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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12.23 12:56 수정일 : 2024.12.23 01:37 작성자 : 김하기
15. 백두대간 인문기행
황금 상자에서 나온 김알지
秺侯祭天之胤傳七葉
투후제천지윤전칠섭
하늘에 제사 지내는 종손으로서 투후로 책봉된 뒤에 대륙에서 7대를 이어 왔다.
문무대왕릉비문
탈해 이사금 서기 60년 8월 4일이었다.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 서쪽을 지나가는데, 시림 숲속에서 광대한 빛이 발광하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호공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 급히 탈해 이사금에게 아뢰었다.
“폐하, 신이 월성 서쪽을 걸어가는데, 시림 숲에서 광대한 빛이 발광하는 것을 보았나이다.”
탈해 이사금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하문했다.
“오, 그러하오!”
“신이 자세히 보니 한줄기 오색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습니다. 황금 상자에서는 빛이 사방으로 비쳐 나오고 흰 닭들이 나무 밑에서 마치 귀인의 탄생을 알리듯, 꼬기요하고 힘차게 울기 시작했나이다. 여사롭지 않은 일이라 폐하께서 친히 나가시어 살피는 것이 좋다고 여겨 아뢰옵나이다. “
”오호, 기이하도다. 어서 앞장서시오. 호공.“
탈해 이사금이 친히 나와 황금빛 나는 상자를 열어보니, 남자아이 하나가 누워 있다가 곧바로 일어났다. 그 모습이 옛날 혁거세왕이 ‘알지 거서간 한 번 일어나다‘ 한 말을 연상케 했다. 탈해 이사금은 그 말을 따 아이에게 알지라고 이름 짓고 궁으로 데려갔다.
시림 숲에서 알지의 탄생을 알리는 흰 닭이 “꼬기요” 하고 울었다는 울음소리는 혁거세신화에서 나정 옆의 숲에서 흰 말이 울었다는 내용과 그 신화적 표현 동기가 매우 유사하다. 시림은 알지가 나타날 때 숲에서 흰 닭이 울었다고 하여 나중에 계림으로 바뀐다. 시림은 지금의 경주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있다.
금으로 된 상자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것은 알지가 난생이 아니라 태생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유사의 알지 신화에서는 ‘알지’는 신라 방언으로 ‘아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탈해 이사금이 아이를 안고 궁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고 온 천지가 기뻐했다. 탈해 이사금은 좋은 날을 받아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다. 탈해 이사금이 승하하자, 알지는 보위를 사양하며, 탈해 이사금의 차남 파사婆裟에게 보위를 양보했다.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로 했고,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된다. 김알지의 7대손 미추가 이사금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신라 13대 이사금인 미추다.
박 씨 이사금에서, 석 씨인 탈해 이사금이 남해 차차웅(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것처럼, 김알지 역시 석씨 왕실의 사위라고 볼 수 있다. 신라에서 왕의 성씨가 달랐던 것은 대부분 사위 계승이다. 신라는 모계의 영향으로 사위나 아들이나 동등하게 계승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992년 동안 56명의 왕이 있었는데, 김씨 왕조가 556년으로 가장 오래 집권했고, 박씨 가 232년, 석씨 가 172년을 재위했다.
신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모계사회로 사위·외손 계승이 가능했고 세계사에서도 유일하게 여왕이 3명이나 재위했다. 한 가문이 왕위 및 왕족을 독점하는 게 상식이었던 인류사의 주요 왕조 중에서도 특이하게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면서 왕위를 이은 것으로, 화합과 조화를 이룬다는 한마음 일심, 즉 홍익인간 이념과 마고할미의 부도복본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잠깐, 경주 김씨 측에서 정사로 주장하는 김알지의 선조 김일제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라 30대 문무대왕릉비에는 '秺侯투후 祭天之胤제천지윤이라는 문구가 있다. 투후는 오르도스 지역의 제후 즉 김일제로 제천지윤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흉노 왕족(김일제)의 후손 “신라 김씨의 조상은 북방 유목민 흉노의 왕손” 이라는 내용이다.
흉노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金日磾의 5대손이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이고,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5대손이 김해 김씨 시조 김수로라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에 석탈해가 김알지를 안고 대궐로 가는 길에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고 쓰여 있는 것도 북방과의 연계를 의미한다. 북방 기마 민족은 새가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자라고 믿었고 조장을 치르는 풍속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들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로 운반해 준다고 믿었다.
우리는 앞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낙동정맥에서 접화군생한 신라 3편의 시조 신화를 보았다. 박혁거세, 석탈해는 알이란 난생입니다만, 김알지는 계림 숲에서 태어난 태생이다. 이제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 거론했다시피 신라 6부 촌의 사람들은 한반도 토속문화로 일만 년 이전부터 부산 동삼동· 가덕도 장항을 거쳐 낙동정맥을 타고 백두대간을 오르내린 토속 남방 석기문화이다.
기원전 2457년(上元 甲子) 4482년 전, 음)10월3일 환인의 서자 환웅천왕이 천부인天符印 청동기 세 개를 가지고 삼위태백산三危太伯山(백두산) 신단수에 내려와 백두대간을 따라 청동기를 전하며 토착세력이되었다.
박혁거세 역시 북방 철기 문화 민족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철기를 전수하며 청동기 토착세력의 지지를 받아 자연스럽게 접화군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석탈해는 바다 건너온 남방문화와 균형을 맞추는 환웅(산)과 용왕(물)의 화합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가야의 허왕후와도 맥을 같이하며, 우리 민족은 산과 물이 접화군생하는 배산임수를 최고의 길지로 여겼던 것이다.
김알지의 7대손 미추가 신라 13대 미추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먼저 걱정했다.
“폐하, 궁전이 날고 초라해 임금의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새 궁전을 지어 폐하의 음덕을 널리 기리소서.”
“아니 돼요. 지금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있는데, 어찌 호화스러운 궁전을 새로 짓는다 말이오.”
신하들이 궁전을 고치자고 했으나 백성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아마 환웅 단군 시대를 표방했던 것 같다.
미추 이사금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신라의 호국신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신라 14대 유례 이사금 때의 일이다. 이서국 사람들이 서라벌을 공격해 오자, 신라군은 방어하였으나 전세는 점점 불리해지고 있었다. 이때 문득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과 합세해 적군을 물리쳤다.
적이 퇴각한 뒤에 보니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어, 그제야 모두 다 선왕의 음공임을 알았다. 그때부터 미추왕릉을 대나무 잎 꽂은 병사가 나타났다 하여 죽현릉이라 불렀다.
혜공왕 15년 4월 어느 날,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장군 차림의 장수와 병사 50여 명을 이끌고 미추왕이 계신 죽현릉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얼마 뒤 무덤이 진동하며 무릎꿇은 장수의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 김유신 아뢰오! 제가 살아서는 정사를 돕고 환난을 구제하고 또한 나라를 통일한 공로를 세웠으며, 지금 넋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며 재앙을 물리치고 환난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나이다.
폐하! 그런데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지금 임금이나 신하들이 저의 공적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저는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는 나랏일에 힘쓰지 않겠으니, 원컨대 대왕께서 윤허하소서.”
하소연하는 이는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었다. 깜짝 놀란 미추 이사금이 무덤에서 나와 김유신을 달랬다.
“유신 공, 들으시오. 짐과 그대가 이 나라를 수호하지 않으면 이 백성은 어찌하란 말이오? 부디 그대는 이전처럼 힘을 쓰도록 하오.”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김유신은 세 번 간청하였으나 미추 이사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으니 김유신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경신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어 대신 사과하고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에 내려 유신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나라를 지킨 미추왕의 음덕을 사모하여 오악과 함께 제사 지내고, 서열을 오릉(五陵 혁거세왕릉)의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 하고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며 덕을 기렸다.
위의 두 설화를 통해 신라 김씨 미추 이사금을 동해의 호국용이 된 김인문 문무대왕과 비슷하게 나라를 지키는 호국 신적인 임금으로 추모했다. 이것이 신라를 992년 동안, 경주 김씨가 556년으로 가장 오래 집권한 이유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