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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3.25 12:43
15. 날이 어두우면, 안분지족(安分知足)
/양선규
‘때에 맞게’ 행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때’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대개는 실패합니다. 실패한 한 뒤에야 아는 게 '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때’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건 '사후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성공에는 ‘때’가 없습니다. 모든 성공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이거나 내 능력의 소산이거나 앞뒤가 분명한 인과론(因果論)의 결과일 뿐입니다. 성공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그저 투명할 뿐입니다. 그러니 ‘때’라고 부르는 불투명한 환경이나 조건이 아예 필요가 없습니다. ‘때’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일종의 ‘종합적인 맥락 고려’가 개입할 여지가 애초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은 성공과 실패를 두루 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때’라는 말이 종종 ‘불운’과 이음동의어처럼 들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때가 안 좋았다’, ‘때를 몰랐다’라는 말은 그래서 실패자를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수사(修辭)가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때’를 무시하거나 회피하면 어쩔 수 없이 실패할 확률을 높일 것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경험칙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행여 그것이 세간적인 ‘계산’으로 오인될지라도 앞뒤를 잘 살펴서 ‘때’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 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도 그런 장면을 한 번 목격합니다. ‘때’가 아닌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욕만 앞세워서 ‘사물을 알맞게 하고 덕을 고르게 베풀’ 기회를 놓치는 사람을 봤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이력도 비슷하고 인품이나 능력도 엇비슷한 세 사람이 하나의 자리(선출직)를 두고 경쟁적으로 출마선언을 하였습니다. 뜻있는 주변 분들의 단일화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한 분은 사퇴했지만 두 분은 끝까지 '때'를 무시했습니다. 정권교체와 함께 지역사회에 찾아온 오랜만의 훈풍을 그렇게 걷어찼습니다. 충분히 알 만한 분들이 왜 그렇게 ‘때를 모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적으로 나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각자에게 그렇게 나서야만 될 어떤 발분(發憤)의 계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때’를 살펴야 한다는 게 주역의 가르침입니다. 내 일은 아니지만, 새삼 ‘때를 아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알겠습니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저라도 앞으로 남은 생에서 다시는 실수하는 일이 없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상전에서 말하기를, 못 가운데 우레가 있는 것이 수(隨)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어두워지면 들어가서 편안히 쉬느니라. (象曰 澤中有雷隨 君子以嚮晦入宴息)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52쪽]
주역 열일곱 번째 괘는 택뢰수(澤雷隨), 수(隨)괘입니다. ‘수(隨)는 강이 와서 유약한 데에 낮추고 움직이고 기뻐’하는 것이니 ‘크게 형통하고 바르게 하여 허물이 없어서 천하가 때를 따르는’ 괘입니다. 당연히 ‘때의 의의’를 강조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수괘의 핵심은 ‘날이 어두우면 들어가서 쉬어야 한다’는 구절에 있습니다. ‘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들어가서 쉬는 때’라는 것입니다. 자작 들어가서 쉬면 몸과 마음에 다 덕이 쌓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의욕을 제어하지 못해서 들어가 쉴 때를 놓치고 몸과 마음을 상하는 것은 인생을 크게 낭비하는 일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때의 의의’는 들어갈 때를 알아서 들어가 쉼을 즐기는(嚮晦入宴息) 데 있습니다. 나아가서 용맹을 떨치거나 옛 부귀영화를 되찾아오는 것은 ‘때’와는 결코 연결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절로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 안에 드는 것이지 ‘때’를 살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역의 가르침입니다. 강(剛)이 절로 유(柔) 아래에 거하는 형국이니 이미 천하는 ‘바름이 이로운 형세’에 처해 있습니다. 남은 것은 ‘때를 아는 이’들의 ‘향회입연식’(嚮晦入宴息)입니다. 아는 자의 선택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택뢰수(澤雷隨)! 향회입연식(嚮晦入宴息)!!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