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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2.06 08:24 수정일 : 2022.02.06 08:26
봄이 오는 길목에서
/윤일현
완전한 개체가 만나 잔을 부딪칠 때 세상은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설혹 그 둘이 혈투를 벌여도 관객은 긴박한 서스펜스와 카타르시스, 숙연한 비장미를 느끼게 된다.
설 연휴가 지나자 햇볕이 더 따뜻해진 것 같다. 뜰에 나가서 조그마한 마당을 살펴본다. 일부러 쓸지 않고 두었던 낙엽 밑에서는 예상대로 수선화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히말라야 설화는 꽃봉오리가 제법 크다. 추명국도 여지없이 새순을 내밀고 있다. 밤에 추울까 봐 다시 낙엽을 덮어준다. 담장 너머 이웃집 매화 꽃봉오리도 한껏 부풀고 있다. 머지않아 그윽한 향과 함께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놀랍다. 겨울 가뭄이 유난히 극심했지만, 꽃들은 저렇게 오가는 시간을 잘 지키고 있다. 작고 어수선한 마당이지만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잃지 않고 긴 겨울을 잘 버텼기 때문에 다시 꽃피는 봄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 드라이브를 했다. 대구 근교를 달리며 중간에 차를 세우고 들판을 걸었다. 양지바른 논두렁엔 파릇한 새싹이 돋고 있다. 머지않아 벚꽃 만발하고 곧이어 복사꽃 무릉도원이 펼쳐지리라. 들판을 지나 야산에 올라본다. 봄이 이미 발밑에 와 있음을 느낀다. 산과 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나무며 풀이며 어느 하나 귀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다. 크든 작든, 화려하든 소박하든, 모든 초목은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조물주가 준 최상의 형상과 역할을 위해 정직한 분투를 계속하고 있다. 고사목조차도 살아있는 것들과 어색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자연 속 만물은 자기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공존을 도모하기 때문에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아름답다. 대자연의 합창은 구성원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가 잘 유지되기 때문에 그 화음이 조화롭다. 소리 없이 천지를 울리는 봄의 교향악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다시 사람의 마을로 돌아간다. 멀리서 보면 모두가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망감은 커진다. 많은 얼굴이 탐욕과 위선으로 일그러져 있다. 가슴 속엔 증오와 원한, 분노가 가득하다. 나무와 들꽃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은 드물다. 상호 양보와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고, 맑고 선한 눈빛을 지닌 향기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다. 사람들 틈에 서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시끄럽다.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 눈의 티끌을 흉보며 질책한다. 자연은 가까이 또 멀리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해도 전체의 조화는 깨뜨리지 않는데 사람은 가까워질수록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흠결 많은 사람끼리 서로 헐뜯고 비방하면 그 추함과 역겨움은 배가된다. 배웠든 못 배웠든, 돈이 많든 적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모인 곳은 아름답다. 어린 시절 시골 장날이 생각난다. 망태기에 토끼나 강아지 새끼를 담아 와서 파는 할아버지, 양지바른 논두렁에서 뜯은 봄나물을 파는 할머니, 손수 뜨개질한 모자나 조끼를 사과 궤짝 위에 얹어 놓은 중년의 아낙, 업고 있던 아기가 칭얼대면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난전에서 젖을 먹이던 젊은 새댁, 힘겹고 고단하지만 사람 사는 풍경은 한없이 평화롭고 따뜻했다. 그들은 서로 돕고 아끼며 살았기 때문에 혹독한 가난도 견뎌낼 수 있었다.
눈과 귀를 다 닫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대선판이다. 중요도나 비중과 관계없이 후보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 중 나무나 풀꽃처럼 온전한 모습을 한 사람이 드물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서로를 할퀴려는 꼴사나운 모습이 국민을 짜증 나고 지치게 한다. 자신의 능력과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니 선거 운동이 혼탁한 공해처럼 느껴진다. 자연은 헛된 몸짓을 하지 않고, 무의미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도 감동한다. 이제 대선 캠페인도 상대의 약점과 부족함을 캐내는 네거티브는 중단하고 각자의 장점을 드러내며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비전 제시 경쟁을 해야 한다. 대선 후보와 그 참모들에게 권하고 싶다. 아무리 바빠도 봄이 오는 산과 들로 나가보라. 모든 생명체가 긴 겨울을 어떻게 인내했고 찬란한 봄을 위해 함께 또 따로 얼마나 애쓰며 경쟁하는지를 살펴보라. 어느새 입춘 지절이다. 국민은 꿈과 희망이 넘치는 봄날을 고대하고 있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