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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책상과 밥상 사이> 214. 유머 감각과 연설

작성일 : 2024.09.17 12:20

유머 감각과 연설

 

/윤일현

 

 

바람 잘 날 없는 난장판의 한국 정치와 대선 후보 확정을 위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보며 아카데미 최고 작품상을 받은 영화 킹스 스피치(King’s Speech)’가 떠올랐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 조지 6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는 조지 6세를 국왕으로 대하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대하듯 접근해 콤플렉스를 치료하도록 도와준다. 마침내 조지 6세는 말더듬이 증세를 극복하고 힘 있는 라디오 연설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한다. 간결하면서도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진 힘 있는 연설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위대한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군데로 모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빛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오프라 윈프리,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하원의원 등의 연설은 품위 있는 유머 감각과 마음의 여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도 생각하게 한다.

정치란 말의 예술이고 그 꽃은 연설이다. 연설은 청중을 지루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연설에는 유머가 필요하다. 유머는 말하는 사람 자신을 유쾌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에 상대에게 호감을 준다. 정치인, 연예인, 성직자, 교사 등 사람 앞에 서야 하는 사람들이 유머 감각이 있으면 훨씬 부드럽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유머는 다른 사람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의적절한 농담은 긴장을 완화하며, 크고 작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기품 있는 유머는 연설자와 청중 모두에게 경계심과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상생과 화합, 당면한 문제의 창의적인 해법을 함께 찾기 위한 영감을 줄 수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현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1946년생으로 동갑이다. 트럼프가 클린턴보다 생일이 두 달 빠르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클린턴은 이틀 전 생일을 맞았다며 나는 4대에 걸친 가족 중 최고령자인 78세가 됐다. 그래도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허영심은 트럼프보단 아직 젊다는 것이라고 말해 청중의 폭소를 끌어냈다. 바이든의 고령을 공격하던 트럼프를 저격하는 촌철살인의 뼈 있는 농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탁월한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청빈과 겸손을 강조하지만, 유머를 중시한다. 그는 수도자들이 딱딱하고 엄숙한 방식 말고 유머를 통해 신앙을 전파하라고 당부한다. 교황이 올해 615개국 유명 코미디언 100여 명을 바티칸에 초대했다. 교황은 그들에게 우리가 미소를 지으며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당부하며, “주여, 나에게 좋은 유머 감각을 주소서라고 40년을 기도해 왔다고 말했다.

유머는 유대감을 형성하고 어색함이나 당혹감을 극복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처칠은 탁월한 유머 감각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가 의회에 30분 늦게 참석한 적이 있었다. 정적들이 게으른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77세의 그는 능청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늦지 않으려 했는데,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도 내 아내처럼 예쁜 여자와 산다면 아침 일찍 나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회의가 있는 날은 늦지 않도록 각방을 쓰겠습니다.” 폭소가 터졌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프라 윈프리는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J.D 밴스 상원의원이 아이가 없는 여성이 많은 민주당 지도부를 캣 레이디라고 비하한 발언을 끌어와 집이 불타고 있을 때 만약 그 집이 아이가 없는 캣 레이디의 집이라면, 우리는 그 고양이도 구하려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도 상대를 저격하는 품격 있는 연설을 했다.

미국은 수많은 문제와 위험 요소를 가진 나라지만,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며 국민의 공감을 얻어내는 탁월한 정치인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면서도 나라가 유지되고 발전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능력 없는 정치가일수록 대중을 협박하거나 불안하게 하며 선동하기를 좋아한다. 수준 미달의 정치인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내뱉은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 실력이 없으니 유머 감각도 없다. 유머는 마음의 여유와 확신, 자신감에서 나온다. 환호와 폭소 속에서 연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명연설을 듣고 싶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