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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9.02 11:34 수정일 : 2024.09.02 11:40
<부문1-5>
전통지향적인 자연관과 남성적 어조의 시인
-이석 시인의 삶과 작품세계
/양왕용
(1)들어가며
필자가 이석(1927—2000)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65년 12월 생애 처음으로 상경한 때였다. 필자는 그 당시 경북대학교 3학년이었다. 그 해 7월에 문덕수 시인이 주재하는 월간 《詩文學》에 김춘수 은사님의 추천으로 「갈라지는 바다」가 초회 추천이 되어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였던 것이다. 서대문 의주로 《시문학》을 발간하는 청운출판사 근처 다방에서였다. 문덕수 시인에게 김춘수 은사님의 안부도 전하고 인사도 할 겸 처음 만나는 자리에 이석 시인이 동석하였다. 문 시인이 이석 시인에게 필자를 소개하면서 유니크한 시를 쓰는 젊은 시인 지망생이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가 이 석 시인의 연보를 보니 30대 후반으로 마산고등학교에서 시작한 경상남도의 중등교사 교사를 고성 영현중학교에서 1965년 10월 사임하고 서울로 갓 상경하여 서울에서의 공립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하기 직전 잠시 대성학원 강사를 하면서 대학입시 참고서 『정통국어』를 문덕수 시인과 함께 만들고 있었던 시절인 것 같다. 문덕수 시인 역시 이석 시인보다 한 살 젊은 30대 후반이었으니 두 분 역시 젊고 좋은 작품을 쓰는 시인이었다. 어느 새 55년의 세월이 흘러 이석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도 23년이나 되었다. 그 후 전국적인 문인들의 행사에서 몇 번 마나기는 했으나 별 다른 기억은 없다. 1982년 부산여자전문대학(현재의 부산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가 신설되면서 시 담당 교수로 이석 시인이 부임하면서부터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3년 2월 정년퇴임하면서 부산을 떠나 출가한 딸이 거주하는 논산 쪽으로 옮겨 가면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동안 이석 시인은 1987년부터 1990년 제 8대 부산문인협회 회장으로 재임하는 등 활발한 문단활동을 했다.
(2) 생애와 문단 활동
이석 시인은 일제강점기 중반기인 1927년 2월 13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모로리 87번지에서 재령 이 씨 이병철 옹과 강진 안 씨 안병반 여사를 부모로 하여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석 시인은 태어났을 때에는 부친이 이름을 외자인 石으로 호적에 올렸으나 14세 때인 1940년 일제 창씨개명 정책으로 淳燮으로 개명되어 호적상 본명이 되었다. 그러나 1955년 문단에 나오면서 필명을 李石으로 하여 창시개명 전의 이름을 다시 찾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면내 하나 뿐인 군북초등학교를 1941년 졸업하고 그 당시의 경남의 수재들이 입학하는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직전인 1944년 진주사범학교 5학년 신분으로 함안군 산인면 산인초등학교에서 첫 교단에 서고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 해 12월에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6년 1월 1일 고향의 모교인 군북초등학교 6학년 담임으로 발령을 받아 그해 8월 말 졸업을 시켰다. 그 해 9월에는 동국대학 전문부 사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10월에 대학 1년 수료자와 사범학교 5년제 졸업자가 응시 자격이 있는 서울대학교 부설 중등교원양성소 국문과(1년 6개월제)에 입학하여 1948년 3월에 졸업하였다. 미군정 문교부 중등학교 국어교원 자격정(36호)를 받아 마산공립중학교(6년제, 현 마산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히여 1962년 3월 마산상업고등학교(현 합포고등학교)로 전근할 때까지 14년 1개월 동안 중부 경남의 명문 마산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명문 대학 진학 지도에 매진하였다. 이때가 이석 시인의 교단생활 가운데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고 이때의 동료 가운데 김춘수 시인, 이원섭 시인 그리고 김남조 시인 등 한국문학사에 남을 시인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 문인들이 많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김춘수 시인이 함께 근무한 1949년부터 1951년까지 현대문은 김춘수 시인이 담당하고 이 시인은 주로 고문과 국문학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시인이었지만 한학자 집안의 후예답게 고전문학을 가르쳤고 시작에서 전통을 중요시하는 기반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현대문학》데뷔 후(1955-56년)에는 마산고 문예반 지도교사로 열정도 남달랐다.
이석 시인의 학구열과 성취 요구도 대단했다. 중등학교국어과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정으로 고등학교 국어교사 자격을 획득하였고, 이때부터 그 당시 마산상고에 근무하던 문덕수 시인을 알게 되어 돌아가 때까지 친교를 유지하였다. 1960년에는 해인대(경남대 전신)에 편입하여 4학년을 졸업했다. 한편 마산시사도 집필하고, 지역 일간지 마산일보 유일한 상임논설위원도 겸하였다. 해인대학 졸업 후에는 시간강사로도 출강한다. 그러나, 1962년 3월 이후의 경남에서의 교원 생활은 전근이 잦았다. 64년 3월에는 마산상고에서 고성농고로 다시 65년 3월에 고성군 영현중학교로 전근되어 10월에 사임하고 상경한다.
상경 후에는 성문각에서 출판된 대입국어 참고서 『정통국어』(1968년 발간)를 문덕수 시인과 함께 만들기에 주력하고 대성학원 강사를 잠시 한다. 그러다가 1969년 성동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복귀하여 영등포여고로 곧 전근하고 경기여고(1973년), 창덕여고(1978년) 교사로 근무하다가 1982년 신설된 부산여전(현재의 부산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시 담당 교수로 부임하여 1993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근무한다. 부산여전 문예창작과는 1990년에 폐과되어 만년에는 교양과목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마산과 경남에서 초등까지 포함하면 20년의 교직생활 그리고 서울에서 12년 부산에서 11년 모두 합하여 43년의 교단에서 다양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상이 그의 생애와 교직 생활을 개관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석 시인의 문단 데뷔 과정과 문단 활동 그리고 작품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955년 1월에 《현대문학》이 창간되고 그의 동향인 조연현(1920-1981)평론가가 주간으로 참여한다. 이석 시인은 그 해 6월호에 시 「夏草」와 「竹林」 두 편이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의 추천으로 1회 추천을 받는다. 7월호에는 「봉선화」를 역시 청마가 추천한다. 그리고 박두진(1916-1998) 시인에 의하여 1956년 1월호에 「落葉」을 3회 받음으로써 추천을 완료한다. 그 때 이 시인의 나이가 당년 20세였다. 한편 국어국문학회 마산지회장에 취임하여 학문의 길에도 매진한다. 1957년에는 마산문화협회 문학부장을 하며, 1959년에는 시문집 「夏草」를 국어학자인 일석 이희성(1897-1989)의 서문으로 시 30편, 수필10편, 연구소논문 5편을 수록하여 발간한다. 1962년에는 힌국문인협회 마산지부를 결성하여 지부장이 된다.
상경한 1966년에는 제2시집 『南大門』(동국문화사)을 문덕수 시인의 발문으로 낸다. 1960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문인협회 이사를 3연임합니다. 1971년에는 한국현대시인협회가 서정주 시인을 회장으로 창립되었다. 그 당시 상임이사는 문덕수 시인이었고 이석 시인은 12인의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석 시인은 1985년도에는 부회장으로 수고했다. 이석 시인은 1971년 결성된 청마문학회의 상임 간사를 맡았으며 1982년에는 회장으로 수고 했다. 1973년에는 제 3시집『鄕關의 달』(현대문학사)을 발간하였고, 1981년 발간한 제4시집 『花魂集』(심산출판사)으로 한국문인협회에서 주는 제 18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부산으로 내려온 1982년 이후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우선 제5시집 『오늘, 오늘은』을 돌아가신 김준오 교수의 해설로 부산의 출판사 <시로>에서 출판하였다. 그리고 1984년 5월에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제47차 국제펜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85년에는 국정교과서 『고등국어』 편찬심의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86년에는 마지막 시집인 제6시집 『눈물의 자유』를 서울 오상사에서 발간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는 한국문학회 추천으로 <경남일대사류문집조사>라는 연구 과제를 그 당시의 문교부의 연구비로 수행하기도 했다. 회갑년인 1987년에는 마산고등학교 총동창회가 추진한 회갑기념문집으로 『이석 문학선집』과 『이석 화갑사화집』을 간행했다. 편집위원 가운데 부산문인을 소개하면 마산고등학교 11회 황하수 시인, 그리고 19회 이상개 시인이 있다. 그 해에는 청마 20주기 추모행사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마지막으로 부산문인협회회장으로 활동한 것을 소개하겠다. 이석 시인은 부산문단에 편입 된지 6년만인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제 7대 회장으로 봉사했다. 그 당시의 두드러진 업적은 지금 월간으로 발간되고 있는 《문학도시》 전신인 계간지 《문학의 세계》를 창간한 것이다. 서울시청 고위직으로 근무하다가 부산시장에 임명된 고 안상영시장의 강력한 의지로 그 당시의 부산문협 연간지 《부산문학》과 별개로 발간비와 고료를 부산시로부터 지원받아 계간지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부산문협 기관지 성격이라기보다 전국에 배포해도 손색이 없는 계간지를 만들기로 하고 발행인은 회장 이석 시인으로 하되 주간은 집행부와 관계가 없는 임명수 시인으로 하고 1990년 여름호 《문학의 세계》를 창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부산문인협회 회인들에게 많은 지면을 제공하였지만 전국의 실력 있는 문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석 시인이 이렇게 초석을 놓았다.
그런데 제호가 《문학도시》로 바뀐 것은 제 10대 김상훈 회장 때이다. 이석 시인의 업적과는 상관없으나 그 경위를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문학의 세계》를 1995년 봄호까지 통권 19호를 내고 정식으로 문화관광부(요즈음은 문예지 등록을 부산시에서 받으나 그 당시는 문광부였음)에 등록절차를 받게 되자 그 제호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미 유사한 다른 문예지가 등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광부에 등록하면서 제호를 《문학도시》로 바꾸어 창간호를 1995년 여름호로 내게 되었다. 계간지로 2005년 겨울호까지 통권 43호를 발간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제13대 강인수 회장 임기 마지막 연도에 격월간지로 그 당시에는 부산시에 위임되어 있는 등록 절차를 다시 밟으면서 《문학의 세계》 통권 19호와 《문학도시》 43호를 통합하여 역사를 승계하고 《문학도시》 3-4월호를 63호로 발간했다. 그 당시 부산문협 부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가 격월간지가 되면서 발행인과 편집인을 회장이 겸하고 있던 제도를 분리하여 편집인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연유를 2006년 3-4월호 책머리에 편집위원 대표로 필자가 쓴 글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3. 작품세계―꽃의 상상력과 역사와 고향, 그리고 바다
이석 시인은 근 40년 동안 시작을 했으나 시집은 산문까지 수습된 첫 시집을 포함해 여섯 권을 냈다. 앞에서 열거 했으나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시문집 『夏草』(1959,홍지사), 제2시집 『南大門』(1966,동국문화사), 제3시집 『鄕關의 달』( 1973,현대문학사), 제4시집 『花魂集』(1981,심산출판사), 제5시집 『오늘 ,오늘은』(1983, 시로), 제6시집 『눈물의 자유』(1986,오상사) 등이다. 물론 초창기는 요즈음처럼 시집을 손쉽게 낼 수 없는 출판계의 사정도 있었겠만 과작의 시인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초기부터 꽃과 식물을 제재로 한 것이 많았다. 추천작도 모두 그렇다. 그러한 기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제2시집은 그 제호가 『南大門』이 된 것처럼 역사와 현실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부산으로 오기 직전부터 만년에는 바다를 제재로 한 작품들도 많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들을 골라 그의 작품 세계의 특색을 파악해보겠다.
그 푸른 잎새 속에
층층이 밝은
초롱을 걸었다.
한알의 꽃씨 속에 잠자던
女人의 피가
이 여름 鳳仙花로 피어……
사나이의 體臭같은
더위를 안아
꽃은 저리도 붉었다
앞 뒤 周邊의
그 뭇 풀들이
너에게도 부득부득 기어오르고
이 계절의 지친 마음속에
핀 젊음은
진정 너 같이 아름다운 것
꽃은 뉘에게도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
그 마음으로 피어 있다.
-「鳳仙花」 전문
이 작품은 1955년 7월호 《현대문학》 7월호에 청마에 의하여 2회로 추천된 작품이다. 그리고 뒷날 「봉선화 2」로 개작될 정도로 그 자신이 아끼는 작품이다. 이 시는 우리나라의 설화 속에 여인과 관련 꽃인 봉선화를 제재로 하였다. 물론 이 시의 참신성은 첫 연에서 봉선화의 꽃의 달린 모양을 ‘층층이 밝은 초롱을 걸었다’로 비유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연에서 봉선화의 붉은 꽃을 ‘’꽃씨 속에 잠자던 여인의 피‘라고 비유하고 있는 부분은 이석 시인의 자연관이 전통지향성에 닫아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청자를 봉선화로 삼아 의인화 기법을 통하여 봉선화 꽃에서 젊음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태도에서 감정을 노출하는 것 역시 전통지향적이다. 시적화자의 어조가 남성적인 점은 추천자인 청마를 닮아 있다. 그렇다고 그 나름의 개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굳이 지적하자면 그렇다는 말이 되겠다. 이러한 남성적 어조는 여성지향적인 많은 다른 시인들과는 차별성을 가지게 된다.
저 靑山
흰 구름 아래
鶴으로 날던
아내와 함께 雙鶴으로 날던
그날은 아득히
저 靑山
흰 구름 아래
한 마리 소가 되어 풀을 뜯다가
종일을 뻐꾸기처럼 울다가
아무렇게나 풀꽃들과 놀고 싶다.
저 靑山
흰 구름 아래
아무도 오지 않는 深谷에서
애타는 심정의
한잎 紅葉이 되어
불타고 싶다.
-「靑山感別曲」 전문
이 시는 그가 1981년 한국문인협회 세미나 주제발표 요지 「한국의 서정시와 인간성 회복』이라는 글에서 우리 시의 시정신의 고향이라고 주장한 고려가요 「靑山別曲」에서 제목을 차용한 면에서 역시 전통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산에서 학이 되고 아내와 함께 쌍학이 되겠다는 둘째 연이나 소가 되고 뻐꾸기가 되겠다는 데서 등장하는 동물도 하나같이 전통지향적이다. 마지막에는 홍엽이 되겠다는 것 역시 그렇다. 동물과 식물이 되겠다는 시적 공간은 박두진의 초기작 「어서 오너라」, 「청산도」, 「향현」 등이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에덴동산 같은 것에 비하면 이석 시인의 자연은 동양화 즉 한국화를 연상하는 무릉도원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 역시 그의 유가적 집안의 전통과 관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 또한 시적화자는 남편 즉, 남성이다.
붉은 노을에 취하여
夕陽 앞에 和答하여
덩그러히 솟아 나날을 지킨 王朝 五百年
나라 반쪽을 깔고 앉아
오연히 굽어보던 세월
너에게 목을 매고 엎드린
소리없는 백성들의 눈앞에
참혹한 핏자국을 남기고
술렁이는 저자를 지켜
지옥의 別宮처럼 소스라친
가혹히 꿈꾼 非情의 門
얼마나 많은
허망한 꿈을 다스리고
얼마나 많은
비열한 웃음과
눈짓을 보았으며
너는
벽이며 쇠사슬 하늘이며 보람이러니
五百年 王冠을 받쳐온
산악같은 의지
만만한 忠誠도
그날에 빛없이 무너진
悲運의 城門
싱싱한 바람 太陽을 받들고
닦았던 서울은 아득히 五百年
너는 지금에
퇴락한 古城 荒草를 벗하여
고요히 잠들지 못하고
무슨 業報로 먼지와 소음 속
삘딩의 현기에 엎드려
그날보다 더 탁한 웃음을 엿보며
그때보다 더 독한 바람 속에 섰느냐.
-「南大門」 전문
이 시는 이 시인의 제2시집『南大門』(1966년)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그가 상경한 이듬해인 1966년에 나온 이 시집에 서울의 상징인 남대문이 제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제재 탓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시를 전개하고 있다. 우선 첫째 연에서 남대문을 ’왕조 오백년‘으로 비유하여 조선조로 치환한다. 둘째 연에서는 우선 첫 행에서 ’나라 반쪽을 깔고 앉아‘로 분단의식까지 표출하고 있다. 셋째 연에서는 조선조의 당쟁의 역사까지 지켜보았음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넷째 연에서는 일제에 의하여 망국의 비운을 맞아 훼손된 점도 밝히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산업화된 지금 공해 속에서 서 있다는 현재의 상황도 형상화 하고 있다. 이렇게 남대문이라는 문화유산을 통하여 이 시인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시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판문점에서」)과 임진강(「임진강에서」)을 제재로 한 시도 있고, 광복절( 「팔월 십오일에」,「鐘路에서 그날에도」)과 6.25전쟁(「六月이 오면」)을 제재로 한 시들도 있다.
그리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의 3.15 의거의 현장에서 그는 제자의 죽음도 목도했으며 마산고 교정에 세워진 위령탑의 비문도 지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한 경향으로 역사의식을 바탕을 한 시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1973년에 발간한 그의 제3시집은 제목조차 『鄕關의 달』이다. 향관은 고향의 다른 말이다. 굳이 고향이라 쓰지 않고 이미 고사성어로 굳어진 ’南兒立志出鄕關‘의 향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그의 시작의 큰 줄기인 전통지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40대에 고향지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들판 구석에 나자빠져
낮잠에 곯은 山들
비틀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은
오늘따라 목을 추길 물도 없이
하얀 뱃가죽이 들나고
그 분노의 기억을 삭여야 할
바위도 나무도 없다
어둠을 안고 휘청거리는 洞口나무는
세월의 흐름조차 물을 수 없고
廢屋이 된 書堂 숲에는
아버지의 글 읽던 소리
그 지독한 통곡소리처럼 매미가 운다.
-「故鄕山川」 전문
이 시인의 이 작품은 그의 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조적 어조이다. 고향을 찾은 시기가 여름, 그것도 가문이 심한 여름 한낮인 탓도 있겠으나 이 작품의 어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조적이다. 첫째 연의 ’나자빠져 낮잠에 곯은 산‘도 그렇고 마지막 연의 매미 울음소리를 ’그 지독한 통곡소리‘로 비유한 것도 그렇다. 마산으로 나온 것이 이 시인 20대 초반이었으니까 20년이 넘은 40대에 가본 고향은 桑田碧海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향 상실감이 그를 자조적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작품 「故鄕에 와서」 에서는 마지막 부분에 ’길을 걷다가 문득/고향의 遠景 속에 서 있는/나 자신을 바라보며/ 지금에 고향을 불러 볼 노래는 없지마는/이 변함없는 맑은 물소리‘라고 마무리 하면서 다소 여유를 찾고 있다. 누구나 고향에서는 상실감을 느끼겠지만 이 시인은 그 상실감이 컸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고향은 ’변함없는 맑은 물소리‘처럼 항상 그리운 곳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鄕關詞」에서는’고향 나무 밑에 서기조차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이제 그의 마지막 경향인 바다 시편을 한 작품 골라보겠다.
宇宙 안에 영원히 살아서
울부짖고 노래하는 것은
오직 저 바다뿐이다.
그것은 스스로 믿는
自由에서 충실하다
부서지고 흩어져도
언제나 한 몸 한 마음
全幅으로 가슴을 열어
㤠㤠히 갈망하고
누구도 알지 못할 엄청난 욕망
조용히 물결치며 사랑에 취하다가
한 번 怒하면 天地를 뒤집는
바다 그 무한의
自由의 生理 앞에
내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저 바다의 소리
그 自由의 몸부림이 있는 날까지
이 世上
노래도 꿈도 끝남이 없으리라.
-「바다, 그 자유 앞에서」 전문
고향에서 실망한 이석 시인이지만 ’바다‘에서는 다시 그의 사물에 대한 긍정적이고 의지적인 어조가 되살아난다. 이 시를 발표할 당시 어느 비평가가 월평에서 청마의 생명의지를 정돈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청마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으나 그는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다의 영원 불변성을 첫째 연에서 자유와 함께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는 노한 파도의 자유로운 생리 앞에서 시적화자 ’내‘ 즉 시인이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마지막 셋째 연에서는 그 자신의 세계관인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미래를 노래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경향의 바다 시편은 「바다에게서 나에게」와 「바다」 그리고「파도」 등이 있다. 그리고 한결 같이 남성적 어조를 가지고 있다.
4. 마무리
이석 시인의 시 세계는 그 제재가 꽃이나 자연, 그리고 역사적인 유물이나 장소 그리고 고향 등으로 변하여 왔다. 만년에는 바다에 집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적 특질은 우선 전통적인 자연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를 전통지향성의 시인이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남성적 어조로 일관한다. 이러한 특질은 그 자신의 유가적 집안 가풍인 유교적 전통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이고 긍정적 태도도 가지고 있다.
이석 시인은 1993년 2월 말 부산여자 대학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만년을 따님이 거주하는 논산에 머물다가 2000년 11월 9일 별세한 후 11월 11일 대전 을지병원에서 발인하여 함안 선영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가 청년 시절인 1948년부터 1965년까지 17년을 보냈던 마산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2010년에 산호공원에다 그의 초기작 「봉선화」를 새겨 시비를 세웠다.
그의 문단 생활은 마산 10년(1956-1965), 서울 16년(1965년-1981년), 그리고 마지막 부산에서 12년(1982년-1993년)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석 시인은 문단 생활 마지막을 부산에서 장식한 분이고 아무 연고 없이 부산에 내려와 부산 문단의 수장을 지낸 능력 있는 분이었다. 그는 1944년 의령군 유곡면이 고향인 남순기 여사와 결혼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들은 부산, 서울, 논산 등지에서 살고 있다.
<시인/ 부산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