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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석(8) 8. 백두대간 인문기행 신불산 빨치산 남도부
작성일 : 2024.10.12 09:53
8. 백두대간 인문기행
신불산 빨치산 남도부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자본주의가 뭔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는지 자본주의를 위해 죽었는지.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지?
그들은 왜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
<토벌대장 차일혁>
백두대간 한강 이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영남알프스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잊혀진 옛이야기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모두 다 동족상잔의 6.25 동란의 빨치산하면 지리산 빨치산의 유명한 이현상을 떠올린다. 이현상은 조선 남로당 출신으로 48년 여순사건 후 지리산에 입산하여 김일성과는 대립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먼저 빨치산은 다 아시다시피 파르티잔(Partisan)으로 비정규군 유격 요원, 게릴라(Guerrilla)를 말한다. 공비라고도 하는데, 공산당 비적을 줄인 말이고 비적은 무기를 지니고 떼를 지어 다니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도둑이라는 뜻이다. 조선말기 동학운동 가담자를 동비東匪하고 하였다.
빨치산은 6.25 동란 전후로 구빨과 신빨로 나뉘는데, 구빨은 전쟁 전 미군정에 반대하거나 우익세력에 밀려나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야산대라고도 불렸다.
이현상과 차일혁은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만나보고, 낙동정맥 신불산에서는 비운의 사나이 남도부와 김원종을 먼저 만나보자.
남도부의 본명은 하준수다. 1921년 경남 함양군 병목면 통천리에서 태어났고, 김일성에게 최고 훈장인 자주독립훈장을 받은 유일한 빨치산이기도 하다. 월북 인사로 유명한 의열단 약산 김원봉도 김일성에게 훈장을 받지 못했다. 아마 김일성은 김원봉을 경쟁자로 본 모양이다.
남도부 하준수의 집안은 대대로 천석꾼 집안으로 함양군 거부였으며, 부친은 24년간 병곡면장을 지냈다. 학창시절 일본 무술 가라데 7단이었던 하준수는 진주중학교 3학년 재학 중, 1937년 일본인 교사를 폭행한 후 퇴학당했다. 퇴학 후 일본 유학 중 조선 학도병 동원령이 내려지자, 이를 거부하고 보광당普光黨을 조직하여 주재소의 총기를 탈취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여 지리산으로 입산하면서 그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하준수가 보광동을 조직하며, 해방 조선 땅에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곧 건국할 민주주의 대한민국은 더 이상 외세의 간섭을 안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강령을 발표란 것을 보면, 단순한 항일 무장 독립투쟁을 뛰어넘어 해방 이후 이 땅에 세워질 공동체 사회질서까지도 염두에 뒀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 하준수를 따라 산으로 들어간 사람이 150명 여명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지인들의 추천으로 잠깐 이승만의 경호실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월23일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고 남로당이 하준수를 입당시키려고 했으나 하준수는 입당을 거부했다. 아마도 이때까지는 그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준수는 잠깐 이승만의 경호실장을 하였으나 친일 인사를 가까이하는 이승만에게 실망하고 낙향한다.
1947년 7월19일 추종하던 여운형이 우익 인사에게 암살되자 남로당에 입당하며 스스로 월북했다.
들리는 말로는 하준수가 월북하자 김일성이 하준수 손을 잡고, “아이고, 하 동지! 잘 왔소이다. 하 동지의 명성을 기이 듣고 있었소이다. 남조선을 잘 아는 하 동지께서 남조선 인민 해방을 위하여 강동정치학원을 맡아주시오.” 이렇게 김일성은 처음부터 하 준수를 남한 빨치산 사령관으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또 한 명의 대비되는 인물은 토벌대장 김원종이다, 일제 강점기 하사관 출신으로, 48년 여순사건에서 좌익 인사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일본도로 무차별 살해하자 이승만이 김원종을 이순신 장군에 비유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1949년 계엄군 사령관이 되었다가, 보도연맹 가입자를 무차별 학살하는 등, 작전에 실패한 부하들을 마구 총살하자, 학살엔 귀신 전투엔 등신이란 비아냥을 받은 인물이다.
6·25 전쟁 전 1950년 2월, 영남알프스 신불산 일대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야산대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원종은 양산 원동면에서 사살한 29명의 야산대(구빨) 목을 잘라 가마니에 담아 양산군청 동편 목화 창고 앞 광장에 늘어놓고 전시를 하기도 했다.
필자는 젊은 시절 마을 노인들에게 당시 상황을 상세히 들을 기회가 있어 잠시 회상하며 묵념을 드린다.
전쟁 준비를 마친 김일성은 6월 중순 하준수를 다시 불렀다.
"하 동지, 강동정치학원은 잘 훈련되었다고 들었소. 이제 남조선 해방의 주역에 하 동지가 선봉에 서시오. 작전명 폭풍 작전이라고 이름 붙였소. 폭풍 작전 목표는 작전 50일이자 광복절 5주년에 조선 반도 부산까지 점령하고, 서울에서 위대한 인민군 열병식을 열 것이오. 이날 하 동지가 인공기를 들고 반드시 선봉에 참석하시오.“
하준수는 감격하며 대답했다.
”저에게 선봉을 맡겨주셔서 조국과 인민에 감사드리며, 남조선 해방에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조선인민군 만세!“
하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일성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인민군 만세를 3번 외쳤다. 김일성은 하준수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하 동지, 6월 24일 밤 먼저 군단을 이끌고 강원도 울진으로 침투하시오. 배로 동해안을 통해 울진에 침투하여, 대구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신불산을 거점으로, 모든 후방에서 오는 기차를 전복하고, 미군의 군수물자를 철저하게 막아야하오. 우리는 6월 25일 새벽 4시에 작전명 폭풍 작전으로 삼팔선에서 총공격을 할 것이오. 10일 후 우리는 대구에서 만나, 함께 부산으로 진격합시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하준수에게 남도부南到釜란 별칭을 붙여주며 어깨에 인민군 중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남쪽을 도발해 부산을 점령하라는 의미였다.
남도부가 이끄는 300명의 강동정치학원 정예부대는 6월 25일 새벽 5시 임원항에 도착했다. 그보다 한 시간 전 삼팔선 전역에서는 무차별 포격이 감행되었고 북한군은 아무 저항이 없이 남으로 진격했다.
남도부 부대는 산을 타고 죽변, 울진 평해, 후포, 영덕을 거쳐 아무 저항이 없이 남하하다 뒤늦게 칠보산에서 국군을 만나 종일 전투를 벌여 150여 명이 전사하고 만다. 남도부 부대의 전투 상황은 처음부터 결코 순탄하질 않았다. 국군과 경찰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낙동정맥을 타고 가지산을 거쳐 재약산 주암계곡에 한 달 후인 7월25일 겨우 도착했다.
당시 양산 배내골에서 지방당원 위원장 박일과 부위원장 백오와 지방당원 3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유명 인사로 김정은의 처남 성일기, 성혜림의 오빠도 있었다.
이때부터 신불산 배내골 남도부 사령부 시대의 서막이 열렸고 지역에서 자진해 입산한 사람과 나중에 낙동강 전선에서 패배한 인민군까지 합류하여 모두 1,000여 명이 되었다.
1950년 12월 국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남도부는 신불산 681 갈산고지, 시살등 신동대굴 고지를 빼앗기고 영취산, 천황산, 밀양 향로봉 등지로 근거지를 옮기며 유격전을 펼치며, 유천역 철교 폭파, 미군열차 습격, 부산 조병창 방화, 군 수송차단 등 인민군은 북으로 철수하였으나 꾸준히 남한 후방교란하며 치고 빠지는 작전을 펼쳤다.
1951년 11월 미 제8군은 남도부 빨치산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야전전투 사령부를 편성, 제2차 신불산 지구 빨치산 부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고 남도부 부대는 100명 이상 전사하기도 했다.
남도부 부대는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격으로 50여 명까지 줄었고, 인근 주민들의 공비토벌대 활동으로 보급투쟁까지 어려워졌다. 남도부 부대의 최후가 오고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더 치열하게 보급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남도부 부대의 보급투쟁이 치열할수록 인근 주민들의 피해는 커졌다. 인민군이 북으로 도망가자 남도부 부대는 적진 한가운데 고립되어 전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군에게 어떤 연락이나 지원도 받지 못했다. 남도부 부대는 물자를 스스로 구해야만 했고, 인근 마을에서 갈취한 소를 사자평 등에서 방목하기도 했다.
남도부는 원호증(동해남부 전구 빨치산 사령부 남도부 사령관 발행)이란 것을 발행하며 버텼다. 원호증이란 약탈한 물품에 대한 확인증으로 해방통일 후에 갚아 주겠다는 일종의 증명서이다.
1952년 남도부 부대는 연합군 병력에 의해 산중에 완전 고립되고 땅굴 속에서 지내야했다.
1953년 7월 말 휴전 소식이 남도부에게 전달되었다. 남북 휴전협정에서 포로 소환은 거론되었지만 북에서 김일성의 명을 받아 직접 투입된 빨치산 문제는 결코 거론되지 않았다.
1953년 8월1일 향로봉 다람쥐 골
보급투쟁을 나갔던 동지들이 허급지급 남도부를 찾았다.
“사령관 동지 전쟁이 끝나고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답니다.”
“뭐요, 언제요?”
“27일 판문점에서, 여기 신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부산일보를 읽은 남도부는 얼굴이 굳어졌다. 포로 소환까지는 체결되었으나 빨치산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었다. 이후 남도부는 지방 세포를 통해 몇 번이나 연락을 취했지만, 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남도부는 북한에 거듭 자신들의 거취를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도시에 침투해 혁명에 대비하시오.“ 이었다.
하늘이 노래진 남도부의 귓가엔 허구 같은 김일성의 목소리만 맴돌았다.
“하 동지, 선봉에서 남쪽을 도발해 부산을 점령하시오. 그리고 8월15일 서울 열병식에 반드시 참석하시오.”
남도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자신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후 김일성은 전쟁의 책임을 피하려고, 남한 인민유격대(빨치산)는 남한 내에서 스스로 결성된 조직이라고 떠들었다.
결국 남도부의 사기가 크게 꺾이고 만다. 휴전 후 2개월이 지난 1953년 9월 남도부와 살아남은 병력 37명은 산에서 결국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남도부는 전향한 부하의 밀고로 1954년 1월 21일 대구 도인동의 한 민가에서 특별수사대 체포되고 10월14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판결문을 보면 “괴뢰 노동당 중앙당부 직속 대남 유격대 총사령관, 대남 유격대 제3지대장 등을 역임한 강원도, 경상북도 일대의 유격대 총책임자로서... 국군사살 80여 명, 미군사살 16명, 경찰관사살 70여 명, 이라고 그의 신분과 전과를 밝히고 있다.
1955년 8월 어느 날, 서울 수색의 육군사형집행장에서 총살로 사라졌다.
비운의 사나이 하준수 아니 남도부 그의 나이 35세로 파란만장했던 짧은 인생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남도부는 서울 수색, 사형 집행장에서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남도부와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차진철(본명 성일기, 김정일의 아내 성혜림의 오빠)은 “남도부라는 사람은요, 원래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였죠.”라고 나중에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밝혔다.
해방 후 1953년에 이르기까지 신불산과 영남알프스 일대는 이념을 둘러싼 전쟁터였다. 지금도 신불산과 향로봉 일명 전사의 터 다람쥐골에는 동족상잔의 아픈 기억이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남도부 사령부가 있던 갈산고지에는 빨치산 소탕을 위해 미군이 쏟아부은 폭탄의 화염 속에서 살아남은 일송정 하나가 화상의 흔적을 안고, 역사를 증언하듯 꿋꿋이 아랫마을을 바라보고 서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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