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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1.28 12:33
품으로 뛰어드는 짐승은, 삼구지도(三驅之道)
/양선규
제 직장 정문 앞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상호를 가진 커피집이 있었습니다. 신축 건물의 1층에 있던 가게였습니다. 한두 번 들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날 보니 다른 간판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간판만 바뀐 게 아니라 업종 자체가 바뀐 듯했습니다. 음료만 팔던 찻집에서 경양식도 파는 식당으로 바뀐 것입니다. 서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그 가게도 코로나19로 문을 닫고 지금은 1년째 내부 공사 중입니다). 그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이 제게 서운했던 이유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상호가 주던 각별한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뜻밖의 발견(을 하는 능력), 의도하지 않은 발견, 운 좋게 발견한 것’을 뜻한다는 세렌디피티라는 말뜻을 저는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이 찻집 간판으로 등장했을 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저 그냥 지나치다가 하루는 문득 그 뜻이 궁금해져서 찾아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특히 교육학 쪽에서) 그 말을 유용하고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늘 느끼던 것이었는데 그렇게 ‘교육학 이론’에서 만나니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그 단어 자체가 ‘새로운 발견’ 취급을 당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세렌디피티가 저와 친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볼 때마다 세렝게티(Serengeti)라는 아프리카의 한 초원이 생각나는 거였습니다. 거대한 삶의 터전이며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이루어지는 사냥터이기도 한 그곳이 자유연상 식으로 자꾸 떠올랐습니다. “세렝게티(Serengeti)는 탄자니아 서부에서 케냐 남서부에 걸쳐 있는 3만km²가 넘는 땅으로, 30여 종의 초식동물과 500종이 넘는 조류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dubliner)』이 생각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살고 있는 도시가 조이스가 실감나게 그려낸 더블린이라는 도시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어서 그가 강조한 에피파니(Epiphany)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발견’이라는 연결고리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에피파니는 원래 그리스어로 ‘귀한 것이 나타났다’라는 뜻으로 한순간 대상의 전체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랍니다. 한자(漢字)로는 현현(顯現)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에피파니든 세렌디피티든 모두 ‘신기한 발견’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든 그 커피집의 간판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게 이런저런 복잡한 연상을 제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무언가 그 앞에 서면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세렝게티, 사냥터, 더블리너, 에피파니, 세렌디피티.... 그렇게 한 외국어를 두고 꼬리에 꼬리를 문 자유연상이 저를 휩싸고 돌았던 데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 당시 제가 극심하게 겪고 있던 ‘세계와의 불화‘가 범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간적인 이해 다툼에 빠져 전혀 글을 쓰지 못할 때였으니까요. 조금 제 정신이 돌아왔을 때 하루는 재미삼아 그것들의 서열을 한 번 매겨보았습니다. 연상되는 단어들 중에서 세렌디피티가 가장 서열이 낮았습니다. 때때로 그 단어는 낙오되기도 했습니다. 교육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단기 기억 상태에서 가장 늦게 장기 기억 창고로 이동한 단어이기도 했고, 늘 겪던 것이라 그 의미도 별반 큰 자극이나 충격을 주지 못했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무의식을 포함해서 모든 발견이 이미 우연인데 왜 그렇게 따로 단어를 만들어 특별히 강조해야 하는지 납득이 잘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와 세렝게티(Serengeti)를 나란히 적어놓고 보니 저의 주역읽기가 왠지 그 둘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는 주역이 세렌디피티로 다가왔습니다. 우연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때에 맞게 설명해주는 교범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그 정글을 떠나 있는 몸인데 그런 주역의 논리(모든 것은 필연이고 모든 것은 변화 안에 있다)가 마냥 재미가 있었습니다. 세렝게티의 약육강식을 인간의 윤리로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눈을 벗어날 때 세렝게티는 자연의 위대함을 더 각별하게 보여줍니다. 세렌디피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필연 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하게 찾아오는 행운이나 불운은 없습니다. 그런 저마다의 필연적인 것들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 지구상에서 생명을 타고 난 것들 사이의 ‘부득이한 관계’입니다. 자기 종교나 자기 인생철학만 앞세워 남의 그것을 폄하하는 것은 그래서 비생명적, 비윤리적입니다. 그런 생명의 관계를 (공연한 논리로 포장해서) 세렌디피티라는 이름으로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 역시 비생명적, 비윤리적입니다. 그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구오는 친함을 드러내니 왕이 세 군데로 몰며 사냥함에 앞으로 향하는 짐승을 놓아주며, 읍사람이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다.
九五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주역왕필주』, 95쪽]
수지비(水地比)䷇, 비(比)괘는 주역 여덟번째 괘입니다. 음효가 다섯 개 양효가 하나인 형상입니다. 다섯 번째 양효(九五)가 의미의 핵심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효는 아래로부터 헤아림. 음은 六, 양은 九로 표현). 앞 장의 ‘지수사’가 물을 품은 땅이라면, 이 장의 ‘수지비’는 땅 위에 고인 물입니다. 땅 위에 고인 물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길도 되고 흉도 됩니다. 그 방법을 사냥에 비유하여 설하고 있는 것이 위의 인용대목입니다. 구오(九五)효의 의미에 대해서 상술하고 있는 부분을 옮겨보겠습니다.
비괘의 주(主)로 이(二)효에 응하고 있어 친함을 드러내 놓는다. 드러내놓고 친하면 친해질 자가 제한되지만, 무릇 외물에 사사로움을 가지지 않고 오직 어진 이만을 함께 한다면, 가거나 오거나 모두 놓치지 않는다. 저 세 군데로 모는 삼구(三驅)의 예는 짐승이 거꾸로 자신을 향하여 오면 놓아주고 자기를 등지고 도망치면 쏘아 잡으니 오는 것을 사랑하고 가버리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냥할 때 항상 마주 오는 짐승을 놓아주는 것은 친함을 드러내놓고 왕위에 거하여 삼구(三驅)의 도를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용삼구실전금(王用三驅失前禽)’이라 하였다. 중정을 쓰므로 정벌에 상도(常道)가 있어 읍을 토벌하지 않고 움직임에 반드시 반란을 토벌하여 읍인(邑人)이 걱정이 없으므로 경계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대인의 길함은 얻지 못하였으나 친함을 드러내서 길함을 얻었으니, 이는 위에서 사람을 부리는 방식(上之使)은 되나 왕의 도(上之道)는 아니다. [『주역왕필주』, 95쪽]
사방을 막지 않고 한 군데는 터놓고 짐승을 몬다는 것이 ‘삼구의 예’라는 거였군요. 사냥터 자체가 ‘왕도(王道)’를 드러내는 좋은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궁여지책으로 ‘삼구’를 끌어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使)’는 될지언정 ‘도(道)’는 아니라고 말했군요. 사람을 사귀다보면 만사에 ‘사(使)’만 내세우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저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건 아닌지 저어됩니다). ‘사(使)’의 인간관계는 명확하게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선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고 대할지언정 완전히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내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굳이 ‘친함’을 드러내고저 하는데 상대방들은 종내 품 안으로 뛰어들지 않습니다. 밖으로 달아나기만 합니다. ‘삼구의 예’가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힘을 가지고 있을 때만 사냥터의 주인으로 인정받습니다. ‘도(道)’를 마다하고 ‘사(使)’만 앞세우며 사냥터의 주인 행세를 하다가는 결국 자신도 ‘삼구의 예’로 내몰림을 당하는 운명에 직면합니다. 그때는 미련 없이 사냥터를 떠나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주역읽기가 또 ‘날카로운 모서리’를 드러내며 제게 가르침을 베풉니다. 제가 극심하게 겪은 바가 있던 ‘세계와의 불화‘도 결국은 제게 ‘도(道)’가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생긴 것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동문수학한 한 선배에게(그는 나중에 소설가도 되고, 유명한 영화감독도 되고, 장관까지 지냈습니다)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생긴 것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이잖아?”, 그 선배는 자기에게 끝까지 형(兄) 자를 붙이지 않는 저를 두고 다른 후배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만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이 선배야, 당신도 만만찮거든.”이라고요. 어쨌든 여태 살면서 길 가다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도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것도 아마 그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