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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9.23 12:22
싸움의 기술⑳ - 세모와 네모
/양선규
젊어서는 다방 같은 데서 글을 많이 썼습니다. 단골로 드나들던 음악다방에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지에 적어두었다가 집에 와서 이리저리 이어 붙여 보곤 했습니다. 간혹은 대여섯 시간, 앉은 자리에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 ‘세모와 네모’라는 ‘어린왕자’ 아류의 유치한 단편도 한 편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내용도 잘 생각나지 않는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아쉽게도 '세모와 네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손바닥만한 메모지(음악신청 용지)에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흘려쓴 것인데 그 도톰한 종이뭉치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합니다. 누가 자기 달라고 많이 졸랐습니다만 주지 않았던 작품인데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아마 그 친구가 저 몰래 가져간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합니다. 지금 읽어보면 '그때의 나'를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읽을거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어린왕자』(셍텍쥐페리, 1943)나 『데미안』(헤르만 헤세, 1919)이 어른들의 읽을거리로 더욱 권장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나이가 드니, 십대 때든 이십대 때든, 젊었던 그때 그 시절의 '감동과 감흥'을 재발견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 하고 놀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몇 장 넘길 필요도 없이, 인생살이의 요점과 핵심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대목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명작이 그냥 명작이 되는 게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그 대목을 읽은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직 그런 감동까지 챙길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읽었던 때문일 것입니다.
헤세의 전기적 자료들을 보면서 옛날 '세모와 네모'를 쓰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세모의 세계와 네모의 세계,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전혀 다른 자신만의 질서를 가진 두 세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작가 헤르만 헤세가 경유한 생의 두 차원도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이전의 세계와 그 이후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그가 융학파적인 '자기실현이라는 생애 목표'를 뚜렷하게 세우고 소설을 쓴 것이 마흔 이후의 일이었으며 그것이 처음 소설작품으로 드러난 결과가 『데미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작품의 성공을 통해서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국민 작가'가 되었습니다. ‘국민 작가’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관철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가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한 나라를 통째로 얻는 것입니다. 자신의 나라를 지구상에 하나 세우는 것입니다. 작가에게는 그것보다 더 귀한 선물과 특권이 없습니다. 주옥과도 같은 명작이 그 어떤 방해도 없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천국의 문'이 이 땅 위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데미안』은 열 살짜리 주인공(싱클레어)이 세계의 이중성에 눈뜨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를테면 ‘높은 물과 낮은 물’이 공존하는 그 오묘한 인간 세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부터 이 소설은 출발합니다.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거칠고도 잔인한 그 모든 일들이 사방에, 바로 옆 골목, 바로 옆집에서 있었고 경찰 끄나풀들과 부랑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정뱅이들은 아내를 패고, 저녁때면 젊은 여자들의 무리가 뒤엉켜 공장에서 꾸역꾸역 나왔다. 늙은 여자들은 누군가에게 요술을 걸거나 병이 나도록 할 수 있었다. 숲에는 도둑떼가 살고 있었다. 방화자들은 뒤쫓는 경관에게 잡혔다. 어디서나,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 집안에서만 빼고는 어디서나 이 격렬한 두 번째 세계가 솟아나오고 향기를 뿜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좋았다. 여기 우리 집에 평화와 질서, 안식이 존재한다는 것, 의무와 거리낌 없는 양심, 용서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 모든 다른 것들, 소란하고 요란한 것, 음침하고 폭력적인 것이 존재하며 그래도 그런 것들로부터 한 걸음이면 어머니한테로 피신할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웠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두 세계」, 11~12쪽]
열 살짜리 주인공 싱클레어는 성(性)과 폭력, 이율배반과 공격성이 유예된 양심과 도덕의 세계에 살면서 자신을 둘러싼 그 ‘격렬한 두 번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만약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으로부터의 위협을 차단시켜주는 ‘어머니’라는 보호막의 존재에 대해서도 감사히 여깁니다. 저에게는 그런 ‘두 번째 세계’가 정 반대로 나타난 경험이 있습니다. 종교 체험인데 열 서너 살 무렵에 마치 무지개처럼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그 경험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껏 잊지 못하는, 제 인생 최초의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두 세계’를 보게 됩니다(물론 그것을 보지 않고, 혹은 보지 못하고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감탄이든 경이든 혼돈이든 공포든, 우리는 '세계의 분열'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싱클레어처럼 ‘높은 물’에서 살면서 ‘낮은 물’을 겪을 수도 있고, 저같이 ‘낮은 물’에서 태어나 갑자기 ‘높은 물’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열의 경험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생의 분열’이 적절한 안착지를 찾지 못하고 분열 그 자체로 남아서 상처가 되는 경우도 종종 목격합니다. 아니면 가식과 위장의 인생을 강요하는 경우도 자주 보고요. 겉으로는 ‘높은 물’ 인생을 자처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낮은 물’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맹신하며 사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에게는 싱클레어가 체험한 ‘그 두 번째 세계’만 ‘진짜 세계’입니다. 그들은 도덕이나 양심, 헌신이나 박애는 그저 하나의 위장술이라고 여깁니다. 서로 속이며 사는 게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딱하기도 하고 밉기도 합니다. 똑같은 인간의 탈을 쓰고 살면서 왜 그렇게 저급한 세계의 신민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싱클레어가 그 ‘두 세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조금만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 옆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주한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랬다. 나 자신이 가장 심하게 그랬다. 물론,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를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다른 것들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내게는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했고,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을지라도. 심지어 한동안 내가 가장 살고 싶어 한 곳은 금지된 세계 안이었다. 그리고 밝음 속으로의 귀환은 – 그것이 제아무리 필연적이고 제아무리 선하더라도 – 덜 아름다운 것, 보다 지루한 것, 보다 황량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두 세계」, 12~13쪽]
사족 한 마디.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는 게 있답니다.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이라고 합니다. 인질이 아니더라도 일부 매 맞는 아내, 학대받는 아이들도 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폭력과 야만을 스스로 받아들여 자신을 망친 것들의 앞잡이가 됩니다. 최근 들어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납치범’들과 같은 이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완연히 ‘낮은 물’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 중의 상당수가 그들에게 환호를 보냅니다. 균형감을 잃은, 상처뿐인 자기 생(生)의 복수극을 대행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그가 펼치는 복수극이 자신들을 인질로 삼은 야비하고 저질스런 막장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맹목의 하수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세계가 ‘분열’을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그 족은 ‘낮은 물’입니다. 싱클레어가 말하고 있듯이 그것은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고,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는 곳입니다.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세계’입니다. ‘높은 물’에 살려면 가책과 불안에 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 ‘첫 번째 세계’를 뒤엎는 것은, 그래서 ‘낮은 물’의 포로가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못나고 약하고 악한 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