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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기행

신종석(6) 백두대간 인문기행 6화

작성일 : 2024.10.08 12:22 수정일 : 2024.10.08 12:33

6. 백두대간 인문기행 6

             낙동정맥 부산 갈매기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 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

 파도치는 부둣가에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남았는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문성재의 부산갈매기>

 

 부산의 기장 해운대 영도 다대포 해안선을 따라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꼭 파수꾼 모양 날아다니는 새가 괭이갈매기다. 바닷새지만 다대포 몰운대 낙동정맥의 기점에서부터 낙동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날아다니며 태곳적부터 부산을 지켜온 텃새로 유명하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고기 떼를 알려 주는 길조이며, 늘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희망과 미래로 뻗어나가는 역동성을 상징하는 부산의 새이기도 하다.

 부산 해안을 지켜낸 텃새 갈매기는 여러모로 부산 사람을 닮았다. 일단 두 마리 이상 모이면 좀 시끄러운데, 암수 정이 깊고 새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의리가 있다고 알려져 애향심· 우정·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부산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 사람들은 나라가 위기 때마다 선봉에서 들풀같이 일어나 나라를 지켜냈다. 부산 금정산의 금정산성이 그랬고 임진년 부산 사람들의 결기가 그러했다.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억압의 근현대사에서 늘 선봉에 섰고 민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부산은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해방 이후에는 4·19 혁명, 부마항쟁 등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갈매기를 닮은 부산 사람의 힘이었다.

 

 앞에서 부산은 낙동정맥의 시발점이자 해양 문화가 들어오는 항구라고 누차 강조했다. 바다 건너 대마도와는 49.5km, 뛰어갈 수 있는 마라톤 거리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예로부터 해양과 대륙의 나들목이었다.

 일만 년 전 동남아 대만 중국 일본 일부가 육지로 붙어있을 때, 사람들은 멀리 인도에서부터 걸어서 부산 영도 동삼동과 가덕도 장항까지 걸어와 선사시대의 유적을 고스란히 남겼다. 가야의 허황후가 배를 타고 인도에서 들어온 곳도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끝자락 김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다파나국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다는 신라 석탈해도 이 길을 따라 한반도로 들어왔다.

 또 한편으로 신라 내물왕 44399년에는 왜가 황산강(낙동강)을 타고 서라벌까지 침략하였으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군사 5만을 보내어 쫓았다는 기록이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되었다.

 

 

                                      *

 

 

 잠결에 수백 척의 왜 세견선이 입항한다는 보고를 받은 부산진 첨사 정발은 순간 머리가 비쭉 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꿈자리가 영 뒤숭숭한 게 직접 망루로 올라가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이 새벽부터 웬 세견선이라?’

 정발은 새벽잠을 설치고 절영도 망루에 올라 날이 밝기만 기다렸다. 날은 밝아왔지만, 짙은 새벽 여름 안개 속에 좀처럼 시야가 확보되질 않았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운해가 짙어 배들도 먼바다로 나가기를 꺼리는 곳이 부산 앞바다였다.

 마치 수만 마리의 아귀 떼가 바닷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하염없이 안개를 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람도 한 점 없었다. 도둑이 들려면 개도 안 짖는다고 했던가? 오늘따라 그 많든 갈매기 한 마리 보이질 않았다.

 

  작년 3, 통신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일본에서 관백 풍신수길豐臣秀吉을 만나고 돌아와 선조를 알현했다.

  “먼 길 다녀오신다고 두 분 수고 많았소. 그래 왜의 관백 풍신수길이란 자는 어떠하더이까?”

 먼저 정사 황윤길이 읍하고 아뢨다.

 “전하, 신이 보기에는 풍신수길은 키가 작고 다부진 게 눈빛이 반짝반짝하며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덕천가강德川家康과 손을 잡고 일본을 통일 한 자로 아주 용의주도한 듯했나이다. 일본은 우리 조선과 달리 사무라이들의 나라입니다.

사무라이들은 싸우는 게 일입니다. 그들은 논공행상이 필요하며 자국 내 불만 세력 제거와 영토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전하, 소문대로 풍신수길은 반드시 조선과 명을 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나이다. 우리 조선은 한동안 전쟁이 없어 병사들도 없고 있는 군사도 훈련되지 않았습니다. 병조에 편성된 30만 군사는 그저 명목상 군사이고 실제 싸울 수 있는 군사는 1,000명도 안 된다는 전 병조판서의 진언을 잊으셨나이까?

 전하, 율곡 대감의 10만 양병설을 지금이라도 당장 시행해야 할 것이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는 줄 아뢰오.”

 옆에 있던 부사 김성일이 얼굴을 붉히며 읍하고 아뢨다.

 “전하, 통신부사 신이 관상을 좀 보는데, 관백 풍신수길은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작은 원숭이 같아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괜히 미리 겁먹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준비하면 백성들의 동요가 염려되옵니다. 우리 조선은 몇백 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국 명나라가 저렇게 든든하게 우리 조선을 지켜 주기 때문이라 사료되옵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만 바라보고 있는 동인이 세력을 잡고 있었고, 서인 이었던 정사 황윤길의 의견은 일언지하에 무시되고 말았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신무기 조총 두 자루를 내밀며 다시 아뢨다.

 “전하, 이 신무기가 바로 서양에서 가지고 왔다는 조총이란 무기옵니다. 풍신수길이 일본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조총이란 신무기 때문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우리도 빨리 이 신무기 조총을 만들고 개발하여 만약 있을지 모르는 침략에 대비함이 옳을 줄 아옵니다,”

 배석하고 있던 유성룡 등 몇몇 대신들도 유비무환을 주장하며 있는 군사들의 훈련이라도 하자고 진언하였으나 세력을 잡고 있었던 동인들과 김성일은 이렇게 아뢨다.

  "전하, 오늘날 우리 조선이 두려워할 것은 일개 섬나라 도적의 조총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옵니다. 민심을 잃으면 아무리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과 신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아옵니다. 백성의 민심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방비책이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그리고 저 신무기 조총이라는 것도 우리의 활보다 발사속도가 느리고 사거리도 짧아 무서울 게 없는 줄 아옵니다.

 예로부터 대륙의 중국이나 바다 건너 왜가 우리의 활을 제일 무서워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니 옵니까.

 전하, 조총은 비가 오면 무용지물이라고 합니다.“

. 그러하오!“

 선조는 동인들의 말에 감탄하며 안도의 한숨을 뇌 쉬었다.

 

 정발은 두 달 전에 부산진 첨사로 부임 받아, 부산 왜관에 거주하는 대마도 사람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절영도 망루에 파수꾼을 보강하는 등 늘 왜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소상하게 장계로 올렸다. 하지만 부산진 첨사의 한계는 감시밖에 없었다. 성을 새로 쌓거나 군사를 늘려 실전 같은 훈련은 통제사 이상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통제사의 허락 없이 군사 훈련을 하면 당장 역모로 몰리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다.

 1592413일 초여름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아귀같이 숨어있던 선단들이 하나 둘 부산진 첨사 정발의 눈에 들어왔다. 셀 수가 없었다. 수백 척이 넘었다. 순식간에 부산진 앞바다를 빼곡히 메워버릴 정도였다. 물 반 배 반이 아니라 아예 바다가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아직 꿈을 꾸고 있나? 몇 번 고개를 흔들고서야, 순간 첨사 정발의 머릿속에 며칠 전 본 왜관의 모습이 스쳤다. 왜관에 상주하던 대마도 상인들이 하나 둘 모두 짐을 싸고 대마도로 돌아간 모습들이 떠올랐고, 이를 본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은 매우 흉흉했으며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왜를 통일한 풍신수길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린다는 정명가도征明假道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친다는 조공가도朝貢假道란 말이 돌았다.

 대체로 저잣거리와 관아의 소문도 두 가지였다. 저잣거리의 소문은 무지막지한 왜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고, 관아를 중심으로 한 벼슬아치들은 그냥 무사 안일한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앞섰다.

 혹 아랫것들이 입방아를 찧으면 불호령을 내렸다.

 “왜구들이 명나라를 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절영도 망루에서 부산 앞바다를 목격한 첨사 정발은 일단 급한 파발을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띄우고 자신은 부산진성으로 돌아와 백성에게 알렸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부산진성에 모여든 백성은 2천여 명이었다. 아녀자와 늙은이도 있었고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모두 손에는 낫이나 도끼 등 나름대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바다를 점령한 왜 선단을 보고 자진해서 기장 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기장 쪽은 예로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한 지역이라 늘 왜에 감정이 안 좋은 곳이었다.

 

 안개가 걷히자, 무대 막이 올라가듯 소서행장이 이끄는 18,000명은 순식간에 부산진성 앞을 점령해 버렸다. 손에는 모두 신무기 조총을 들었으며 굶주린 아귀 떼를 연상했다. 이를 지켜보는 부산진성의 군사 200명과 백성 2,000명 도합 2,200. 대부분이 백성이고 손에는 낫 도끼 등 겨우 농기구가 들려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았는데 모두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물러서지 않고 사즉생의 결기를 보여주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한마음 일심이었다.

 일본 전령이 깃발을 달고 앞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달려 나와 화살 하나를 쏘았다. 화살은 망루에 있던 부산진 첨사 정발의 바로 옆 기둥에 꽂혔고 화살에는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戰則戰矣전즉전의 不戰則假道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라.

 

  가톨릭 신자로 알려진 소서행장은 처음에는 조선 백성에게 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면 죽이지 않겠다는 회유책을 섰다.

 소서행장의 글을 읽은 정발 장군은 검은 옷을 입고 칼을 뽑아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라!”

 임진왜란 첫 전투는 일본에서 전투 경험이 많은 소서행장의 조총부대 18,700명과 부산진 첨사 정발의 관민 2,200명의 결전이었다. 부산진성을 사방으로 포위한 왜군은 단번에 북쪽 허술한 곳으로 진격해 들어왔고 삽시간에 부산진성은 둑이 터지듯 초토화되어 버렸다.

 검은 옷을 입고 끝까지 물러서지 말 것을 독려하다 전사한 정발 장군을 사람들은 흑의 장군이라고 불렀다.

 소서행장은 항복하지 않는 지역의 적장과 백성은 남녀노소 무조건 몰살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414일 다대포쪽으로 상륙한 일본군 일부는 서평포(감천만)와 다대포를 공격했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과 동생 운흥제는 백성들과 결사 항전하였으나 415일 다대포성도 추풍낙엽처럼 함락되고 만다.

 

 왜장 소서행장은 18,700명의 병사를 집결 후 다음으로 제일 큰 동래성으로 향했다. 동래성은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키고 있었다.

 동래부사 송상현도 부산 거주 왜관의 일본인들이 며칠 전부터 짐을 싸고 하나 둘 떠나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부산진 첨사 정발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백성의 동요를 안정시키고 성 주변에 나무를 심고, 마름쇠를 땅에 까는 등 방비를 하고 있었다.  

 동래부사 송상현도 일본군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만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군 소서행장의 선발대가 18,700정도 일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파발을 받은 경상좌병사 이각, 양산 군수 조영규, 울산 군수 이언성도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에 합류했다. 하지만 새 발의 피, 모두 2,500명 규모였다. 모두 전후 책임을 면하겠다는 벼슬아치들의 생색이었다.

 1592년 음 415일 오전 10,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군 18,700명이 북을 울리며 동래성 앞에 진을 쳤다. 왜군 소서행장은 동래성 동쪽 황령산 기슭에 진을 치고, 한 부대는 동래성 서쪽에, 또 한 부대는 동래성 남쪽에, 3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왜군 18,700의 조총부대를 직접 목격한 경상좌병사 이각은 바로 북쪽으로 빠져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부사, 우리는 성 밖에서 왜놈들을 유인해서 사살하겠소. 그 작전이 좋은 것 같소이다. 적의 힘을 양쪽으로 분산시켜야 할 것 같소이다. 일단 동래성은 부사의 관할이니 부사가 책임지시오.”

 

415일 오전 10시 왜군 선봉장 소서행장은 다시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글을 보냈다.

 

 戰則戰矣전즉전의 不戰則假道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라.

 

 송상현의 답은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송상현은 동래성 백성들과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자, 일본군 소서행장의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조선의 군사는 모두 수수깡이다. 조총 선봉 부대 고우 캐기!“

 잘 훈련된 일본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조선군의 화살을 유인하며 조총부대로 순차적 전진 총공격해 들어왔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자국에서 전투 경험이 많았다. 조선은 몇백 년간 단 한 번도 전쟁이 없고 군사 훈련도 받아보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칼을 뽑아 소리쳤다.

 ”물러서지 말고 발사하라!“

 조선군은 활과 대포를 쏘며 개미 같이 몰려오는 일본군을 막아냈다. 하지만 중과부적 25백 명으로 조총을 순차적으로 쏘며 공격하는 일본군 18,700명에 대항하기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숨거나 산속으로 피난을 가는 백성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뒤늦게 자진 합류한 백성들은 돌멩이와 기왓장으로 맞섰다. 일본군이 동쪽 인생문 쪽을 집중 공격하자 아낙네 어린아이들까지 기왓장을 던지며 결사 항전했다.

 정오쯤 전투의 패색이 짙어지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부모와 임금에게 절을 하고 한 편의 시를 올렸다.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여러 진들은 단밤을 자고 있네

 군신간의 의는 중하고

 부모님의 은혜는 가볍도다    <송상현>

 

 동래성을 함락하자. 왜장 소서행장은 들풀 같은 조선 백성의 결기에 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국 일본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이었다. 소위 지도자들은 하나로 뜻을 모으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지만,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일어서는 의병의 정신을 보았던 것이다. 일본과는 정반대였다. 일본 지도자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권력을 잡기 위해 늘 선봉에 섰고 백성은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스스로 몸을 사리고 숨는 게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 백성은 아니었다.

 단번에 승기를 잡았지만, 소서행장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역력했다.

 ”, 이 전쟁, 우리가 이길 수 없겠구나. 관백 풍신수길이 조선을 너무 몰랐어·…!“

 

 가톨릭 신자인 소서행장은 조선 백성부터 기를 꺾어야 승리한다고 확신하고, 본보기로 동래 백성 늙은이 부녀자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무차별하게 학살해 버렸다.

 

                               *

 

 그들의 모습은 400년 후 동래 지하철 공사로 낱낱이 증언되었다. 끝까지 부산을 지키기 위해 싸운 부산 갈매기 그리고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포 첨사 윤흥신,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응원을 보낸다. 부산 갈매기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