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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석(10) 10. 백두대간 인문기행 영축산 통도사 자장

작성일 : 2024.10.12 10:01

10. 백두대간 인문기행

영축산 통도사 자장

 

원차종성변법계願此鐘聲遍法界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철위유암실개명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산의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 다 밝아지며

삼도이고파도산 三途離苦破刀山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여의고 도산지옥 무너지며

일체중생성정각 一切衆生成正覺

모든 중생 바른 깨달음 이루어지이다.

<새벽종송>

 

646(선덕여왕 15)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은 신라 십성으로 초대 대국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대국통은 신라 최고 승려에게 내리는 일종의 승관직이다.

신라 승관직은 대국통大國統이외에도 대서성大書省· 국통國統· 도유나낭都唯那娘· 대도유나大都唯那· 주통州統· 군통郡統 등이 있었다던 것으로 보아 가히 불국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자장은 물려받은 전재산으로 원녕사를 세운 뒤 스스로 출가했다. 선덕여왕은 수행 중이던 자장에게 몇 번이나 찾아가 관직에 나와 자신을 도울 것을 종용했다.

자장대사, 부디 태보台輔관직을 맡아 저를 좀 도와주세요. 나라 안팎에서 모두들 왕이 여자라고 만만히 본다오.”

폐하, 나라 안에 저보다 유능한 인재가 많사옵니다. 그들을 널리 등용하시면 그 누구도 신라를 만만히 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저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백성의 마음을 다스리겠나이다. 부디 소승의 출가를 윤허해 주시옵소서.”

자장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 선덕여왕도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했다고 한다. 신라 진골은 반듯이 왕의 허락을 받아 출가했다.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자장 하면 통도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을 빼놓을 수가 없다.

통도사 이름은 영취산의 기운이 서역국 오인도西域國五印度의 땅과 통한다고 하여 통도사라 불렀다. 산 이름 영축산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라 불렀다.

우리나라 최고의 불보사찰 통도사의 가람 배치는 영축산에서 발원한 '서출동류'하는 물의 흐름이 서에서 동으로 좌향하고 있다. 따라서 들머리에서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장축과 만세루 ·3층석탑 ·영산전으로 이어지는 하로전,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이 모두 물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대웅전 ·금강계단 축의 상로전으로 상 ··하의 전각의 위계를 가진 부축을 아주 낮은 높이차로 구분한 삼국시대 이후에 사찰배치로 유래가 없는 삼원식 가람배치형식을 취하고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통도사 계단戒壇은 불가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규법인 계를 받는 단을 말한다. 금강계단이라 부르는 것은 계를 지키는 마음이 금강과 같이 굳건하여 파계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의미다. 부산 금정산의 범어사도 중생에게 불법을 설하던 보제루에 일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란 현판을 달았다.

자장이 지었다는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지금도 많은 스님들이 계를 받고 출가자가 되고 있다. 정방형의 기단 위에 사리탑을 안치고 돌로 사방을 두른 형태다.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창건 당시부터 아주 중요한 사찰로 주목받았고, 지금은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불보사찰로 한국 사람이면 불자가 아니라도 모르는 이가 없다.

 

자장은 외가 팔촌 아우뻘 되는 원효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하나가 원효와 의상의 당나라 유학 계획이다. 당시 신라 화랑과 젊은이들은 문화 선진국 당나라 유학을 동경했다. 자장의 영향을 많이 받은 원효와 의상은 두 번이나 당나라 유학길에 나서지만, 1차는 650년 육로로 걸어가다 고구려 병사에게 잡혀 실패하고, 다시 원효와 의상은 2차로 백제 멸망 후 661년 당항성에서 이번엔 뱃길로 계획한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은 혼자 당나라 유학을 간다. 원효와 의상은 내외종 사촌으로 원효가 8살 많은 형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 절은 대부분 자장, 원효의상이 창건한 걸로 되어있다. 우리나라 초고의 사찰, 통도사 처럼 신라 시대 유물이나 확실한 사료가 남아 정말로 자장이 창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다수는 사찰의 역사나 정통성을 올리기 위해 자장, 원효, 의상의 명성을 차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신라 십성 중 유달리 자장, 원효, 의상의 법명이 대중에게 오르내리는 이유는 세 스님의 정확한 기록이나 저서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십성十聖은 모두 스님들로, 아도阿道· 염촉厭髑, 자장慈藏 · 원효元曉 · 혜공惠空· 혜숙惠宿 ·안함 安含 · 의상義湘 · 표훈表訓 ·사파蛇巴(원효의 전생 도반) 이렇게 열 분을 신라 십성이라 한다.

황룡사에 십성의 탑이 있었으며, 금당의 벽에도 십성과 이차돈異次頓의 영정이 그려 있었다.

 

 

*

 

643(선덕여왕 12) 가을, 자장은 고국 신라로 돌아가기 전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오체투지 철야 기도를 하고 있었다. 멀리 삼마루에 희뿌연 새벽이 오기 전 문수보살상 뒤에서 웬 노스님 한 분이 나와 이렇게 말했다.

자장율사, 그대의 지극 정성에 감동했소. 받으시오. 이것은 나의 스승이신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었던 가사이고, 이 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오다.”

놀란 자장은 두 손 받들어 노스님께서 주시는 것을 공손히 받았다,

스님의 자비와 은총에 황공하옵니다.”

자장율사, 그 대는 반드시 말세에 나라와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가 그대에게 주는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 신라 남쪽 영축산 기슭에 독룡 아홉 마리가 기거하는 구룡지九龍池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은 독해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오,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이 그곳을 옹호하게 될 것이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자장은 노스님께서 주시는 가사를 받고 삼배를 올리자, 노스님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노스님은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다음 해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그 사실을 고하고 영축산을 찾았다.

자장은 아홉 마리의 용이 산다는 구룡지에서 목탁을 치며 주문과 경을 암송하며 용들에게 조용히 못을 떠날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용들은 일절 자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장은 법력으로 아홉 마리 용과 결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장이 불법을 외우며 목탁을 다시 치자 견디지 못한 용들은 제각각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쁜 세 마리의 용들은 달아나다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용혈함이라 했다. 뒤늦게 달아난 다섯 마리의 용들은 영축산 골짜기에 모두 떨어져 죽었다.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오룡골이라 불렀다.

마지막 한 마리의 용은 눈물을 흘리며 자장율사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은 통도사를 지키는 수호룡이 되겠다고 맹세하자, 자장율사는 조그마한 연못을 남겨두고 그곳에 수호용을 살게 했다. 그 못이 통도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구룡지다.

 

*

 

삼국유사탑상편 제4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 가를 지날 때 안개 속에서 신인이 나타나자, 자장은 하소연하였다.

우리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국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소이다.” 라고 하자,

신인이 대답하길, “황룡사 호법룡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했다.

 

자장은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한다.

선덕여왕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기술지도를 받고, 이간 용춘(龍春 김춘추의 아버지)으로 하여금 공사감독관이 되어 소장 200인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하였다.

처음 탑의 찰주를 세우던 날 장인 아비지의 꿈에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천지가 어둡더니 한 노승과 금강역사가 금전문에서 나타나 탑의 기둥을 세운 뒤 사라졌다. 백제 장인 아비지는 이것은 부처님의 뜻이구나 하고 탑을 마무리한다.

찰주기에 기록된 규모를 보면, 철반 이상의 높이는 42, 이하는 183척이고,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사리 100립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 탑에 나누어 봉안했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은 왜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백제)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고구려)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전체 225(80m)의 대탑이었다.

탑 속에는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되었고,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

낙뢰로 파손된 것을 여섯 번 중수하였으나, 고려 고종 25(1238) 몽고군의 침략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

 

자장은 노년에 강원도에 수다사를 세우고 머물다가 태백산 기슭 영월 정암사에서 입적한다.

어느 날 문수보살이 죽은 강아지를 담은 삼태기를 맨 늙은이로 변신하여 자장을 찾아왔다. 그러나 자장은 문수보살을 늙은이 미친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문수보살은 돌아서 혀를 차며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라며 사라졌다.

我相.아상: 실체로서 자아가 있다고 믿고 집착하거나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 요즘 말로 나르시시즘과 유사한 의미.

이 말을 들은 자장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황급히 쫓아 문수보살을 찾아 고개에 올랐으나 이미 사라진 뒤였다고 한다. 자장은 그 자리에서 깨닫고 바로 몸을 던져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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