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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9.23 12:31
아, 장기표!
/신평
1986년 5월 인천에서 일어난 ‘5.3 사태’는 엄중한 무게로 짓누르던 전두환 정권에 정면으로 맞부닥쳐 구멍을 냄으로써 정권의 힘을 서서히 빼는 역할을 하였다. 그 주모자가 젊은 장기표였다.
그는 출소 후 제일 먼저 절친인 조영래 변호사를 찾아갔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동네 뒷동산에 올라갔다. 함께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장기표의 첫말이 떨어졌다.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 이 말은 조 변호사에게도 잔잔한 충격을 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 조 변호사는 내게 그 말을 전했다.
오늘 아침 장기표 선생이 영면하셨다. 이로써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절절한 안타까움이 솟아오른다. 한겨레 신문에 실린 평대로 그는 평생을 불운과 불화로 점철했는지 모른다. 무려 7번의 국회의원 출마, 세 번의 대통령 출마 그 어느 곳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과 시대를 이끄는 선구자적 활동, 공동체를 향한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년 파락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불세출의 인물 중 한 명이었던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를 자주 가까이 만나 그의 어진 성품과 뛰어난 재능에 감복하면서도 항상 ‘큰 산’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 소식을 접하고 이상하게도 나는 거의 매일 눈물을 흘렸다. 혼자만 되면 까닭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걷잡을 수 없었다.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그 후의 내 박복한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장기표 선생은 불운하게도 흉중에 품은 뜻을 실현할 계기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만난 그는, 내가 보기에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였다. 그에게는 이미 그동안 급속하게 변한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갈 예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한 번만이라도 공직을 역임할 수만 있었다면, 재충전과 새로운 자기형성의 시간을 거치며 한국 정계의 든든한 지도자 반열에 들었을 것이다.
장기표 선생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둘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사람은 공교롭게 돌아가신 조영래 변호사뿐이었다. 조 변호사가 좀 더 살았으면 장기표 선생도 날 수 있었고, 아마 나도 저 푸른 하늘을 날며 성심을 다하여 우리 공동체를 위해 진력했을 터이다. 나야 그럭저럭 판사도 하고, 로스쿨 교수도 하며 혼자의 밥벌이는 하였으나, 장기표 선생의 스산한 일생을 생각하면 너무나 애달픈 일이다.
머지않아 나는 두 분을 만나러 갈 것이다. 반드시 만나뵐 것이다. 그리하여 이승에서 못다 한 채 한없이 쌓인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려고 한다.
<공정세상 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