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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10.08 10:36 수정일 : 2024.10.08 12:37
3, 백두대간 인문기행 3화
대륙의 들머리 부산 영도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땅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부산의 랜드마크하면 지금은 광안대교지만, 광안대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부산하면 영도다리였다. 한때 오전 10시· 오후 4시 정각에 두 번 드는 영도다리는 시계가 귀하던 시절 부산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세계에서 제일 큰 시계 역할뿐만 아니라 만남의 장소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6·25 전쟁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헤어진 가족을 만나거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의 장소였다. 피란민들의 애타고 간절한 마음을 노린 약삭빠른 가짜 점쟁이들이 영도다리 아래에서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날품팔이로 지친 몸을 끌고 나와 영도다리 난간 위에 걸친 어스름 초승달을 보며 하염없이 가족을 그리고 향수에 젖던 피란민들의 사연이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로 애환을 달래기도 했고, 생활고에 지친 피란민들이 한 많은 생을 바다로 뛰어들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다리이기도 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장기려 박사가 천막병원을 연 곳도 영도다리 밑이다. 장 박사는 야전침대 하나만 놓고,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돌보듯 환자를 돌봤다고 한다.
영도다리를 건너가면 구황작물로 옛 백성의 허기를 달래준 고구마 재배지가 있다. 1763년 조선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가지고 온 고구마 종자를 절영도 해안에 심었고, 처음 맛을 본 동래부사 강필리가 고구마를 전국 팔도에 보급했으니, 영도는 부산의 랜드마크가 틀림없는 듯하다.
부산 영도하면 동삼동 패총을 제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나라 선사 시대 유적으로 부산의 가덕도 장항 유적과 함께 6000년 전 한반도 최초 인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발상지가 부산 영도 동삼동이기 때문이다.
부산 해안선을 따라 해양 문화가 낙동정맥을 타고 백두대간에서 북방문화와 접화군생하여 한반도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약 일만 년 전에는 지구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동남아에서 중국 대만 한반도 동해를 제외한 일본영토 일부가 육지로 붙어있어, 멀리 이란· 인도에서부터 걸어서 부산 영도 동삼동과 가덕도 장항까지 걸어왔다는 남방문화 흔적이 뚜렷하다.
*운해주로 간 청궁씨의 후손. 백두대간 인문기행 1, 2화 참고
또 한편으로 북방 대륙 이동설을 주장한 신라 박제상의 부도지에는 기원전 7197년, 지금으로부터 9221년 전, 황궁씨가 부도복본符都腹本에 맹세를 한 후, 사람들을 데리고 마고성을 나와 동쪽 대륙의 끝 한반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 마고성을 나간 청궁씨는 무리를 이끌고 동쪽 운해주로, 백소씨는 서쪽 월식지, 흑소씨는 남쪽 성생주로, 황궁씨는 스스로 가장 춥고 험한 북쪽 천산주로 갔다고 부도지의 신라 박재상을 말했다.
필자는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유물 중 고래 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 조상들은 6000년 전 어떻게 고래를 잡았을까? 6천 년 전이면 신석기시대다. 당시 동해안은 고래가 서식하기 아주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고래가 새끼를 낳고 산후조리 먹이로 먹는, 질 좋은 미역이 동해안에 풍부했다. 지금도 부산 기장 일대 미역은 최고의 특산품으로 친다. 고래는 새끼를 낳고 해안가에 머물며 미역을 주로 먹는데, 우리 조상들은 고래가 미역을 먹는 것을 보고 사람들도 출산 후 산후조리로 미역을 먹기 시작했단다. 그 증거는 부산에서 가까운 언양 반구대 암각화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 사냥과 새끼 고래 암각화, 해초 사이를 유영하며 먹이 활동을 하는 고래 그림에서 유추한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보듯이 신석기시대 전 세계에서 우리 조상들 모양 체계적으로 고래를 잡고 보호한 사람들은 없었다.
*
6천 년 전 사람들이 절영도 동삼동 해안가에 터를 잡은 이유는 무엇보다 풍부한 해산물이었다. 씨족이 협동으로 잡는 물고기는 별미였다. 끈을 이용해 그물을 만들기도 하고 돌로 담을 쌓아 밀물에 들어온 물고기를 썰물에 갇히는 독살은 아주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야말로 땅을 짚고 헤엄치기였다. 물이 빠진 독살엔 늘 해산물이 풍부했고 아이들의 안전한 놀이터였다. 물고기· 조개나 담치 전복 등을 잡으며 놀기도 했다.
며칠 전 엄청나게 큰 태풍이 절영도 해안가 마을을 덮쳐 몇몇 마을 사람들이 파도 휩쓸리는 사건이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토굴이나 움집 속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태풍이 온다고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단속이었다.
파도가 잠잠해지자, 무더위에 며칠을 토굴 속에서 보낸 바다는 좀이 쑤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어른들 몰래 친구들과 바닷가로 나왔다.
하늘은 눈부시도록 맑았고 바다는 면경같이 잠잠했다. 오늘은 날이 맑아 멀리 수평선에 하늘이 할아버지가 갔다 왔다는 섬 대마도도 보였다. 수평선에 대마도가 보이고 파도가 잠잠하다는 것은 오늘 날씨가 매우 좋다는 뜻이다. 바다와 하늘이 또래의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닷가로 뛰었다. 무더위엔 바다가 최고였다.
늘 고동 소라 전복을 잡고 헤엄치며 놀던 독살 자리에 못 보던 큰 바위만 한 시커먼 물체가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움찔 바다는 무서워하면서 다가가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야, 가까이 가지 마. 저게 뭐지?”
놀란 아이들은 숨죽이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검은 집채만 했다. 검은 물체는 파도에 따라 흔들흔들 움직일 뿐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죽은 동물 같았다. 호기심 많고 용감한 하늘이가 가까이 다가가서 죽은 동물의 정체를 알아냈다. 하늘이는 씨족 군장인 할아버지에게 자주 이야기들은 고래란 것을 단번에 알았다.
“저건 분명 고래야! 먼바다에서 물을 뿜는 고래 말이야. 그런데 움직이지 않으니 죽은 것 같은데.”
“고, 고래라고?”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은 늘 섬에서 바라만 봤던 헤엄치는 거대한 고래를 직접 가까이에서 보았다. 순간 바다의 입안에서 군침이 돌았고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른들 말로는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는 고래 고기라고 말하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바다는 고래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고래를 떠 올리자 단번에 입속에 군침이 돌았다.
“어른들에게, 아니 할배님에게 먼저 빨리 알리자.”
마을의 최고 어른인 씨족장 하늘이 할아버지를 사람들은 할배님이라 부르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존경하며 따랐다. 할배님은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나 새로운 일이 발생하면 해결하는 군장이었고, 특히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주술사였다.
동네 꼬마들이 죽은 고래를 발견했다는 소문은 금방 마을에 펴졌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른들도 집채만 한 고래에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그저 멀리서 웅성거리며 모두 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한마디 식 했다. 육지에서 바라만 봤던 고래, 바다에서 머리를 내밀고 숨을 쉬며 물을 하늘 높이 품는 그 고래였다. 몇 년 전에도 죽은 고래가 떠내려왔는데, 그때 온 마을 사람들이 잔치했다는 아련한 기억밖에 없었다.
그때 돌창을 들고 팔에는 조개 팔찌를 주렁주렁 단 군장 하늘이 할아버지 할배님이 다가왔다.
“아서라!”
앞선 사람이 아서라 소리치며 할배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씨족장 할배님은 단번에 고래의 종류를 알아보았다.
“등에 등지느러미가 없고 작은 혹이 여러 개 나 있는 것을 보니 죽은 귀신고래이구먼. 아마 늙거나 병들어 죽었는데 태풍에 떠내려온 모양이야. 성질은 포악해도 고래는 사람을 물지 않아.”
과연 죽은 고래였다. 할배님께서 먼저 죽은 고래에 다가가 확인하고 방울을 흔들어 하늘과 용궁에 고하고 나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자, 마을 사람들은 와하고 일시에 환호를 질렀다.
“와! 고래다!”
무엇보다 죽은 고래는 너무 맛있어 보였고 온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배님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바로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얼마 전 할배님이 멀리 맑은 날, 바다 건너다보이는 섬 대마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날카로운 흑요석 돌칼은 단번에 고래 몸통을 여러 조각으로 해체할 수 있었다. 할배님은 귀신고래의 부위와 심줄 등도 잘 알고 있었다. 씨족장 할배님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 따를 수가 없었다.
고래 고기는 어떤 고기보다 연하고 맛있었다. 집채만 한 고래는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먹어도 며칠을 먹을 수 있는 바다 용왕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고래 고기를 받아서 든 사람들은 먼저 바다 용왕님께 비손을 하며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고래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어준 할배님에게도 감사했다. 용왕님은 태풍으로 사람들을 잡아가기도 하지만 잘 섬기고 비손하면 맛있는 해산물 먹을거리를 주는 고마운 용왕님이었고, 할배님의 말을 잘 따르면 늘 안전했고 먹을거리가 생겼다.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고래 뼈는 각종 도구 나 농기구로도 사용했고 특히 작은 뼈는 구멍을 뚫어 바늘로 만들면 옷을 만드는 데 아주 요긴했다. 씨족장 할배님은 작은 뼈를 갈아 침통에 넣고 다니며 아프거나 다친 사람들을 단번에 치료해 주기도 했다. 젊은 남자들은 고래 뼈를 바위에 갈아 창이나 화살로 만들어 산 짐승을 사냥했고 고래는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맛있는 고래 고기를 받아 든 사람들은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고, 모이면 모두 고래 이야기뿐이었다. 그리고 또 고래를 기다렸다. 용감한 사람들은 쪽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고래잡이를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사람이 바다에서 거대한 고래를 잡는다는 것은 위험했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못 하는 것이 없는 할배님도 고래 잡는 방법은 없다고 했다. 죽은 고래가 해안가로 떠내려오기만을 기원할 뿐이었다.
고래 고기 맛을 잊지 못한 용감한 사람들은 먼 바다를 보며 높이 물을 품는 고래를 바라보며 잡을 방법을 나름대로 생각해 나갔다.
비가 오지 않으면 할배님은 돌 제단 위에 재물을 쌓고 조개껍데기로 만든 방울을 흔들며 천제와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할배님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혼자 줄줄 외우며 몸을 떨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빌기도 했다. 할배님의 지극 정성으로 빌고 나면 마을에 좋은 일이 생기고 모두가 안녕할 것이라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
이때부터 사람들은 고래 사냥이란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증거는 언양 반구대 암각화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의 생각에는 언양 반구대 고래 암각화는 일종의 후손에게 남기는 기록이면서, 사람들에게 효율적인 고래 사냥과 고래 보호의 교육장이었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고조선과 왜의 갈등이 고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개연성을 유추해 본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고래 고기를 가장 많이 먹고, 고래를 가장 많이 잡고 혜택을 본 나라는 일본이다. 그러면서도 핵폐기물 오염수를 바다에 무단 방류하는 일본이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과학 포경이라는 논리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포경을 허락하고 있다. 일본은 무엇보다 우리 땅 독도의 강치를 멸종시킨 전력이 있는 나라다.
6천 년 전 동해 건너 왜(일본)도 죽어 떠내려온 고래 고기를 맛보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쪽배를 타고 창과 돌칼 등을 들고 고래잡이에 나섰다. 고래를 잡으려면 당연히 고래가 많은 곳으로 가야 한다. 동해에 고래가 많이 모이는 곳은 울산· 기장· 영도 동삼동 해안가다. 특히 새끼 고래가 많았다.
당시 고조선 사람들은 새끼 고래를 잡지 않았다. 언양 반구대 암각화에 새끼를 업은 귀신고래가 그 증거로 말해준다. 하지만 왜(일본)사람들은 쪽배를 타고 며칠을 걸쳐 노를 저어 동해안까지 고래잡이를 온 것이다. 고래 고기는 분명 모험할 만큼 가치가 있는 사냥이었다. 일본(왜) 사람들은 큰 35톤에 육박하는 귀신고래를 잡아 쪽배를 타고 일본까지 며칠 걸려 끌고 가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 그들은 분명 쪽배에 실을 수 있는 작은 새끼 고래를 선호했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고조선 사람들과 마찰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중국 배가 서해에서 불법 고기잡이를 하는 행위와 같았을 것이다.
그나마 쪽배를 타고 며칠 걸려 동해안에 와서 고래를 잡으면 다행인데 못 잡을 경우, 돌아가는 길에 지금의 기장이나 영도 등에서 물이나 식량을 구걸 혹은 약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고조선과 왜의 갈등은 신라 때에 최고조에 달했다.
왜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신라 문무대왕은 오죽했으면 자신이 죽으면 동해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고 바다에 수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실제로 문무대왕은 바다에 수장했다. 대금을 불면 왜적이 물러간다는 만파식적 설화도 같은 맥락이다.
필자 생각에는 신라 연오랑세오녀 설화에 나오는 바위가 물에 떠내려가 일본으로 갔다는 것은 동해안에 사는 귀신고래를 보고 사람들이 붙인 것이라 추정한다. 지금도 일본 시마네현에는 한반도 신라에서 연오랑세오녀가 타고 왔다는 돌배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만큼 일본 고대인들도 한반도의 귀신고래를 신으로 추앙했던 것이다.
다 아시다시피 일본의 근대화는 1858년 미국과 불평등조약으로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선 1853년(철종 4년) 미국의 포경선 싸우스 아메리카 (South America)호가 부산 용당포에 들어왔다. 조선의 동해안에 고래 가공 공장을 협상하려고 왔으나 조선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만다. 그 이후 미국은 일본에 눈을 돌려 일본 근대화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
바다에 무분별하게 버린 각종 폐기물과 미세플라스틱 등 환경오염으로 귀신고래가 동해안을 떠나 태평양에서도 사라질 위기라 한다. 뿐만 아니고 대륙의 들머리 영도구가 인구감소로 또한 사라질 위기란다.
바다의 영물 고래에게 지혜를 얻고 사랑했던 우리 조상님들에게 면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