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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9.02 11:33
싸움의 기술⑱ - 웃는 자의 슬픔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은 가장 나쁜 징조입니다. 페르소나의 위기가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를 돌이켜 보면 50대 초중반쯤부터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습니다. 상대하는 것들이 하품 인간들 일색이었을 때였습니다. 다시 제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은 그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고서였습니다. 아마 7,8년 걸렸을 겁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아마 그 '얼굴의 웃음기'일 것입니다. 마치 승자의 여유나 되는 것처럼 성공한 정치인들은 늘 얼굴의 웃음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어느 날부터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한두 사람의 예외가 있겠습니다만(쿠테타로 집권하거나 누구의 후광으로 입신한 사람) 대체로 그런 '얼굴의 웃음기 신호로 보는 정치인의 성공과 실패'는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는 것과 언제나 상대를 존중한다는 친밀감을 '얼굴의 웃음기'가 드러냅니다. 저는 그것이 인간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가 아닌가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포괄적 긍정의 태도'가 그렇게 나타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생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누구를 만나든 환하게 웃으며 사람을 맞이하던 분을 한 사람 알고 있습니다. 생전에 적도 많았지만 물불 안 가리고 충성을 다하는 추종자들도 많아서 한 평생 인복(人福)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은사 벌 선생님인데 얼굴 표정이 늘 어두웠던 분도 있습니다. 하시는 일에 조예가 깊고 이것저것 관심있는 방면에서 노력도 남달리 하시던 분이었는데 말년이 쓸쓸했습니다. 곁에 사람이 남아있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년에는 표정이 더 어두웠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이 어려서부터 생성되지 않았던 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은 왜 그래?"라고 이유를 따질 수 없습니다. 누군들 순정이 없고, 누군들 곡절이 없겠습니까? 그저 얼굴에 나타난 결과만 보는 게 맞습니다. 남녀 불문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언제나 따듯한 얼굴로 사람을 맞이합니다. 그 얼굴 하나로 그들은 인생의 시작과 끝을 아름답게 장식합니다. 성공에 필요한 나머지 조건들도 그 얼굴에 많이 의지합니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는 속담은 만고(萬古)의 명언입니다. 그 말씀이 단순히 ‘위기를 면하는 처세술’ 정도의 뜻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겠습니다.
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쓴 책에서 명사화의 오류, 명사적 사고, 동사적 사고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따뜻하게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명사적 사고에 함몰되지 않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늘 변화하는 삶을 승인하지 않고서는 그런 얼굴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을 미리 몇 개의 카테고리 안에 두고 판단해 버리는 명사적 사고 안에서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매번 ‘웃는 낯’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교언영색(巧言令色)’도 개중에는 당연히 있지요.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교언영색을 일삼는 자들은 잠깐은 그들 ‘동사적 사고’를 몸소 실천하는 이들과 혼동될 수 있지만, 영구적으로 남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본색(本色)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알면서도 속아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요. 분야마다, 업장(業場)마다, 본색이 드러나는 시간이 좀 다릅니다. 사람 됨됨이를 분명히 아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되는가? "학교와 같은 직장에서는 신입생이 입학에서 졸업할 때까지의 시간(중등은 3년, 대학은 4년),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는 10년 세월(강산도 변한다는), 치고박는 격투기 수련장에서는 더도 덜도 말고 3개월, 은근 자기를 다 드러내는 페이스북에서는 댓글 한 마디 다는 시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교언영색은 그 시간 안에 다 밝혀집니다. 그 이상 숨길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교언영색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의 웃는 낯은 당연히, 당당히, ‘성공하는 자의 습관’에 해당됩니다.
아마 젊어서 그런 치기(稚氣)가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공부를 무슨 공짜밥을 벌고 주색(酒色)을 끌어들이는, ‘생활의 기술’ 정도로 여기는 친구를 보고 대놓고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공부는 ‘생활의 기술’이 아니라 ‘싸움의 기술’이 되어야 한다는 명사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늙어서, 싫든 좋든 매번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하지 못했던 것이 큰 후회가 됩니다. 요즘은 주위의 젊은이들(4~50대)에게 틈날 때마다 누누이 강조합니다. 차 떼고 포 떼고, 다 떼어내고는 장기를 둘 수 없다고요. 이기는 장기도 지는 장기도 다 소중한 장기판이라고요. 비록 교언영색이라도, 내 옆에 ‘웃는 낯’ 하나를 붙들어 매어 두는 게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 그 간단한 ‘생활의 기술’, 아니 ‘싸움의 기술’ 하나를 아는데 평생이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