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작성일 : 2022.01.09 07:38
역사 앞에서
/윤일현
새해 첫날 서가에서 책 몇 권을 뽑았다. 오늘을 성찰하며 내일의 길을 탐색해보기 위해서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 B.C)사’를 썼다. 그는 엄격한 비판 정신으로 전쟁의 발단과 전개 과정을 인과적으로 서술해 후세에 많은 교훈을 남겼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윤리학’은 지금까지도 서양 정치·철학 사상의 모태이자 젖줄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두 맹주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후 서로 이전투구, 대립·반목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다. 페르시아라는 거대 외부세력에 맞서 함께 삶의 터전을 지켜낸 그들이 이번에는 동지가 동지를 죽이고, 아비가 아들을 죽이며,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심지어 아녀자까지도 모조리 도륙해버리는 동족상잔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그리하여 전후 아테네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고 스파르타 역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전쟁의 와중에 일부 군소 폴리스는 아예 멸족했다. 이 비극적인 전쟁으로 찬란했던 그리스 고전기 문명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됐고 민주정치도 헬라스 땅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분열과 대립, 갈등과 반목이 국가와 민족에게 얼마나 파국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과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이 가장 먼저 발달한 곳은 소아시아(터키) 서해안에 있는 이오니아였다. 그리스본토 사람들이 이곳으로 건너와 식민도시를 세웠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를 비롯해 많은 철학자가 여기서 나온 이유가 있다. 이곳은 본토의 전통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상공업의 발달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 정치적으로도 자유로웠다. 또한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같은 찬란한 오리엔트 문명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오니아 철학이 가지고 있던 자연과학적 관심은 아테네에서는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됐다. 선구적 역할을 한 집단이 소피스트다. 그들은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 대신에 어떤 사상이나 윤리 기준도 불완전하다는 전제하에 세계가 가지는 상대적 진리에 관심을 가졌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를 극복하려고 애썼다. 그는 인간을 독자적인 절대가치를 지닌 존재로 봤고,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선의 관념을 역설하며 지행합일을 주장했다. 그는 신을 모독하고 민중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사약을 마셨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스승의 처형을 지켜보며 아테네의 도덕과 정치가 깊이 타락해 위기가 반복되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는 정치 참여를 거부했고 모든 면에서 도덕적 환골탈태 없이는 아테네가 구제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습과 전통, 권력의 논리로는 ‘정의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편타당한 원리와 개인의 도덕적 토대 위에서만 정의로운 국가 설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가는 지혜와 덕망을 갖춘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고 역설했다. 플라톤은 민중이 정치적 결정권을 가지는 중우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가장 현명한 자인 철학자가 아테네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을 계승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정치에 무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개인의 훌륭한 삶은 개인이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읽던 책을 잠시 덮고 우리 정치 현실을 바라본다. 우리 정치인들은 같은 사안을 두고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수시로 말을 바꾼다. 소피스트는 대중이 혹할 수밖에 없는 정교한 논리라도 가졌지만, 우리 정치인은 세련된 논리도 없다. 여야 후보와 소속 정당은 국민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의 정치적 반응도 시시각각 변화무쌍하다. 유튜브 같은 매체는 쓸모없는 정치적 가십과 선정적 내용으로 극단적 사고와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신문방송조차도 편파적인 보도를 일삼고 있다. 선거판에 뛰어든 학자와 책사들 또한 수준 이하의 식견으로 국민을 실망하게 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 중우정치를 비판하며 윤리적, 도덕적 자질을 갖춘 철학자의 통치를 주장한 플라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국민이 정신 차려 공부하고 깨우쳐 나라를 구하란 말인가. 오늘이 하도 답답하니 희망을 주는 정치를 간절히 소망하며 새해 벽두 고전을 펼쳐보는 것이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