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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책상과 밥상 사이> 216.인문적 소양과 윤리의식

작성일 : 2024.09.30 04:25

인문적 소양과 윤리의식

 

조선 중기의 명의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가 왕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의관이 되었고, 가난한 백성을 정성껏 치료하며 연구와 집필 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선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그는 서자 출신이지만, 정승에 준하는 벼슬까지 올라갔다. 선조 사후 그는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배되기도 했지만, 어디에서나 인술을 펼쳤다. 그는 때로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집마다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보살폈다. 그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성한 동양 최고의 의학서 '동의보감'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사상이 가득 담겨있다.

 

허준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며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우리는 이런 삶의 자세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선조가 허준에게 '동의보감' 집필 책임을 맡긴 것은 의학뿐만 아니라, 그가 경전과 역사에도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 때 의학서 '의림촬요(醫林撮要)'에는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여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박식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서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렀다. 사람을 살린 것이 부지기수다"라는 기록이 있다. 허준이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의학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라고 불린다. 생애를 바쳐 생명 외경 사상을 실천한 그가 14세 무렵 동네 아이를 넘어뜨리고 심하게 때린 적이 있었다. 슈바이처에게 맞은 아이가 울면서 말했다. "내가 만약 매일 너처럼 잘 먹을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맞지는 않았을 거야." 어린 슈바이처는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이 일어난 이후 그는 자기보다 약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고 도우며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부유한 목사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을 보면, 아버지가 가톨릭이 강세인 지역에서 소수를 위한 루터교회 목사여서 겨우 가족을 부양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성장하면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는 서른 살 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로는 인류에게 직접 봉사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임마누엘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를 받았고, 그다음에는 복음서 연구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바흐 연구와 오르간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고, 파이프 오르간 제작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피아노 연주도 잘해서 아프리카 봉사를 떠나기 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학문을 닦고 예술을 두루 섭렵한 후, 37세에 의학 박사학위를 땄고, 38세 때 의료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생명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정하고, 생명을 대하는 윤리적 자세를 선악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인간과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로 이 사상을 확장했다. 그는 인간은 자기를 도와주는 모든 생명체를 도와줄 필요가 있고, 살아 있는 어떤 것에도 해를 끼치는 것을 부끄러워할 때만 진정으로 윤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은 모든 생명체가 가치 있는 존재로서 동정받고 있는지에 관해 묻지 않으며, 그것이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얼마나 느낄 수 있는지도 묻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자기 들판에서 소에게 줄 건초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풀을 뜯는 농부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길가에 핀 꽃을 꺾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가피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생명에게 그릇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의정 갈등으로 의료 공백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국민은 괴롭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정부와 의료계의 대립은 필수 의료와 의대 교육 시스템 붕괴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수험생에게 왜 의대를 가려 하느냐고 물으면 절대다수의 학생이 망설이지 않고 "정년 없이 일할 수 있고, 평생 안정된 수입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고 답한다. 현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청소년기에는 누가 의대 진학 동기를 물으면 허준이나 슈바이처,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 같은 인물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도 나와야 한다. 높은 이상과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해도 세월과 더불어 초심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출발부터 개인의 안위와 치부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오늘의 세태가 현재의 의료대란보다 더 걱정된다. 우리 모두에게 인문적 소양과 윤리의식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