱화는 삭발한 스님이 〈법화경〉 등의 불경이나 단주를 들고 있다. 변형된 가사를 입고, 호랑이와 시봉으로 동자승이 등장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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