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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백두대간 인문기행 (신종석) 낙동정맥의 화랑

낙동정맥의 화랑

작성일 : 2024.12.31 12:34 수정일 : 2024.12.31 12:55 작성자 : 김하기

낙동정맥의 화랑

國有 玄妙之道 曰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 三敎 接化群生
국유 현묘지도 왈풍유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 삼교 접화군생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

우리나라 안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이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 불 선 삼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접하여 저절로 감화시킨다.
화랑을 한마디로 잘 표현한 것이 최치원의 풍류다.
바람 ''과 물 흐를 ''가 합쳐져 된 풍류는 우리의 고대 제천의식에서 나온 고유의 전통 사상으로, 한자에서 말하는 바람이나 물의 흐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성품이 고지식하지 않고 물과 바람처럼 융통성이 있으며, 더불어 속되지 않고 고상하여 삶에 있어서 운치와 멋스러움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예술적 안목을 갖춰 정서적으로 넉넉하며, 다방면의 지식도 풍부하여 어느 자리에서나 실속 있는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고 주위에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게 된다. 그러므로 풍류를 아는 사람은 그릇이 큰 지성인이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풍류란 자유분방한 한량에게 함부로 붙이는 말이 아니다. 풍류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신라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문'에 화랑 난랑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풍류도는 신라 고유의 가르침이 있어 화랑도는 그 가르침을 받들어 수련한 것이고 말할 수 있다.

선사仙家史書가 전하지 않아 풍류도의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유··3교의 정신이 바탕이 되고 합일하며 접화군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지식 원효의 화쟁과 일심도 여기서 나왔고, 이는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면면히 흘러온 홍익인간 사상과 부도복본사상이다.

낙동정맥 백두대간을 가장 많이 오르내리며 심신을 수행한 집단은 신라 화랑이다. 화랑은 남으로 금정산에서부터 낙동정맥을 따라 단석산 태백산 지리산 설악산 금강산 화랑의 이름과 흔적을 남겼다. 아니 더 올라가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세워진 황초령비와 이원군 마운령에 세워진 마운령비를 볼 수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신라 국선 화랑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선배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선배를 이두로 선인先人이라 하며 앞서가는 무리인 선배는 신단수 제단 앞에서 열린 시합을 통해 선발했다고 한다.

상원갑자 103일 환웅이 백두산 신단수에서 풍백 우사 운사 삼신과 하늘에서 데리고 온 3천 관리와 전국에서 13 정맥과 백두대간을 타고 구름 같이 몰려온 사람들은 천제에게 제사를 지낸 뒤 음복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남자들은 힘겨루기로 씨름을 했고 여자들은 그네를 탔다. 씨름에서 이긴 사람을 선배 대우를 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 화랑은 국토 낙동정맥 백두대간 산천을 돌며 학문과 씨름· 수박· 격검· 궁술· 기마· 택견· 깨금질 등 각종 기예를 수련했다.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한 곳에서 공동으로 숙식했다.

단체 생활을 하면 낭도 간에 비교 평가가 용이하다는 점이있다. 평시에는 환난을 구제하고 성곽· 도로 등을 수축하며, 비상시에는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공익을 위해 자기의 일신을 희생했다. 신라 화랑은 이런 고조선 선배와 같은 제도였다. 신라에서는 국선이라 불렀는데 이는 고구려의 선인과 구별하기 위해 앞에 국자를 넣어 만든 명사다. 화랑이라고 부른 것은 남자들이 화장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선배는 검은 옷을 입었다.

신라의 진골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서 피어나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고 말했다. 앞에서 말한 최치원은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것을 풍류라고 부른다. 유 불 선이 접화군생하여 대중을 교화하는 데 있다.

예컨대 안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국가에 충성하라는 것은 유교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를 실천하고 불언을 지키는 것은 도교 노자의 가르침이다.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불교 석가의 가르침이다라고 했다.
신채호는 신라가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무조건 모방하면서도 고조선의 제도를 가장 잘 유지 발전시킨 것이 화랑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 삼국유사의 기록을 한번 보자,

나라에서 남모 낭자와 교정 낭자라는 두 원화를 뽑자, 그를 따르는 무리 3, 4백여 명 모였다. 교정 낭자는 남모 낭자를 질투하여 남모 낭자에게 술을 먹였다. 남모가 술에 취하자, 북천으로 몰래 데리고 가서 큰 돌로 매장해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몰라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이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길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남모의 무리가 이 노래를 듣고 다시 모여 북천에서 남모 낭자의 시신을 찾아내고 교정을 죽였다. 그러자 왕은 명령을 내려 원화를 폐지했다.

여러 해가 흐른 뒤, 왕은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반 가정의 남자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뽑고 화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처음 설원 화랑을 국선으로 받들었으니, 화랑 국선의 시초다.

최초의 화랑 설원(薛原,549~606) 또는 설화랑薛花郞은 최초의 화랑국선이자 제7풍월주이다. 설원랑은 우리가 잘 아는 선지식 원효의 증조부다.

화랑의 원류를 적은 선사·선랑고사·화랑세기등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선사는 신라 이전 즉 단군 때부터 고구려·백제까지의 선배들에 관한 책이다.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新羅國記, ‘귀족 자제 중에서 잘생긴 사람을 뽑아서 분을 바르고 꾸며서 화랑이라고 불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섬겼다고 했다.”

 

화랑하면 사다함이다.

사다함斯多含신라화랑으로 진흥왕의 대가야 정복 때 큰 활약을 했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로 내물 마립간7세손이다. 풍채가 청순하고 뜻이 방정하여 무리로부터 화랑에 추대되었다. 낭도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562에 진흥왕의 명으로 이사부가 대가야 정벌에 나섰는데, 사다함은 16세의 나이로 왕에게 출진을 간청하여 귀당貴幢의 비장裨將으로 출전하였다.

사다함은 자청하여 선봉에 섰다. 성문인 전단량을 기습하여 적을 당황 시켰고 대승했다. 그 공으로 가야인 300명과 전답을 받았으나 노비는 모두 풀어주고 전답 역시 낭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관랑이 죽었는데, 무관랑과 깊은 우정을 가졌던 사다함은 죽음을 같이 하기로 하여 7일 동안 통곡하다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위서 논란이 있는 박창화의화랑세기필사본에 따르면, 사다함은 547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사다함은 대원신통 미실과 정인 관계였으나 미실세종과 혼인을 하게 되자 청조가靑鳥歌를 부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미실의 꿈에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려 아들을 낳아야겠다

는 말을 남겼다. 이후 미실은 하종을 낳았다. 대원신통 미실은 6두품 설화랑과도 정을 통한 사이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님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님앞 치지 말라.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님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나뇨. <대원신통 미실의 시(이종호 역)>

우리는 화랑을 이야기할 때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화랑들의 실천이념이라 할 수 있는 세속오계를 설한 원광圓光법사다.

세속 오계世俗五戒신라 진평왕원광법사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란 선비의 요청을 받아 알려준 다섯 가지 수신계修身戒이다. 오늘날 화랑도의 윤리적 지침 및 실천 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귀산과 추항은 서라벌 사량부에 사는 선비로, 원광 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이란 절에 머물고 있을 때. 귀산과 추항이 원광 법사를 찾아가서

우리는 속세의 사람이니 심신수양의 계를 알려 주십사.”라고 요청을 했다. 이때 원광법사, 귀산, 추항은 화랑은 아니었다.

원광 법사가 말하기를, 불계로는 보살계가 있어 이를 십계로 삼고 있으나,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라며 알려준다. 이때 원광 법사가 지었다는 말은 없고, 세속오계가 있으니라고 하여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계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세속오계의 내용은 우리가 다 아시고 있듯이 다음과 같다.

  • 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 事親以孝: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 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고,
  • 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고,
  • 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김유신이 가장 어려운 전투였다고 회고한 황산벌 전투의 화랑 관창과 화랑 반굴을 빼놓을 수 없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내외적으로 안정기를 누리게 되면서 그동안 긴장된 생활이 갑자기 풀리면서 전반적으로 사회 기강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백두대간 순례하며 심신을 단련했던 화랑의 수련도 즐기기 위한 놀이의 산유로 점차 변질되어 갔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화랑의 풍류가 산유로 변질되고 오로지 노래나 춤을 즐긴다는 가무 기능만이 남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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