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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기행

신종석(14) 14, 백두대간 인문기행 토함산 용왕의 아들 석탈해

작성일 : 2024.12.23 12:51 수정일 : 2024.12.25 12:19 작성자 : 김하기

14, 백두대간 인문기행

토함산 용왕의 아들 석탈해

 

  신종석 TV

석굴암 부처님이 입을여시고
하마다 무슨말씀 하실듯하이
서라벌 황금문화 자랑스러워 

토함산 올라서서 어깨를펴네   <이은상 조국강산>

 

신라 오악은 나라의 제사를 임금이 직접 지내던 다섯 산악을 말한다. 우리 조상은 왜 산에서 제사를 지냈을까?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원전 2457(上元 甲子) 시월 상달, 4482년 전, 환인 천제의 서자 환웅 천왕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삼위태백산三危太伯山 백두산 신단수 아래 삼천 관리를 대동하고 내려와 처음 제사를 지냈다. 우리는 이날을 103일 개천절이라 부른다.

환웅 천왕과 단군 임금께서 180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산으로 들어가 돌, 즉 산신령이 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삼한일통 이전에는 서라벌 주변의 토함산, 금강산, 함월산, 선도산, 단석산과 낙동정맥의 시발점 다대포 몰운대에서 내을奈乙 신궁의 제주, 임금이 직접 산과 바다(용궁)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삼한일통 이후,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으로 확대되어, 동악 토함吐含· 서악 계룡鷄龍·남악 지리地理· 북악 태백太伯· 중악 부악父嶽 팔공八公 이라했고 역시 천제에 제사를 올렸다.

우리나라의 13 정맥은 삼면이 바다인 해양의 기운을 받아 백두대간으로 모이고 또 대륙을 타고 온 북방문화가 백두대간 13 정맥을 타고 해양으로 뻗어나간다.

먼저 동해의 정기가 포항 영산강과 울산 태화강을 타고 올라와 금오산을 지나 단석산 낙동정맥과 합류하는데, 그 시발점인 동쪽 토함산을 찾아가 보자.
토함산은 신라의 대명사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는 경주국립공원의 대표적인 곳으로 신라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한다는 산, 토함산은 특히 신라 제4대 임금인 석탈해昔脫解가 남방해양 문화를 가지고 도착한 곳이며, 한반도의 출발점인 선사시대 부산 동삼동과 가덕도 장항 해양 문화를 뒷받침해 주는 아주 역사적인 곳이다.

                                *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고 맏아들 신라 제2대 남해왕 때였다. 어느 날 가락국 앞바다에 웬 배 한 척이 들어왔다. 가락국 수로왕은 무척 반기며 신하를 데리고 풍악을 울리며 맞이하려 하자, 배는 잘못 입항했다는 듯 달아나더니 신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닿았다.

아진포에는 혁거세 거서간에게 해산물을 잡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바닷가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할아버지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길이가 스무 자에 넓이가 열 석 자나 되는 큰 궤짝이었다. 할아버지가 궤짝을 열어보니,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일곱 가지 보물과 하인들이 들어 있었다.

여사 아이가 아니구나!”

할아버지는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더니, 7일 후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할아버지, 저는 본디 바다 건너 용성국龍城國왕자입니다. 제 아버지는 용성국의 함달파왕이고 어머니는 적녀국의 공주였습니다. 어머니는 시집와 7년이나 아들을 낳지 못했고 매일 기도를 드렸답니다. 왕자를 낳게 해달라고, 어머니는 7년 기도 끝에 수태했는데 낳은 것은 사람이 아닌 알 하나였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는 모두 알에서 깨어난 난생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당시 사람들은 태생이 아닌 난생은 태양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난생은 태양. 천제의 자손, 껍질을 깨고 난다는 것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천제의 천손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아버지 함달파왕은 괴이한 일이라고 대신들과 상의한 후 커다란 궤짝에 아직 알에서 깨어나지 않은 저를 넣고, 노비와 일곱 가지 보배를 넣어 인연 있는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배가 용성국을 떠날 때부터 붉은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여기까지 배와 저를 호위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왕자는 말을 다 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지팡이를 짚고 두 사람의 하인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돌집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 뒤에 산에서 내려와 서라벌 성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둘러보던 중 호공瓠公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초승달처럼 생긴 언덕 지기에 좋은 호공의 집이 마음에 들었든지 왕자는 꾀를 냈다.

그 날밤 왕자는 하인을 시켜 호공의 집 담벼락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게 하고, 이튿날 아침 관가에 나가, 그 집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했다.

전부터 호공이 그 집에서 살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또는 왕자에게 물었다.

무슨 근거로 이 집을 네 집이라 하는고?”

, 사또. 증거물로 집 마당에서 나온 이 숫돌과 숯을 보십시오. 이 숫돌과 숯은 분명 할아버지께서 이 집에서 사셨다는 증거이옵니다.”

그리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자, 그 소문을 들은 남해왕은 탈해가 슬기롭고 출중함을 알고 공주를 시집 보내어 사위로 삼았다. 그 맏공주가 아니부인 阿尼夫人이다.

석탈해의 신기한 이야기는 또 있다.

하루는 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목이 말라 시종 백의에게 물을 떠 오라고 했다. 백의가 목이 말라 오는 길에 몰래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뿔로 만든 잔이 백의의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백의가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먼저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잔이 입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탈해를 두려워하며 감히 속이지 않았다고 한다. 토함산에 있는 요내정遙乃井 이 바로 그 우물입니다.

남해왕이 승하하자 왕의 아들 노례는 지략이 뛰어난 매부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했다. 하지만 탈해는 극구 사양하며, 두 사람은 서로 보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끝에 탈해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예로부터 덕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했소이다. 그러니 우리 중 이가 많은 사람이 보위에 오르는데 어떻겠소이까?”

그 좋은 방법이오다.”

두 사람은 좋은 생각이라 말하고, 인즐미 떡을 한 입씩 물어 그 잇자국을 세어 노례가 더 많아 남해왕을 이어 보위에 올랐다. 여기서 유래하여 왕의 칭호를 잇금(이사금尼師今 임금)이라 한다. 이 분이 노례 이사금 일명 유리왕이다.

삼국유사에는 노례 이사금이라 되어있고, 삼국사기에는 노례 이사금의 이름인 유리로 기록되어있다.

유리왕 노례 이사금은 6부 이름을 개정하고, 박혁거세 들머리에서 서술한 이, , , , , 설 씨 여섯 성을 내렸다.

우리 한민족의 명절인 한가위 추석의 풍습이 생긴 것도 노례 이사금 때부터다.

노례 이사금 5(서기 28) 한겨울, 노례 이사금이 나라를 둘러보다가 한 할머니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걸 보고는 안타까워하며 옷을 벗어 덮어주고 밥을 먹인 뒤에 관리에게 명해 나라 곳곳의 홀아비 과부 고아 부양 가족이 없는 노인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정책을 펼쳤다. 신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주변 나라에까지 펴져, 너도 나도 신라로 몰려왔고, 사람들이 <도솔가兜率歌>라는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是年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이 해에 민속이 환강하여 도솔가를 처음으로 지으니, 이것이 가악의 시초였다.”

삼국유사에는 始作兜率歌 有嗟辭詞腦格 도솔가를 처음으로 지으니 차사사뇌격이 있다.”

도솔가는 왕의 어진 정치를 찬송하고, 국태민안을 축원하고 부족연맹국가의 무한한 발전을 염원하는 내용이다. 오늘날 농악의 쾌지나칭칭· 강강수월래에서 볼 수 있는 윤무가輪舞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가라 하기도 하고, 상고시대의 종교적 의식의 축사이며 새로운 서정적 민요이다.

동양적 예악사상에 입각해 궁중의례에서 연주된 최초의 정풍 가악이기도 하다.

노례 이사금이 승하 후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옛날 우리 집이오!” 남의 집을 빼앗았다고 하여 성을 옛 석이라 했다는 설과, 탈해가 아진포 해변에 들어올 때 까치가 따라다닌 것을 보고, 까치 작의 한 편만 떼어내어 석씨로 성을 삼게 했다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탈해脫解를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토함산은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란 뜻이다.

탈해왕이 23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승하하자, 석탈해 두개골의 둘레가 석 자 두 치이고, 몸 뼈의 길이가 아홉 자 일곱 치, 가히 천하의 적수가 없었다고 한다.

석탈해의 뼈를 부수어 썩어 실제 크기의 토우를 만들어 궁에 모셔두었으나, 어느날 혼령이 나타나 내 뼈를 동악에 두어라!” 동악은 토함산이다. 토함산에 모셔두고 동악신으로 모셨다.

석탈해의 원천은 물 바다다. 이전 하늘과 더불어 물(바다)속이 신성한 초월적 세계로서 관념되어 있다는 당시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문화는 하늘과 물이 처음 만나는 산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구려 동명왕 신화에 등장하는 강 신의 딸 유화柳花, 박혁거세 신화의 알영閼英, 그리고 김수로왕 신화의 허왕후로 이어져, 고려왕조 전설에 등장하는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의 아내인 용녀龍女까지 이어진 하늘과 물의 조화의 진실이 중요할 것이다.

고조선 이후 다시 삼한일통을 한 신라의 힘은 박혁거세의 북방 철기 문화와 석탈해의 남방 문화 그리고 6부촌의 토속문화가 낙동정맥을 따라 서로 접화군생하며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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