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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4.15 01:55
봄 오마 머하노
/윤일현
지난 3월에 치른 대선은 우리 사회의 모든 이슈를 삼키며 일부 사람에겐 승리의 기쁨을, 또 다른 사람에겐 뼈아픈 좌절과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대선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났건만 뉴스의 초점은 여전히 정치다. 우리 사회는 지금 중병을 앓고 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 격차, 청년취업난과 중장년층의 실업, 무너지는 자영업, 세대·성별 갈등, 이념 대립 등은 가족과 동료, 이웃이 서로 반목하며 극단적인 대결을 하게 한다. 그 와중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복지사각 지대에서 극심한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똑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추해지기 싫다. 반성이나 선처를 빈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 10대 형제가 70대 친할머니를 살해한 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형인 A군이 한 말이다. 지난해 8월 대구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올해 3월 말 1심 판결이 나왔다. 형제는 부모의 이혼으로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기초생활수급자인 A군은 급식 카드로 편의점에서 음식물 사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가난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범행 당일도 “왜 급식 카드를 가지고 저녁에 먹을 것을 사 오지 않느냐. 너희들이 직접 먹을 것을 알아서 해결해야 할 것 아니냐”라는 핀잔에 그는 할머니와 다퉜다. A군은 고교 졸업 후의 삶을 걱정하며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배운 거 없고 중졸이면 알바도 안 뽑아준다. 어차피 우리처럼 머리 나쁜 사람은 20대가 되면 굶어 죽고 가망이 없어” 1심 재판부는 “부모의 이혼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 등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어린 시절부터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이고, 장애가 있는 조부모와 함께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누적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의 ‘세계불평등연구소(World Inequality Lab, WIL)’가 발표한 ‘2022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상위 10%는 하위 50%보다 연간 평균 소득은 31배, 재산은 무려 188배 높았다. 전 세계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52%를 가져갔지만, 하위 50%는 8%밖에 못 가져간 것으로 분석됐다. 상위 10%가 전 세계 자산의 76%를 가졌지만, 하위 50%는 겨우 2%만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 하위 50%의 평균 소득은 연간 1천232만 원으로 전체 소득의 16%, 상위 10%는 평균 1억7천850만 원을 벌어 전체의 46%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990년 이후 한국 상위 10%의 소득 비율은 35%에서 46%로 상승했고, 하위 50%는 21%에서 16%로 하락하며 불평등이 악화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부가 최상위층에 집중되는 현상이 심해졌다. WIL은 불평등 해결을 위해 재산 수준에 따라 부유세(wealth tax)를 거두고 이를 교육과 보건, 기후 변화 대응 등에 투입해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친할머니를 살해한 A군의 말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감옥 안과 밖이 나에겐 별다른 의미나 차이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 강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독식하면서 사회적 소수자와 저소득층을 배려하고 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소외감과 좌절감은 우리 모두의 행복과 안전을 뒤흔들 수 있다. 지금 엄청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경고음이 여러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SNS 등을 통한 무분별한 폭로와 비방, 불특정 다수에게 가하는 적개심의 표출, 개인의 좌절과 분노를 타인에게 전가하기 등의 갈등 조장 행위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맹목적인 증오심과 분노, 극단적 편 가르기가 개인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꽃과 연둣빛 잎새들이 눈부신 봄날이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아직도 빛이 스며들지 않는 그늘진 곳이 많다.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무관심의 장막을 걷어내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신음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치권과 새 정부는 음지에도 햇살이 들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아무 차이도 없는데 “정권 바꾸마 머하고, 봄 오마 머하노”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모두에게 행복한 봄날이면 좋겠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