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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인문기행 (6·25 특집) 낙동정맥 낙동강 전선

작성일 : 2024.12.24 11:09 수정일 : 2024.12.25 12:26 작성자 : 김하기

16, 백두대간 인문기행 (6·25 특집)

     낙동정맥 낙동강 전선

 프로파일 신종석 TV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유호 작사 진중가요>

 

, 6·25 동란!

단군 이래 우리 역사상 동족끼리 싸운 적은 수없이 많았다. 물론 사람들이 살아가다 보면 이웃끼리 부족 간에 이해 충돌은 수없이 많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국제전을 말한다.

한번은 642년 백제가 신라 대야성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국제전, 나당연합군과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싸운 전쟁이다. 우리는 나당연합군은 잘 아는 사실인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삼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그 이전 신라 내물왕 (399) 때 백제는 가야· 왜와 연합하여 신라 서라벌까지 공격하여, 신라 내물왕은 급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고구려 5만의 군사가 왜를 쫓은 기록은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때 남하한 고구려 군사에 의해 가야가 멸망했다고 본다.

6·25 한국동란도 다 아시다시피 미군과 UN군 중공군까지 참전한 국제전이다. 임진왜란 역시 명나라가 참전한 국제전으로 확전된 한반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엔 낙동강이 있다!

백두대간의 태백산 삼수령에서 남으로 뻗은 낙동정맥을 끼고 흐르는 강이 낙동강이다. 남한에서는 가장 긴 강이고 한반도에서는 압록강두만강 다음으로 길다. 강원도 태백의 매봉산 샘에서 발원하여 황지못에서 용출된 후 경상북도 안동 상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어진다.

낙동강이란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동국여지승람이지만 이보다 훨씬 이전 삼국시대에는 김해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가락국의 황산나루 땅을 흐르는 강이라는 뜻에서 황산강이라고 했다. 낙동洛東이라는 뜻은 낙양(상주) 동쪽에 흐르는 강인데, 이 강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6월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상기하자,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동란195062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의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삼팔선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이 침공 당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남북의 국군과 북한군 이외에도 유엔군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여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뻔 했으나, 19537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일단락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 동란은 우리 민족이 치른 전쟁 중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피해가 컸던 전쟁이다. 남북 1,749,500명 이상 죽거나 다쳤다. 남한의 사망자 수만 해도 국군 62만여 명과 UN연합군 16만여 명 등 78여 만 명이 전사했다. 민간인 피해도 커 남한에서만 민간인 100만 명 이상 사망했고 북한 빼고 남한에서만 2백만 명 이상 죽거나 다쳤다.

 

 

구분

사망

실종 및 포로

부상 계

국군

137,899

32,838

450,742 621,479

UN연합군

40,670

9,931

104,820 155,421

북한군

508,797

98,599

-

중국군

148,600

25,600

798,400 972,600

합계

835,966

166,968

1,353,962 총계 1,749,500

<6.25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 통계집>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해와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다. 6.25 동란으로 10만여 명이 넘는 전쟁고아와 천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전쟁의 피해자는 언제나 힘없고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어린이 여자들이 많은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 부모 가족을 잃은 아이들은 동냥하거나 먹거리를 찾아 거리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문화재 건물 도로 등 국토의 80%가 파괴되었고, 정신적인 피해도 커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겪으면서 불신의 벽이 높아졌다. 지금도 적대감이 깊어져 전쟁이 남긴 상처가 아마 오랫동안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항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없는 어린이 여자들이다. 지금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전쟁을 일으킨 위정자들은 늘 백성과 국민 인민을 앞세운다. 백성과 국민 인민은 그들의 정치적 도구 노리기에 불과 했던 것이다. 지금도 위정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국민과 인민을 위한다고 떠들고 있다.

 

유월을 맞이하여 오늘은 6·25 동란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을 상기하고자 한다. 국군과 UN군이 낙동강에 배수진을 치고 반격한 전선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한 낙동강이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Battle of the Naktong River Defense Line, 미군 전사에는 Battle of the Pusan Perimeter 부산 교두보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1950625일 새벽 04, 삼팔선에서 아무 대비 없이 침공당한 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공세에 계속 후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났다. 미군과 국군은 낙동강 140Km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고 참전한 UN군과 합세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6주 동안 막아내며 대구· 마산· 포항· 낙동강을 사에 두고 벌어진 졌다. 6.25 동란 중 가장 치열하고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19508월과 9월 사이, 북한군의 대대적 공세가 두 차례나 있었음에도, 국군과 유엔군의 성공적인 방어로 낙동강과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을 한국군과 UN군이 막아내 낸 결정적인 전세는 미공군의 막강한 공중 폭격에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낙동강 전선의 일등 공신은 미군의 B 29 폭격기였다.

북한군도 공군은 있었으나 미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공군은 낙동강 전선에 방어전을 펼치면서 주로 북한 평양 등 군수 시설과 북한군의 지휘소와 보급로 차단을 위주로 공습했다.

6주 동안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국군과 UN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반격의 기회를 얻었고, 결국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져 국군은 북진을 했다. 나중에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이되고 1.4 후퇴 등 3년의 전쟁으로 이어진 단군 이래 동족 최대의 비극이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며칠 후, 유엔은 발 빠르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을 받은 대한민국에 16개국에서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북한군의 침공에 반격하고,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극동에서의 미군 병력은 2차 세계 대전이후 꾸준히 약화하였고, 일본에 있던 미국 제824보병사단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미군이었다. 그 당시 일본 내의 재일 미군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단은 조직력이 약했고, 사단 대부분의 무기는 구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24보병사단은 급하게 대한민국으로 파병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북한군의 침공을 최대한 지연시켜 후속 부대의 도착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7보병사단25보병사단 1기병사단등의 미국 제8군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몇 주간 국군과 힘겹게 북한군의 침공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미 24보병사단은 75오산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오산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 사이의 첫 전투였다. 스미스 부대의 패배 이후 첫 1달 동안 미 24보병사단은 연속해서 패배했고, 북한군의 수적 및 물적 우세로 계속 남하해야 했다. 24보병사단은 천안· 평택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충청도 일대까지 후퇴해야 했다. 24보병사단은 후퇴하면서 힘겨운 마지막 저항을 했고, 새로운 유엔군 병력 또한 매일 대한민국 부산항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6,25 동난 18일간의 격전지 다부동 전투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195081일 진주 김천 점촌 안동 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격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1군단과 제2군단은 김천과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었다. 720일 승기를 다잡았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수안보까지 내려와, 동무들, 8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고, 서울 열병식에 참가하시오!”라고 재촉했다.

7월 말 북한군의 작전개념은 첫째,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로 진격, 둘째,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 경주 방향으로 진격, 셋째,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의 병참선 차단, 넷째, 남해안을 따라 마산 부산 방향으로 총공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4개의 공격축선에서 동시다발적 공격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부산을 815일 이전까지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김일성은 815일까지 한반도 조국 해방이란 꿈을 꾸고 있었다.

 

한편,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이 81, 낙동강 방어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에 따라 유엔군이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자, 인민군은 UN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맹추격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북부 전선에서는 85일에 무리하게 낙동강 도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낙동강 북부 전선을 담당한 인민군 제2군단은 북에서 남으로 7개 사단을 배치하여 대구를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다. 북 제1군단은 서에서 동으로 4개 사단을 전개하여 영산과 함안· 마산을 잇는 선을 돌파해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다. 주 공격선은 5개 사단이 집중된 대구 방면에 증강된 3개 사단(북한군 3, 13, 15사단과 1사단 일부). 일명 '8월 대 공격'이 시작되었다.

 

1950812,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에 북한군은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다. 대구 북방 22Km 지점에 있는 많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작은 마을 다부동은 국군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당시 대구는 30만 인구에 피난민들이 몰려 70만에 육박했다. 다부동이 뚫리면 대구는 코앞이고 부산까지 방어할 곳이 없었다. 그냥 남한 정부는 섬 제주도로 가야 할 판이었다.

처음 다부동 지역의 아군 방어 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이였고, 그나마 인접 사단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북한군의 주 접근로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부근으로 강을 건너는 북한군을 몇 차례 격퇴했으나 중과부적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북한군 서울 함락 사단(일명 서울 사단) 병력은 21,500, T34 전차 20, 야포 670문이었고

국군 제1사단은 7,600명 전차 0(없음), 172문이 전부였다.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물러났다. 왜관 일대의 미 제1기병사단은 역습을 전개해 낙동강을 건너려는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811일 중과부적으로 힘에 부친 국군은 방어선을 작오산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죽을힘을 다하여 방어하여야만 했다.

816일 대구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사령부가 낙동강의 북한군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해 미 B2998대가 26분 동안 960톤의 융단 폭격을 감행했다. 이 폭격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북한군의 보급과 작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B29기 융단폭격으로 가시적 승기를 확인한 UN군은 이후 낙동강 전선뿐만 아니고 북한의 평양 이북까지 군수기지와 지휘소에 어마어마한 융단폭격을 가했다. 지금도 북한은 미국의 융단폭격 트라우마로 모든 주요시설을 땅속에 설치할 정도다. 미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핵을 보유해야 한다고 북한은 신앙같이 믿고 있다.

818일 한밤중, 가산에 침투한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가 또 고조되고, 남한 임시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는 등 대구 일대가 잠시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국군 제6사단 방어선도 미 B29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격퇴하자, 북한군의 대구 공격은 다시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에 총집중되었다.

당시 전항을 전한 용사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12연대 3대대 최병형 소령, 매일 5천명의 병력을 보충받았으나, 다음날 반으로 줄어있었다.”

15연대 1대대 황태형 중사, “15번이나 뺏고 빼앗긴 다부동 328고지에 온전한 시체가 하나도 없었고, 폭탄에 찢어지고 해진 시신 조각이 천지에 늘려 있었다.“

823일 유학산 839m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은, 유학산은 대구가 보이는 돌산이다. 우리가 밀리면 나라가 끝장이다. 내가 앞장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쏘아라.

12연대장 김점곤 중령, 병사들이 수류탄을 많이 던져 팔이 퉁퉁 부었다.“

시산혈하의 전투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에 흘렀다.

821일 다부동 천평 계곡에서 북한 T 34 전차와 뒤늦게 참전한 미 M 26 전차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성능에 밀린 북한 T 34 전차는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다부동가산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다부동 방어 전투에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B29기 융단폭격과 미 제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 군번 없는 대한민국의 학도병, 자진해서 입대한 민간인, 폭탄을 지게에 지고 밤새 나른 노무자 등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침내 820일 북한군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퇴하기 시작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다부동을 지켜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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