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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기행

신종석(4) 백두대간 인문기행 4화

작성일 : 2024.10.08 12:15 수정일 : 2024.10.08 12:35

4, 백두대간 인문기행   낙동정맥 해운풍류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備詳仙史實乃包含三敎接化群生

 국유현묘지도왈풍류 설교지원비상선사실내포함삼교접화군생

                                        최치원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

                                        

 해외여행이 활발하지 않았던 8~90년대까지만 해도, 백두대간 낙동정맥 들머리에 위치한 해운대는, 우리나라 최고 인기 신혼여행지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지금도 백두대간 대한팔경 중 한 곳인 달맞이 고개를 끼고 있는 해운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전국의 데이트 명소로 누구나 추억 하나쯤은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고속철도를 이용해 수도권 사람들도 마실 가듯 쉽게 나들이하는 곳이 된 지 오래다.

 독일의 공영방송사 ZDF는 세계 3대 해수욕장이라 평가할 정도로 외국에서도 인기가 있어 유럽 관광객들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줄줄이 찾는 곳이 되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촌을 대표하는 도심 속 관광 휴양지로, 한반도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백두대간 한류의 중심 발원지가 틀림없는 듯하다.

 

 봄이면 동백섬 쪽에서 피어오르는 해무는 키 큰 소나무와 백사장을 휘감고 돌아 와우산을 덮어 온천지를 하얀 목화솜 이불로 덮은 듯 포근하게 만든다. 바다 건너 이기대 쪽에서 보면 마치 해운대 일대가 피어오르는 전설 속 무릉도원을 보는 듯하다. 으스름한 가을밤, 와우산 미포 꼬리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은 엘시티 허리를 감고 돌아 동백섬과 부산의 랜드마크 광안대교까지 연결되어 가히 밤하늘의 영롱한 천상의 세계를 보는 듯 환상적이다.

 

 해운대라는 지명은 신라 삼대 천재 중 한 사람인 최치원이 말년에 전국을 유람하다, 바닷가 소나무와 백사장 사이에 피어오르는 해무를 보고 경치에 감탄해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에서 따 붙인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해운대 동백섬 정상에 풍류를 설하고 한류를 예견한 고운 최치원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점점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1200년 전 고운 최치원 하면 한류의 원조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줄 안다. 당나라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토황소격문이란 명문을 써 내로라하는 당나라 지식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토황소격문을 읽은 황소가 놀라 정신을 잃고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그 유명한 신당서에서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당나라는 지금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국강병의 문화 선진국이었다.  

 당나라 시성 두순학과 교류하며 최치원이 쓴 시를 보고 억울하게 죽은 쌍녀분 영혼이 나타나 시를 주고받고 친해져 세 사람이 한 이불속에 누워 하룻밤을 보냈다는 뒷이야기, 결국 두 여인은 천년의 한을 풀고 성불했다는 설화는 당 명 청 시대에 이어 지금까지 중국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니 가히 방탄소년단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류의 원조는 원효다. 원효는 최치원보다 200년 전 해운대에서 가까운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불광산 척판암에 앉아, 천리안으로 중국의 화엄성지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가 천재지변으로 무너져 천명의 대중이 매몰될 것을 예견하고, 급히 깔고 앉은 판자에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球衆이란 문구를 써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로 던졌다는 이야기는 당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 설화의 발설은 우리나라가 아니고 중국 당나라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효가 던진 판자의 글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球衆을 보고 목숨을 구한 천명의 대중이 신라 땅 삽량주(양산) 천성산(천명이 성불) 화엄벌에서 원효에게 가르침을 받고 일시에 992명이 성불을 하고 나머지 8명은 달구벌 팔공산에서 성불했다고 하는 전설은 당나라 설화다.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당나라 유학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어린이 역사 동요, 아름다운 강산에 금수강산으로 시작하는 역사는 흐른다에 나오는 가사다.

 

                                   *

 

 한밤중, 잠결에 심한 갈증에 시달린 원효는 머릿속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눈을 떴다.

 ‘, 여기가 어디지?’

 어렴풋이 어제 마을 어르신들이 주는 곡주를 넙죽넙죽 받아먹은 기억이 났고, 밤길에 아우 의상이 자신을 부축해 비를 맞고 토굴까지 들어온 것도 생각났다.

 ‘아이고, 내가 어제 과음을 했군.’

 옆에는 의상의 가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누운 채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캄캄한 토굴 속은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코끝으로 들고 나는 찬 공기 속에 습한 물비린내가 풍기더니, 순간 더욱 목이 타고 갈증이 느껴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다.

 ···!

 ‘아니, 물방울 소리. 어디 고인 물이 있구나!’

 마음속엔 온통 시원한 물 생각밖에 없었고, 비몽사몽간에 더욱 갈증을 느낀 원효는 누운 채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뭔가 손끝에 잡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직감으로 작은 바가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다시 공명이 일어났다.

 ···!

 이번엔 작은 물방울이 손에 튀었다. 목이 타고 갈증이 더욱 심해졌다. 직감으로 작은 바가지에는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가득 차 있었다.

 ‘, 여기 바가지에 물이 가득 차 있었구나. 다행이다.’

 몸을 일으켜, 눈을 떴지만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코끝에서 물비린내가 더욱 갈증을 유발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바가지의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했다. 수행하던 토굴에서 늘 마시던 석간수보다 시원했다. 갈증과 숙취가 찰나에 사라져 버렸다.

 ‘, 참 달고 시원하구나.’

 원효는 물바가지를 내팽개친 채 감로수를 마신 듯 모로 누워 팔베개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비는 그쳤고 날은 맑았다. 원효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토굴 입구에서 아침 햇살이 막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늦게 일어난 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처럼 마른 얼굴을 비비고 가부좌를 틀었다. 직감으로 옆에 아우 의상이 먼저 일어나 참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동굴 바닥은 아직 어두컴컴해 앞에 있는 물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얼핏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어두워 분간할 수 없었지만 어제 잠결에 마신 물바가지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다는 느낌이 다시 들었다. 평소 잠에서 깨어나 늘 하는 참선인데, 뭔가 눈앞에서 아롱대며 방해하는 듯했다.

 ‘어제 곡차를 많이 마셔서 그런가?’

 머리를 흔들어 다시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런데 뭔가가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듯했다. 눈을 뜬 순간 원효는 몸에 소름이 돋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눈에 들어온 것은 감로수 바가지가 아니고 사람 해골바가지가 아닌가.

 ‘아니, 이를 수가? 내가 어젯밤 해골에 고인 물을….

 순간, 오장이 뒤틀리더니 속에서 욱하고 토사물이 마구 올라왔다.

 “, .”

 입을 벌리고 어제 먹은 것을 다 토했다. 토하고 나니 속은 좀 시원해졌지만, 맥이 빠져 힘이 하나도 없었다. 원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기 입에서 나온 토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젯밤 마신 것은 분명 달고 시원한 감로수였다. 그 감로수를 마시고 갈증은 사라졌고 깊은 잠에 들지 않았던가? 그 감로수 바가지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번엔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 다시 겹쳤다. 순간 어떤 것이 허상이고 어떤 것이 실상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다시 감로수 바가지와 해골바가지가 서로 겹쳤다.

 지금 눈앞에는 분명 해골바가지뿐이다. 그런데 분명 어젯밤에는 감로수 바가지였다. 다시 해골바가지 위에 감로수 바가지가 겹쳤다.

 분명, 눈앞에 있는 것은 해골바가지다. 그럼, 감로수 바가지는 어디 있단 말인가?

 순간 마음속에서 감로수 바가지가 툭 튀어나왔다.

 ’, 내 마음속에 있었구나!‘

 감로수 바가지를 마음속에서 꺼내어, 해골바가지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감로수 바가지가 되었다.

 ’, 내 마음에 따라 해골바가지가 되었다가, 감로수 바가지가 되었다가 하는구나. 내가 갈증을 느끼며 애타게 갈망할 때는 감로수 바가지가 되었다가, 갈증이 사라지니 해골바가지가 되는구나

 순간 원효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지는구나. 어제 마신 해골 물은 같은 물인데, 내 마음이 감로수도 만들고 해골 물도 만드는구나. 그래 만법유식萬法唯識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 사물 자체에는 깨끗함이나 더러움이 없다. 내 마음이 깨끗하게도 더럽게도 만드는구나.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늘 아미타불은 마음속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마음!

 내가 당나라 가서 현장법사와 한판 법거량을 하겠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었어, 이기고 지는 것은 내 마음에 달렸는데…, 내 마음에 달렸는데…, 내 마음 말이야!‘

 아까부터 옆에서 원효의 모습을 지켜본 의상은 가부좌를 튼 채 미동도 없었다. 의상은 혼자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종남산 지상사에서 지엄智儼화상에게 화엄사상을 전수 받았다.

                                    *

 

 당나라에 가지도 않은 원효가 당대 세계 최고 문화 선진국인 당나라에서 칭송받았던 이유는 원효의 저서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때문이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당 태종의 명을 받고 천축에서 불교 경전을 가지고 온 최고의 법승 현장(서유기의 삼장법사)이 해석하지 못하고 산경散經으로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

 

 신문왕의 명을 받아, 당나라에서 자의대비의 약을 구하려 갔다 온 사신은 약 대신 서른 장 정도의 순서도 알 수 없이 뒤섞인 낡은 범어梵語로 된 산경을 내밀며 아뢨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이 당나라에서 대비마마의 약을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산속에서 웬 도인을 만났습니다. 도인에게 자의 대비마마의 병환을 자세히 설명하자, 이 산경으로 된 금강삼매경을 처방해 주었나이다.”

 신문왕은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말했다.

 “오 그러하오! 이 산경을 어찌하란 말이오?”

 사신은 무척 난감해하며 아뢨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도인이 말하길, 신라의 고승대덕 백 인이 이 경을 해석하여 소를 짓고 강설하면 대비마마의 병환이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폐하.”

 신문왕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 자의대비의 완쾌를 위하여 즉시 대국통大國統 혜민, 대도유나大都唯那· 도유나낭都唯那娘· 대서성大書省 주통州統· 군통郡統 등 신라의 고승대덕 백 인에게 금강삼매경을 해석하여 소를 지어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를 열게 했다.

 하지만 신라의 대국통을 비롯한 권승들은 아무도 산경으로 된 금강삼매경을 번역하지 못했다. 범어로 된 산경의 순서도 바로 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의 전체 맥락도 짚지 못하는 그저 눈뜬 당달봉사에 불과했다.

 금강삼매경은 용궁의 용왕도 그 뜻을 몰라 사신의 허벅다리를 갈라 경전을 넣고 동여매고 약을 발라 세상으로 가지고 나왔다는 경전이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 유식학의 대가인 현장玄奘법사도 천축에서 직접 가지고 왔지만, 자신도 해석을 못해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산경이었다.

 삼장법사가 누구인가? 당태종의 명을 받아 천축에서 경  론論 불경의 총칭 삼장三藏을 가지고 온 장본인이고,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를 집필한 분이다. 그런 현장이 해석 못 하면 천축국의 진나 보살이 화현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대국통을 비롯한 권승들은 마지못해 원효를 찾아갔다. 한때 원효를 비승비속이라 비아냥거리며 고승대덕 백 인의 인왕백고좌에 초대하지도 않았다.

 원효는 낱장으로 된 금강매경을 받아들고 말했다.

 “듣자 하니, 자의 대비마마의 병환이 화급을 다툰다고 들었소. 빈도가 금강삼매경을 풀이해 인왕백고좌에 갈 터이니 서라벌 황룡사에 미리 준비해 주시오. 서두르시오. 시간이 없소이다.”

 시간이 없었다. 원효는 지필묵을 준비하고 소달구지를 타고 압량주押梁州 사라사에서 서라벌 황룡사 인왕백고좌까지 가면서,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산경을 해석하여 금강삼매경 약소略疏 세 권을 짓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구름같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원효의 소달구지 뒤를 따르며 두 손을 모으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원효가 누군인가? 나무아미타불 단 6자로 대중에게 누구나 불교를 쉽게 깨우치게 한 선지식이 아닌가?

 

 새벽부터 황룡사 마당 당간에는 대형 불화가 걸리고 야단법석이었다. 황룡사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대중은 목을 빼고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며 소달구지를 타고 온다는 원효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룡사 마당에는 여기저기 병으로 거동도 못 하는 사람들이 임시로 마련한 곳에 누워서 원효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처 황룡사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병든 부모나 아픈 사람을 업고 산으로 올라갔다. 황룡사가 내려다보이는 뒷산 바위와 나무엔 이끼처럼 사람들이 붙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원효가 온다는 소문에 서라벌은 불국이었다.

 인왕백고좌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설한 원효는 사자후를 토했다.

 

 “옛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름에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구나!”  

                                        <신라국사문원효전新羅國沙門元曉傳>  

 

                                  *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산경을 원효가 65681년 풀이해 금강삼매경소라고 이름 붙여 황룡사 백고좌에서 강설했다고 한다. 원효가 주석한 금강삼매경소가 나중에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 고승대덕들은 이 경의 심오한 뜻을 그때 서야 이해하고 론으로 고쳐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고 존칭하게 되었다.

 은 보살이 쓴 책에만 붙이는 존칭이다. 인도의 고승 진나보살이 화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모두 입을 모은 사건이었다. 그 후 원효는 분황지진나芬皇之陳那란 존칭을 받았다. 신라 서라벌 분황사의 진나란 뜻이다.

 원효의 처남인 문무대왕과 김유신은 3만의 병사로 매소성(경기도 연천)에 주둔한 세계 초고의 강병 소정방 설인귀 휘하의 20만을 우리 땅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그 이전 645 고구려 보장왕4안시성 전투에서 당나라 당태종이 직접 이끄는 대규모의 군대를 3개월 가량 막아내고 고구려가 승리한 적이있다. 이 전쟁에서 당태종은 부상을 입고 악전고투하며 직접 수레를 끌고 돌아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이후 당나라는 신라를 절대 만만히 볼 수 없었다.

 

 원효와 최치원 두 선지식은 모두 우리의 현묘지도玄妙之道 홍익인간 사상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마음 일심一心, 즉 자기중심의 이기에서 벗어나 함께하는 이타, 이는 곧 널리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홍익인간 사상이 아닌가.

 사실 원효와 최치원은 동아시아 한··일 삼국에서 인정한 한류의 원조다. 일본 교토에 고산사高山寺란 일본이 자랑하는 고찰이 있다. 고산사에서는 원효와 사촌 아우인 법성게法性偈 의상을 대명신大明神으로 모시고 있다. 심지어 의상을 사모한 선묘 낭자의 탱화를 1300년간 보존할 정도니, 더 덧붙이는 것은 실례다.

 최치원이 지었다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1082년 고려 대흥왕사에서 판각되어 중국과 일본에 배포되었는데, 중국으로 건너가 재간행되었고 다시 필사되어 일본 고산사에 전해졌다. 나중에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을 바탕으로 일본이 자랑하는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蔵経이 근대 활자로 나왔다는 사실은 한류가 일본 문화 속에 깊이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備詳仙史實乃包含三敎接化群生

 국유현묘지도왈풍류 설교지원비상선사실내포함삼교접화군생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에는 나라 안에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는 유불선의 근원이 되고 우리의 삶이라고 했다.

 바람 ''과 물 흐를 ''가 합쳐져 된 풍류는 우리의 태곳적 제천의식에서 나온 고유의 사상이다. 중국이 말하는 바람이나 물의 흐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의 성품이 고지식하지 않고 물과 바람처럼 융통성이 있으며 더불어 속되지 않고 고상하여 삶에도 운치와 멋스러움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선지식이 설한 우리의 현묘지도 풍류는 인류의 삶이자 한류란 신문화로 면면히 흘러 백두대간 낙동정맥을 따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해운대에서 해양을 따라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갈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해운대엔 우리나라 사람 반, 외국인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