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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10.08 12:19 수정일 : 2024.10.08 12:34
5, 백두대간 인문기행 5화
낙동정맥 금정산
돌우물 금빛고기 옛전설따라
금정산 산머리로 올라왔더니
눈앞이 아득하다 태평양물결
큰포부 가슴속에 꿈틀거린다 <이은상의 조국강산>
해양과 맞닿은 대륙의 들머리, 한반도 금정산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문화의 나들목으로 우뚝 솟아 국제도시 부산의 진산임이 틀림없다.
조선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은 한반도를 백두대간과 13 정맥 1 정간으로 구분 짓고, 한반도 낙동정맥의 시발점을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서 금정산을 타고 태백산 삼수령三水嶺을 거쳐 백두대간을 따라 대륙으로 연결 지었다.
백두대간에 합류되는 삼수령은 해발 935m의 고개로 피재라고도 한다. 삼수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물길이 3개 방면으로 갈라지기 때문인데,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북쪽으로 가면 한강을 통해 서해로, 동쪽으로 가면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남쪽으로 가면 낙동강에 합류되어 태평양으로 이른다.
모두 들 한반도의 끝자락을 최남단 해남 땅끝마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북쪽 사람을 중심으로 본 방향이고. 남쪽 해양 문화권에서 보면 한반도의 태생은 당연히 낙동정맥의 시발점인 부산 다대포 몰운대라고 말할 수 있다.
모두 다 잘 아시고 앞에서 여러 번 거론했다시피, 우리나라 선사시대 유적으로 부산의 가덕도 장항 유적과 함께 6000년 전 한반도 인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발상지가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으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산 영도 동삼동이나 가덕도 장항 유적은 둘 다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며 가덕도 장항 유적에서는 많은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약 7000년 전 인도 쪽의 아리아족과 같은 DNA를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리아족은 인도와 유럽 독일 일부에서 발견되는 유전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약 일만 년 전, 지구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이란 ·인도에서 동남아· 중국· 대만· 한반도 동해를 제외한 일본영토 일부가 육지로 붙어있었다. 멀리 인도에서부터 영도 동삼동이나 부산 가덕도 장항까지 걸어왔다는 남방 이동의 흔적이 유력하다. 또한 삼국유사 가야의 허왕후도 아유타국의 아요디아 공주로 배를 타고 한반도에 들어왔고, 신라 석탈해도 바다 해양 다파나국에서 들어왔다는 신화가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으로 북방 대륙 이동설을 주장한 신라 박제상의 부도지에는 기원전 7197년, 지금으로부터 9221년 전, 황궁씨가 부도복본符都腹本에 맹세를 한 후, 사람들을 데리고 중앙아시아 마고성을 나와 동쪽으로 산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2457년(上元 甲子) 4482년 전, 10월3일 환인의 서자 환웅천왕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삼위태백 백두산 신단수 앞에 내려왔다. 우리는 이날을 10월3일 개천절이라 부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방 루터를 통해 한반도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백두산 신단수 아래 환웅천왕이 삼천 관리를 대동하고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뒷산 13 정맥을 따라 백두대간을 따고 신단수 아래 모였다. 신단수는 백두대간에서 제일 큰 나무로 늘 삼족오가 모여드는 곳이라 어디서도 길을 잃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남방 해양 문화와 북방 대륙 문화가 만나 접화군생接化群生한 곳이 바로 백두대간 낙동정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낙동정맥의 시발점인 부산 다대포는 기원전 다다나로 불린 곳으로 바다 건너 왜에서 우리의 대륙문화를 가져간 곳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침략의 길목이었다. 임진왜란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 내물왕 때 왜는 백제와 연합하여 황산강(낙동강)을 타고 서라벌까지 공격하였다. 신라 내물왕은 급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5만의 고구려 구원병으로 신라를 지켜냈다는 기록이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되어 있다.
부산 다대포에서 대마도까지는 마라톤 거리인 42.195km보다 조금 긴 49.5km이다.
다대포 몰운대에서 낙동정맥 마루금을 따라 연결되는 들머리에는 깃대처럼 우뚝 솟은 금정산 고당봉(801m)이 있다. 산 정상에는 고당姑堂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필자는 꼭 고당高幢봉이라 부른다. 고당姑堂봉이란 말은 정상에 고모 신당이 있어 고당봉으로 부르는 것 같은데, 자세히 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범어사가 왜적에게 방화되고 범어사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이었다. 밀양 박씨 할머니가 혼자 동분서주하며 다시 범어사를 재창건하는 불사를 이루었다. 그 후 범어사에서는 밀양 박씨 화주 보살을 기리는 뜻으로, 고당봉 아래 신당을 짓고 밀양 박씨 할머니를 모셔 오월 단옷날마다 제를 올리고 지금도 꾸준히 기리고 있다.
금정산 고당봉은 한반도에서 태백산이나 강화도 마니산 못지않게 하늘의 기운을 강하게 받는 곳이라 토속신앙에서는 예로부터 꽤 인기 있는 명당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속인들이 고모 신당에 금정산 산왕대신으로 밀양 박씨 할머니를 숭배하게 되었고, 우리의 태곳적 부도지에 의한 마고麻姑할미 풍속에 흡수되어 고당姑堂으로 굳어진 것 같다.
앞에서 밝혔다시피, 필자가 굳이 高幢고당봉이라고 부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산마루에 3장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고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자이고 깊이는 7치쯤 된다. 전하는 말로는 범천梵天의 범어梵魚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한다. 산을 금정산金井山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梵魚寺라 한다.』하였다.
범어梵魚는, 우주 만물의 창조신이며 사바세계를 주재하고 불교의 보호신인 범천왕梵天王 Brahmadeva이 사는 세계에서 내려온 금빛 물고기다.
고당봉 아래 금샘金井은 제석천의 범어梵魚가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성스러운 성소다. 당연히 의상이 678년 창건한 범어사梵魚寺 와 직접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의상이 문무대왕과 거량산居梁山 아래 샘에서 7일 기도를 드린 후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비보사찰 범어사를 창건하고, 제석천의 물고기인 범어가 내려와 놀랐다고 범어사라 이름 붙였다고 했다.
거량산은 어디인가? 바로 금정산이다. 신라시대 거칠산居漆山과 삽량주 양산梁山에 걸쳐있던 산. 지금이나 신라시대나 금정산은 양산 동면 다방리에서부터 부산 사직동 쇠미산까지를 말한다.
의상과 문무대왕이 금샘에서 7일 기도를 드렸다는 날은 범어사가 창건된 678년이다. 원효는 금정산성을 쌓기 위해 승군과 의병을 모으며 호국대법회를 열었다. 호국대법회를 열며 고당봉에 높이 깃대를 매달아, 산 이름도 거량산에서 범천왕의 가피를 받기 위해 금정산으로 바꾸고, 고당高幢봉이라 이름 붙였다.
*
677년 겨울,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산꼭대기 관악산 삼막사三幕寺(원효, 의상, 윤필 3 성인)는 한겨울이었다.
바다 건너 왜 나라 고산사 명혜에게 의상이 지었다는 210자 법성게를 전해주고 돌아온 윤필潤筆거사는 원효와 의상에게 삼배를 하고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윤필은 의상의 외사촌 동생이고, 원효는 의상에게 여덟 살 많은 이종형이 된다.
원래 화엄경은 글자 수가 10조 5만 48자로 용궁에 있었는데, 용수보살이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의상이 670년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불타발타라 스님이 번역한 화엄경 60권 본을 가지고 왔다. 이 대방광불화엄경을 의상은 원효의 도움을 받아 210자로 줄이고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일명 법성게法性偈라 이름 붙였다. 소문을 들은 왜 나라 고산사 명혜가 원효에게 법성게를 부탁했다. 명혜는 왜의 왕족으로 일찍이 원효에게 가르침을 받는 승려였다.
원효가 먼저 윤필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래, 윤필거사 이번에 아주 큰일을 했어, 먼 길 다녀오신다고 고생이 많았어. 몸 성하게 다녀와서 기쁘이.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
“내, 스님”
윤필은 합장하고 답례했다. 옆에 있던 의상이 윤필에게 왜 나라 고산사 명혜의 불심을 물었다.
“거사, 고산사의 불심은 어떠하든가?”
윤필은 합장하고 반 배를 한 후 대답했다.
“예, 의상 스님. 고산사 명혜 스님은 두 분 스님에게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안부를 전하였습니다. 고산사에는 별도로 두 분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조석으로 예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산사 명혜 스님께서 원효 스님께 꼭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원효가 윤필의 표정을 먼저 읽었다.
“왜? 안 좋은 소식인가?”
“예. 스님. 지금 왜왕 천지天智는 20만 왜병을 훈련시키고, 배도 일 천 척 만드는 중이랍니다. 분명 신라를 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신라는 이제 겨우 당나라를 평양 이북으로 쫓아냈고, 전 군사가 북쪽에 주둔해 있어, 지금 왜가 총공격해 서라벌을 함락하고 문무왕에게 항복을 받아, 북쪽 군사가 도달하기 전 속전속결로 끝낸다는 계산입니다. 당나라 때문에 남쪽에 군사를 배치 못한다고 호언장담하며, 이를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 부흥군들이 부추기고 있답니다.”
원효는 선견지명으로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두 눈을 반쯤 감고 염주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의상과 윤필은 동시에 원효를 바라보았다. 원효는 두 사람에게 왜가 신라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유를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왜왕 천지가 신라를 총 공격할 것이라 난 예상했지. 642년 그러니까 선덕여왕 때었지, 백제에게 나라의 요충지 대야성을 빼앗기고 국운이 풍전등화 신세가 되자, 선왕이신 춘추 공께서 급히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가 구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네. 하지만 선왕 춘추 공께서는 백제의 방해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단 말이야.
춘추 공은 선도해의 도움으로 그 유명한 귀토지설龜兎之說을 인용하여 빠져나왔지.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아우님들도 잘 알고 있을 줄 알아.”
의상과 윤필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떡였다. 원효는 염주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나무아미타불, 고구려를 탈출한 춘추 공께서는 아주 중대한 결심을 하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후방에서 지원할 것을 약속하며. 먼저 당태종을 만나기 전에 바다 건너 왜를 찾아가, 신라가 당과 연합해 백제를 칠 것이라고 선언했어. 이유는 백제와 왜는 서로 돕는 사이였거든. 춘추 공께서 왜가 백제를 돕지 말 것을 요구하며, 만약 왜가 백제를 도울 경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왜를 칠 것이라고 미리 엄포도 놓았단다. 하지만 왜는 두 차례나 백제를 도와주었단 말이야. 그러니 왜 입장에서는 두려워 미리 신라가 긴 삼국전쟁과 나당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한 지금 총공격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던 거지.”
당시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사람은 대부분 불법을 전하는 승려들이었다. 승려들은 불법뿐만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정보를 전하기도 했다. 의상도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당나라가 신라를 총격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와, 신라가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당나라에 이기고 평양 이북으로 당나라 설인귀 부대를 쫓아낼 수 있었다.
원효와 의상 윤필은 급히 남쪽 들머리 낙동정맥 금정산으로 내려왔다.
*
금정산에서 고당봉 다음으로 높은 봉이 원효봉이고 바로 옆 조금 낮은 곳에 의상봉이 있다. 원효와 의상 두 선지식의 법명이 나란히 붙어있는 지명은 한반도에서 금정산뿐이다. 양산에 원효산이라고 있었지만, 지금은 천성산이라 부른다. 다 아시다시피 원효에게 가르침을 받은 천명이 일시에 성불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문무대왕은 왜구의 노략질에 늘 골머리를 앓았다. 문무대왕은 원효와 의상에게 왜구의 노략질을 부처의 가피로 막을 방법이 없냐고 하문한 적이 있었다. 문무대왕은 자신이 죽으면 동해에 묻어줄 것과 죽어 호국용이 되어 왜구의 노략질을 막겠다고 미리 유언할 정도였다. 다 아시다시피 문무대왕릉은 세계 유일의 동해 수중릉이다.
남쪽으로 급히 내려온 원효와 의상은 범천왕梵天王의 가피를 받아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황산강을 끼고 있는 거량산居梁山의 암상금정巖上金井에 올라, 산의 이름을 범어梵魚가 놀기 좋게 금정산金井山이라 바꾸고, 산 전체 지기부터 다져나갔다. 지네 형국인 왜(일본)를 쪼는 듯한 남쪽 봉우리를 닭 한 쌍의 쌍계봉雙鷄峰으로, 동쪽 봉우리는 닭이 운다고 계명봉鷄鳴峰이라 명명하고 꼭대기에 자웅석계(雌雄石鷄 범어삼기 중 하나. 한일수호조약 후 일본이 파괴)란 암수 닭 모양의 바위를 깎아 왜(일본)의 지기를 다시 한번 더 쪼았다.
원효는 보다 가시적으로 금정산성호국대법회를 열어 사람들을 모으고 50리(18.8km) 산성을 쌓을 것을 제안한다.
신라는 34년간 삼국전쟁과 나당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쇠약해졌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 있었다. 선지식 원효는 한마음 일심과 화쟁 사상으로 백성에게 큰 힘이 되었고, 이는 세계 최강대국 당나라를 이 땅에서 쫓아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화랑 출신인 원효는 귀족불교를 깨고 나무아미타불 단 6자로 백성에게 불국정토 극락 세상의 꿈과 이상을 심어주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금정산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산성인 금정산성(18.8km)이 있다. 기록에는 조선 숙종 27년부터 29년(1701년~1703년) 무너진 산성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 성곽은 대부분 숙종 27년에 보수하거나 쌓았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청의 허락을 받아야 성을 쌓을 수 있었는데, 숙종 27년 그 조건이 풀려 우리나라 성곽은 대부분 그때 보수했다.
금정산 의상봉과 연결된 큰 바위가 지도상에는 무명암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마 혹자가 불가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이라고 추측하고 그냥 붙인 지명 같다. 원래 우리말 지명은 용바위다. 산 아래 청룡동에서 보면 용이 능선을 넘어가는 형국이다. 동네 어른들은 모두 용바위라 불렀다.
사실 무명암이란 지명은 70년도 초반 부산 암벽등반을 최초로 시작한 청봉산악회에서 무명암 직벽 암벽 등반코스를 개척하고 암벽 이름을 몰라, 무명無名암으로 불렀던 것이 시초다. 무명암을 마주하고 건너편에 순수 우리 이름인 부채바위와 나비바위가 있다. 이 암벽들은 부산 산악인들의 암벽등반의 요람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전부 완등한 세계 최초의 도시가 부산 등반대 홍보성 대장팀이니, 부산은 정말 금정산의 기를 받고 세계 곳곳에 깃발을 높이 매달았다고 할 수 있다.
낙동정맥을 따라 금정산 남쪽으로 상계봉이있다. 금정산의 전체 지명을 유추해 보면 쌍계雙鷄봉이 맞는 것 같다.
다시 678년 호국대법회 때로 돌아가면, 의상과 문무대왕이 금정산 금샘에서 7일 기도 후 비보사찰 범어사를 창건하면서,
*
원효는 금정산성호국대법회에서 대중에게 사자후를 토했다.
"여러분! 신국은 삼한에서 제일 작고 힘없는 나라였소. 늘 응유(백제), 고구려, 당나라 바다 건너 왜에게도 무시를 당하고 살았소.
* 鷹遊응유: 신라가 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말. (매번 사냥을 즐기며 논다는 뜻)
신국은 서로 양보하고 도우며 힘을 합쳤소. 화백회의에서 임금으로 추대받은 알천閼川공께서 스스로 선왕에게 양위하고, 인문仁問 왕자가 신하로서 문무대왕을 받들고, 영웅 유신庾信공께서 사심 없이 한마음 일심一心이 되어 삼한일통하고, 이 땅에서 당나라를 쫓아내었소.
* 삼한일통: 원래 하나인 나라로 다시 합치다.
이제 우리는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단군 임금의 홍익인간 이념으로 불국정토를 만들어야 하오. 그런데 왜는 20만 대군으로 또다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오. 왜가 신국을 넘보지 못하게 금정산에 제일 길고 웅장한 산성을 쌓으면 왜적들은 애당초 신국을 넘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옳소! 산성을 쌓읍시다.”
연이어 누군가가 또 외쳤다.
“우리 같은 늙은이도 힘을 보태겠소.”
승려들은 파수꾼을, 남자들은 의병을, 아낙네들은 밥 짓는 일을, 어린아이들은 심부름을 귀족들은 많은 재산과 쌀을 기부했고 늙은이들은 산에서 나무하는 소임을 앞다투어 자청했다.
사람들은 당나라를 이 땅에서 쫓아내듯이 간절하고 간절한 마음 한마음 일심一心으로 성을 쌓고 기도를 드렸다.
신라가 금정산에 웅장하고 긴 산성을 쌓자, 왜는 침략해도 승산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20만 대군으로 신라를 총공격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
백성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빛나는 수성이 남극성 아니신가
끝없는 장수는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신가
어와 우리들이 태평시대에 놀았어라
백년이 이 같기를 천년이 이 같기를
만년 또 억만년이 해마다 이 같기를
우리 임금님 오래 오래 사시길 빌고 빌어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 원효의 무애가無碍歌 >
일설에는 일본이 강화도조약(1876년)후 제일 먼저 조약 7관을 확대 해석해서, 금정산 계명봉의 자웅석계 바위를 부수고 한반도 전국 명당에 쇠말뚝을 박기 시작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