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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8.26 01:01 수정일 : 2024.08.26 01:06
양왕용의 부산문학의 어제와 오늘<부문1-4>
섬에서 고향 그리워하며 산 시인
-한찬식 시인의 삶과 작품세계
(1) 들어가며
한찬식(1921-1977) 시인과 필자와의 첫 만남은 필자가 대구에서 부산으로 내려 온 첫 해 경남중학교 교사 시절인 1969년 중고등학생 백일장 심사 자리에서였다. 그 당시 한참 3부두에서 월남 파병 용사들의 환송식이 거행되었는데 그에 관련된 백일장 심사를 같이 하였던 것으로 기억되니 벌써 53년 전이다. 그런 후에 부산문협 행사나 1974년 부산시인협회가 발족하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한 시인은 그 당시 영도의 대양중학교 미술교사이면서 문협 시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첫 시집이자 생전의 유일한 시집 『낙엽일기』(1974)를 친지들의 도움으로 발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시인은 중앙동에 있는 해기사협회 기관지 월간 《해기海技》에 「문학에 비쳐진 바다」라는 산문을 연재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동안 경남중학교, 부산진중학교를 거쳐 73년부터 부산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1975년 4월에 제1시집 『갈라지는 바다』를 내었다. 물론 그 시집을 한 시인에게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시인으로부터 필자의 시집에 있는 작품을 《해기》에 언급하여 책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필자의 시집에 대한 맨 처음 글이라 신기하여 달려갔다. 책을 보고 저녁을 같이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작품을 인용하여 글을 썼는지는 그 동안 기억이 희미했으나 이번 이 글을 쓰면서 한 시인의 전집을 찾아보니 한 호 전체의 분량으로 「어떤 정박碇泊」과 「바다」의 전문을 인용하고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한 시인은 평소에는 과묵하고 중후한 인품 때문에 연세가 많을 것이라 짐작하였으나 그의 약력을 자세하게 살피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 부산 시단은 박노석(1913-1995)시인이 가장 어르신이셨으며, 해방 직후부터 작품 활동을 한 몇몇 시인들이 당연히 연세가 많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들보다 한 시인이 비록 1958-59년 《자유문학》을 통해 양명문楊明文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21년 생으로 가장 연장자에 속했다. 약력과 한 시인의 시집 후기를 살펴본 결과 그는 1958년 30대 후반의 나이로 그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30대 초반까지 그림에 열중하다가 사적인 사정으로 시로 전환했다고 그 자신이 첫 시집 『낙엽일기』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형기(1933-2005) 시인이 유고집 서문인 「책 머리에」에서 부산 시단의 장로라고 한 점은 바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왜 미술을 하다가 시 쓰기를 결심하게 되었는가는 나중에 작품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심층적으로 살펴보겠다.
1921년이라는 출생연도는 1997년 돌아가신 필자의 아버님보다 한 살 아래이고 2004년에 돌아가신 필자의 은사이신 김춘수 시인보다는 한 살 많은 나이이다. 그렇다면 1969년 당시 시단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던 부산의 현역시인 가운데는 실질적인 연장자였으니 27세(1943년)인 필자로서는 아버지뻘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냥 막내 삼촌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한 시인에게는 실례 아닌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2) 한찬식 시인의 생애
한찬식 시인은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이어서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1919.4.13.)되어 해외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국내에는 사이또 총독의 유화정책이 시작되어 조선일보(1920.3.5 창간)와 동아일보(1920.4.1 창간)가 발간되는 등 본격적으로 일제가 그 야욕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21년 2월 1일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죽리 795번지에서 아버지 청주 韓 씨 유원 선생과 어머니 전주 李 씨 원재 여사 사이에 7남매의 막내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한 시인의 수필 「어머니의 손」에 의하면 위로 누나들이 여럿 있고 여섯 살 위에 형이 하나 있었으나 함흥 학생사건에 연류되어 감옥살이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죽어 사실상 외동이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만주와 러시아 국경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관여하시는 아버지와 아버지 대신 농사를 주도하시던 어머니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집안은 대지주였으며 명태잡이 어선도 몇 척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어머니는 16세에 시집을 와 36세에 막내인 한 시인을 출산하였고 독립운동과 사업으로 농사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남편 대신 대지주 집안의 농사일을 주도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일을 비롯한 집안일까지 억척스럽게 하는 그야말로 함경도 또순이였다.
한 시인의 고향 함주군은 일제강점기부터 도청소재지인 함흥시와 공업도시로 유명한 흥남시를 둘러싸고 있는 말하자면 도시의 근교 군이었다. 서쪽의 낭림산맥과 북쪽의 부전령산맥이 뻗어내려 산간지대였으나 성천강이 군내에서 동해로 흘러내려 그 유역과 함흥만 쪽의 해안지대는 평탄하여 함흥평야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행정 구역은 변함이 없으며 인구는 2008년 추정 13만 3,896명으로 나와 있다.
한 시인의 출신 면인 상기천면은 함흥시 서북쪽의 주북면 다음 면으로 군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부는 산지와 구릉지대로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성천강이 면의 동부에서 남류하다가 면 소재인 오로리에서 지류인 흑림강과 합류하여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제재소와 벽돌 공장 등이 있었고, 면소재지 오로리는 동해 쪽 함흥과 흥남으로 가는 산업철도 함남선과 함주군 북쪽 신흥군으로 가는 순흥선, 장전선 등의 분기점이었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본래는 함흥군 지역으로 1931년 함흥부제 실시에 따라 함주군으로 편입되었다. 말하자면 한 시인이 태어났을 때에는 함흥군이었지만 성장기는 함주군이라고 볼 수 있다. 유명한 부전강, 장전강 수력발전소와 흥남 공업지 등을 근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근대 문물이 유입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한 시인이 중학교를 다니던 1930년대 후반부터 45년 해방될 때까지 면소재지에 유일한 초등학교가 있었고, 그는 그 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시에 있는 함남공립중학교에 입학하여 새벽밥을 먹고 어머니와 둘째 누님이 싸주는 도시락을 가지고 통학을 했다. 그가 졸업한 함남중학교는 함경남도에서 가장 명문이고 역사가 오래된 학교였다. 1909년 두 개의 사립학교를 통합하여 함남고등학교로 개교하였고, 1918년 함흥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한 시인이 다니고 있던 1938년 조선교육령의 개편으로 5년제 함남공립중학교로 다시 개칭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유복한 가정 형편과 지리적 여건 때문에 함경남도 제일의 명문 함흥고보 출신으로 1940년 졸업을 하게 된다. 한 시인은 재학 중 연극단을 만들어 활동하면서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였고 제2외국어인 중국어도 능통하였으며 그 당시 이미 영어, 중국어, 일본어 실력이 출중하였다. 그의 졸업과 동시 일본 유학을 떠났다. 부모의 허락을 받기위해 명치대학 전문부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그는 그림 그리기에 더 관심이 많아 동경의 大森繪畵硏究院의 1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학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학비는 꼬박꼬박 부쳐왔으나 같이 유학하는 장조카 즉 큰 누님의 큰 아들이 중간에 유용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여 결국 병을 얻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명치학원 전문부 3학년 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된다. 해방 전인 1943년 귀국할 때에는 병까지 들었으나 1년 후 완치 하였으며 1946년에는 부모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그는 유학시절 방학 때마다 관부연락선으로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와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을 오고 갔다. 그 때부터 부산의 바다 풍광에 매료되었다고 그의 수필에서 언급하고 있다. 월남 후에도 12월만 되면, 눈에 덮혀 오히려 포근한 고향 생각이 난다고 수필 「고향의 눈길」에서 밝히고 있다. 특히 겨울방학 때면 기차로 강원도의 눈산을 누벼 고향에 갔던 기억도 술회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는 그가 영도에서 구덕산을 바라보며 향수에 잠긴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영도라는 섬의 위치에서 구덕산을 바라보면 희뿌연 눈이 덮히는 그것이 내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역시 내 자신이 눈의 고장에서 태어난 까닭이 아닐까?
한 시인은 언제 월남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대지주라는 신분 때문에 공산 치하에서 견디지 못해 6·25 전쟁 전인 것은 확실하다. 6·25 때 UN군 및 한국 문관으로 중동부 전선에 종군하였으며 종군 후에는 피난민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와 영도 청학동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도움을 준 사람은 동아일보 논설주간을 지낸 언론인이자 단편 소설 「바비도」로 제1회 동인문학상(1956년)을 수상한 그의 고등학교 선배 김성한(1919-2010) 작가였다고 한다. 한 시인은 일본에서 1년 배운 그림을 전공으로 부산의 송도에 있던 피난학교인 함남고교에서 1957년 교편생활을 시작하여 1959년에는 영도의 대양중학교로 옮겨 중간에 6년간의 장기 휴직기간이 있었으나 작고하기 직전인 1976년까지 미술교사로 근무한다. 말하자면 미술교사는 그의 생업이 되었다.
한 시인의 일생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2남 5녀라는 많은 자녀의 생계와 교육 때문에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인도 생활전선에 나섰다. 부인의 사업 번창으로 안정을 얻는듯하였으나 두 사람은 의견 대립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다. 그 동안 큰 아들은 지병으로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도 척주를 다쳐 오랫동안 고생했다. 이 둘째 아들을 고치기 위하여 한 시인은 대양중학교 미술교사를 장기간 휴직하면서 아들 간병에 힘써 3년 만에 완치시켰다 .그리고 한 시인의 간병과 치료사례는 부산대학병원의 부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혼 후 재혼을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본 부인의 경제적 도움이 중단되고 자녀의 결혼 등으로 경제적인 타격으로 당뇨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녀들은 모두 잘 자랐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서울과 미국, 부산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둘째 아들은 장교로 근무 후 서울에서 교직에 종사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맏이인 큰 딸 한남숙 여사는 한 시인의 유고집과 전집 발간, 그리고 한 시인의 시비 세우는 데에 큰 역할을 했으며 수필가로 아버지의 글 쓰는 자질을 이어 받았다.
그는 7남매의 막내아들로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한남숙 여사의 회고(유고시집 『다시 섬에서』의 후기)에 의하면 그의 초등학교 시절까지 한 시인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라는 노래를 자주 흥얼거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찍 죽은 큰 아들도 그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신산한 삶으로 그는 술을 좋아하게 되었고, 1968년에는 당뇨병까지 발병하여 결국 1977년 3월13일 5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 화가에서 시인으로 전환한 까닭
한 시인 자신은 개인적 사정으로 시인이 되었다고 간단히 술회 하고 있지만, 그 자신을 일찍부터 곁에서 지켜보고 그의 시집 『낙엽일기』(1974년 연문출판사) 발간의 계기를 만들어준 그 당시 월간 《해기》 편집장이고 어린 시절부터 한 시인과 인연이 있었던 조연로 시인에 의하면 그 자신은 선비정신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화가보다는 시인이 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는 시단에 데뷔하기 전부터 부산지역 동인 활동을 열심히 했다. 1956년에는 《운석隕石》이라는 동인지의 책임편집을 맡아 5집까지 발간하였다. 그 자신 직접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 때의 동인들은 한 시인을 비롯한 이성환, 정상옥, 추영수, 강경(필명;강상구), 정혜옥, 손서영, 류창렬 등이었다. 1957년에는 이석, 남윤철, 박철석, 박돈목, 강경 등과 함께 《시영토》 동인으로 참여했다.
한 시인이 드디어 정식으로 시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 당시 《현대문학》과 함께 양대 문학 월간지였던 자유문학자협회의 기관지인 《자유문학》에 양명문楊明文(1913-1985)시인의 추천으로 「섭리攝理」(1958년 8월호), 「하류下流」(1958년 12월호),「물무늬」(1959년 8월호) 등 만 1년 동안에 3회 추천완료 되어 시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39세였으니 당시로는 늦게 데뷔하였다. 그 당시 한 시인 나이 또래들의 시인들은 정식으로 시단에 데뷔하기 전의 동인 활동과 개인 시집을 인정받아 추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시인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굳이 한 시인은 추천완료의 과정을 거친 점에서 그의 진지하고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가 그림보다도 시로 전환한지 7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시집 『낙엽일기』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본래 30을 갓 넘을 즘까지 그림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사적 사정에 의하여 시로 전환해 버렸다. 회화나 시의 생성과정은 거의 동일하다고 지론持論하는 나는 거칠기는 하였지만 우리의 언어를 어느 정도 다듬어 추천이라는 제도 속에 말려들게 된 것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어느 해였다. 이러한 작업을 무엇 때문에 지속했느냐고 물으면 여러 가지 답변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내적 관조나 내적 생활의 충실이 나에게는 중요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작품의 완성을 의심하고 있으며 나의 작품을 미완성이라고 믿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전혀 틀린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심정이 없고서는 과거는 파괴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새로운 조형 내지는 변모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여러 번의 변모 과정을 지녔으며 또 그것이 더 유익한 점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우선 이 글은 오늘 날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종을 울리는 글이라 볼 수 있겠다. 그는 미술 특히 회화라는 그 창작 과정이 시와 유사한 예술에 종사하였지만 7년이라는 각고의 노력으로 시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 되겠다. 그리고 그의 미술이라는 조형 예술에서 시작으로의 전환의 원인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즉, 시각적이고 조형적인 회화보다 내적 관조나 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시를 택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몇 점 안되는 회화를 보면 추상적인 작품이 많다. 말하자면 구상적인 이미지보다 추상적 이미지에서 미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추상적 회화작업으로 그 자신의 내면세계를 형상화 하는 것보다 시를 통하여 형상화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지속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여기서 그의 1회 추천작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처음 열린 그날부터
한결 투명한 因習이었으니
하늘은 그저 빈 空間은 아니었다.
종이 한 장의 땅 위에
온갖 것을 휘둘러 놓고
제풀에 앓아 우는 狂人을 달래어
아무 일도 없었다.
풋풋한 太陽의 아침이 있게 하였다
별의 먼 距離가 삶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얼마나 숱한 가슴이 열려갔던가.
-「攝理」 1,2,,3연(《자유문학》 1958,8)
이 시는 대단히 관념적이다. 시적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하늘이다. 그러나, 하늘의 구체적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다만 하늘은 그저 빈 공간이 아니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양명문 시인은 추천사에서 ‘작가의 우주관이 어떤 안정된 자기 자세를 가지고 있는 점에 호의를 가졌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관념의 형상화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하늘’, ‘태양’, ‘별’ 등인 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관념적 상상력은 사물에 대하여 미세하고 여성적인 어조로 접근하는 서정적 상상력보다 훨씬 대륙적이고 남성적 어조와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인 자신의 삶이나 실향민 의식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두 권의 시집 속표지로 꾸며져 있는 그의 회화 두 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회화는 추상화이면서 어떤 움직임과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역동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동적 상상력의 언어화가 그가 추구하는 시적 세계였다. 따라서 그의 시작 경향은 일단 모더니즘 지향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우주적 상상력을 그는 시와 회화 두 장르의 예술에서 보여주고 있다. 다른 추천작 「하류」,「물무늬」는 다소 구체적 상황이나 정경이 등장하나, 역시 추상성과 관념성은 그의 후기 시까지 지속되는 특성이다.
한 시인은 데뷔 후에도 부산 지역의 동인 활동에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1959년 11월에는 《서정시》 동인, 심지어 차남 간병을 위한 대양중학교 장기 휴직 기간인 1960년대 초반에도 《시기》(1962년), 《계간 시문예》(1964년) 등에 관계하였고, 특히 부산 시인들이 망라된 《신어》(1965년)의 경우는 편집위원으로 표지를 그리기도 했다. 물론 이들 동인지는 그 당시의 출판 사정이나 동인들의 재정적 여건 때문에 오늘날처럼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4) 일상의 고통과 고향 상실감의 극복
한찬식 시인의 시집 발간에 대해서 앞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했습니다마는 다시 한 번
정리하겠다. 제1시집 『낙엽일기』(1974,연문출판사) , 한찬식 유고시집 『다시 섬에서』(1978,시문학사), 그리고 『한찬식 전집』(1999,빛남) 이렇게 3권이다. 한남숙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살아생전 3 권의 시집을 가지기를 소망하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부산 시인들과 유가족의 노력으로 3권의 시집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작품을 창작한 순서대로 하면 유고집에 수록된 작품이 먼저 창작된 작품이고 제 1시집의 경우 비록 초회 추천작 「攝理」가 수록되어 있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뒤에 창작되었다. 그 까닭을 역시 한남숙 여사가 유고집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첫 시집을 내기 위하여 모 시인에게 원고를 맡겼는데 여러 사정으로 그것을 찾을 수가 없어 『낙엽일기』를 먼저 엮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족들이 그 맡긴 원고를 백방으로 노력하여 찾아 그 원고와 함께 한 시인 사후 수습된 몇 작품과 수필을 첨가하여 유고 시집을 내었다. 전집은 그의 두 시집에 수록된 시와 산문, 그리고 새로 찾은 시 9편과 산문, 다른 문인들이 쓴 한찬식 시인론과 인간론, 추모 시와 추모 산문들이 망라되어 있다. 아마 초회 추천작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가 제1시집에 실었고 2회, 3회 추천작은 구할 수 없다가 찾은 원고 속에 있었으므로 유고시집에 수록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한찬식 시인의 시 세계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유고 시집, 제1시집 순서로 살펴보겠다.
바닥 위에 椅子가 잇다
椅子 위에 내가 있다
내 위에 天井이 있다.
休息이란 없는 것일까
多事로운 작업의 구석진 자리에서
빈 손으로 앉아 있어도
잠들기는 어렵다.
삶과 그 方法의 갈림길에서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고
意志만이 밀려온 이제
窓밖을 응시하는 버릇을 나도 모른다.
이 엄청난 歲月에 태어나
日蝕 같은 月蝕 같은
生理는 어쩌다 한 번 있었을 뿐
그것은 무서운 熱病이었지만
그로부터 긴 時間을 한결같이
세상의 아픔을 견디다
意志와 虛心 사이를 방황하며
노을과 이야기 하고
바람에 귀를 기울인다.
椅子는 天井이 무거워
바닥에 자꾸 가라앉는다.
-「椅子의자」 전문
이 작품은 그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쉽게 접근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물론 쉽다고 해서 경박하다는 것은 아니다. 시적화자 즉, 시인 자신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시는 시작된다. 그런데 그 자신 위에는 천정이 있다. 이렇게 단출한 공간적 설정이라도 사물들은 각기 관념을 내포할 것 같은 조짐을 첫 연에서 보여주고 있다. 둘째 연에서는 구석진 자리에 그냥 빈손으로 앉아 있어도 잠들기가 어렵다고 진술한다. 그 원인은 밝히지 않고 있으나 다사로운 작업 즉. 그 자신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로 인하여 잠들지 못한다. 셋째 연에는 민족분단과 그로 인한 월남 즉,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삶이었지만 오직 그래도 살고 싶은 의지로 창밖을 응시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넷째 연에서는 현실에 대한 상황의식이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엄청난 세월은 그가 해방 직후 가족들과 헤어져 월남하여 영도라는 섬에 정착한 실향민의 고통을 추상화 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식이나 월식을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알 수 없으나 가족을 북에 두고 특히 7남매의 막내 외아들로서의 고향이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오는 고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월남한 이후의 많은 자녀들을 부양하는 생활고에서 자신의 꿈이나 희망이 좌절된 것을 노을과 바람과의 대화로 극복한다.
마지막 연은 의자와 천정을 등장시켜 생활에서의 중압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인식 태도를 일상의 고통을 관념화하면서 그것을 극복한 방편으로 시작을 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다음의 작품은 또 다른 방법으로 일상의 고통을 극복한다.
詩人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곁에서 어쩔 바를 몰랐다.
커다란 회색 外航船이 닿더니
중간쯤에 船腹문이 열렸다
그제야 놀란 나의 부르짖음
그러나 浦口를 흔드는 汽笛에 지워지고
그는 甲板에도 나타나지 낳았다.
거리를 헤매는 人間 그리움
나의 꽃들의 미움도
150마일의 아우성도
이제는 몸에 배여
길바닥에 떨어지는 부희연 視線.
海路는 벌써 水平線을 넘는데
詩人은 번뜩이는 고기떼도 무관한 듯
어쩌다 생각나는 먼 無人島.
渴望의 내일이 오늘일 것이라
나의 좁은 뜨락을 스치며
낯익은 候鳥는 울고 있었다
그저 커지는 사람들의 눈망울 .
몇 해를 지나도 뱃길은 끝이 없어
이역 海岸을 저만치 두고서도
詩人에겐 모두가 不信의 씨앗
그는 그렇게 지쳐 있었던가.
詩人은 바다로 가고 나는
붐비는 人波 속에서
무언가 자꾸 잃는 것이 있다.
-「詩人과 나」 전문
이 시에서 ‘詩人’과 ‘나’는 외연적 의미는 동일인이 아니다. 시적화자는 얼핏 보면 ‘나’이고 그 곁에 ‘시인’이 관찰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 외연적 의미를 따라 해석해보면 바다를 바라보는 시인 곁에 내가 있었는데 그를 붙잡고자 가진 노력을 했으나 그는 갑자기 외항선을 타고 떠나고 나는 그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적화자 ‘나’의 시점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즉, 나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인의 입장에서 사물에 대한 거리나 태도를 진술하기도 하고 심지어 시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필자는 ‘시인’과 ‘나’를 동일인으로 보고자 한다. ‘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세계를 좋아하고 부딪치기도 한다. 즉, 생활인으로서의 ‘나’이다. 그에 반하여 ‘시인’은 배 속에서도 고기떼에는 관심이 없고 아무런 관습과 세속적 욕망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고통도 없는 무인도 달리 말하면 유토피아를 생각한다. 따라서 좋은 시를 창작하고자 하는 시적 자아이다.
생활 속의 ‘나’는 셋째 연처럼 인간을 그리워하고 꽂 즉, 딸들에 대한 사랑이나 아내의 미움 같은 가족사적 생각이나 실향민으로서 150마일의 휴전선에서 오는 분단의 고통, 달리 말하면 실향의식은 일상이 되었다. 이상으로 볼 때 마지막 연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으로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시적 자아는 먼 바다로 떠나 해로를 헤매면서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을 원망하고 있는데 현실적 자아인 나는 붐비는 인파 속에서 무언가를 자꾸 잃어 간다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생활인으로서의 한 시인과 시인으로서의 한 시인 사이의 갈등을 표출하고 극복하는 방편으로 먼 바다로의 항해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바다에의 동경은 그의 후기 시집인 『낙엽일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5) 바다, 고통과 슬픔으로부터의 해방
한찬식 시인은 부산에 정착한 1956년부터 197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진조선(옛날에는 조선공사) 건너편 산기슭 영도구 청학동 391번지를 떠나지 않고 살았다. 필자의 숙부 댁이 청학동 125번지 파출소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1969년 대구에서 부산에 내려왔을 때부터 숙부 댁이 1980년대 초 구서동 주공아파트(현재의 롯대 캐슬 단지)로 이사하기 전까지 가족들과 자주 갔다. 한 시인의 댁은 문상 때 갔던 기억이 난다.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숙부님 댁을 갈 때마다 한진조선 앞을 지나면 한 시인이 생각나곤 했다. 요즈음의 청학동 도로변에는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 때에는 높은 지대의 주택에서는 어디서든지 바다가 보였다. 한 시인은 이렇게 바다를 보며 함흥만의 고향 바다를 생각했을 것이며, 일본 유학시절 부산에서 북상하여 함흥까지 가는 기차의 차창 밖 바다 풍경을 회상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잠간 필자의 작품을 언급한 한 시인의 산문에 대하여 소개한 바 있지만, 그의 생애에서 가장 긴 산문은 월간 《해기》 1974년 8월호부터 1975년 7월호까지 연재한 「문학 속에 비쳐진 바다」이다. 1년 동안이지만 11회에 걸쳐 연재된 글로 그의 전집 257페이지부터 300페이지까지에 수습되어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재하면서도 그 자신의 시에 대해서는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당시의 신인인 필자의 작품은 언급하면서도, 한 시인 자신의 작품을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한 시인의 결백성에 가까운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 가운데는 바다에 관련된 작품들이 많으며 그것들은 『낙엽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모든 고집은
멀리 떨어진 섬
水平線 위에 조용히 잠들라
술렁이는 파도에도
神祕는 남아 있지 않다.
천 길 바닥에 깔린
자연의 重力은
젊음의 죽음조차 抽象化하는 것
광활한 裏面에는
피의 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의 旗를 펄럭이며
배들은 出陣을 거듭하지만
거기에선 끝내
都市를 못 이루고
산과 벌판에 풍기는
동물성 향수를 그려
한 떨기 등불 밑에 寄港하고선
죽기로 몸부림치는 마지막 경계선.
그런 대로 날이 새면
흩어진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막연히 더 살아보는 것은
바다의 天稟만을 따르는
神의 啓示와
태초 지닌 소량의 鹽分이
저마다의 혈관에 아직은 남아
겨우 썩지 않는 까닭이리라.
분명 있었을 옛 故鄕
그 향기마저 지금은 아득하니
손가락 짬을 새어
빠져내리는 모래 가루로
어릴 적의 城壁을 쌓아 보지만
보다 격한 海溢의 기억도 무너지며
영영 더듬을 길이 없는
나의 方向이여.
-「海岸線」 전문
이 작품은 앞에서 인용한 작품들보다 관념성과 그에 따른 추상성이 농후하다. 시적화자는 작품 밖에서 ‘해안선’을 묘사하거나 서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적 인식의 대상이 분명하지도 않다. 어떻게 보면 해안선을 의인화한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배를 타고 출향한 어부들의 귀항을 추상화 한 것 같다. 필자는 출항한 어부들의 귀항보다 해안선을 시적사유의 대상으로 했다고 보고 싶다. 물론 그 해안선에는 귀항한 어부들의 삶이 있고 그에 따른 파시波市에 얽힌 애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해안선을 인식하는 보조 관념으로 사용되어 해안선을 훨씬 다이나믹하게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시를 해석해 보겠다. 우선 1 연에서 시인은 해안선을 결코 신비의 대상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2 연에서는 해안선을 신비화하지도 않고 어부들의 삶에서 나오는 비정함 같은 것과도 거리를 둔다. 즉, 해안선에서 바라보는 바다에서 죽은 젊은이의 피자국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해안선에서의 사람들의 삶이 더욱 비정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점 역시 추상화 되어 감동적이기 보다 진지함만 보인다. 3 연에서는 어부들의 출어와 만선에의 기대감 같은 것이 다소 추상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해안선을 죽기로 하고 몸부림치는 마지막 경계선으로 비유하고 있다. 4 연에서는 해안선의 생명력을 추상화하고 있다. 해안선 자체나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강인한 삶은 해안선에 있는 염분이나 사람들의 혈관에 남아 있는 염분 때문에 의지가 썩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해안선’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강인한 삶의 의지를 추상적으로 형상화 한부분이 1 연부터 4 연까지 시적 의미이다. 그런데 마지막 5 연에 갑자기 한 시인 자신의 옛 고향 함흥 앞바다가 추상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앞 바다에서 모랫성 쌓던 기억도 상기시키며 그것뿐만 아니라 강력한 해일의 기억도 망각하였다는 고향 상실감과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 상실감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물에 대한 추상성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인함까지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바다를 통한 고통의 해방이라고 보고 싶다.
말하자면 한 시인에게는 바다가 구원인 것이다. 다음의 작품은 굳이 중의적인 해석을 하지 않아도 그 자신의 초기작에서 보인 우주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목메인 설레임도
멀리서 바라보면
저리도 평온한 것.
充血한 눈망울은
너를 따라 움직이지 않고
지금은 스스로의 過剩이 아니라
그저 스쳐 가는 바람이 아닐까.
시름은 바다의 깊이에 묻고
내일도 오늘이듯
面과 線의 계산법을
잃게 하는
영원한 우주의 부피여.
-「수평선」 전문
연작시이면서 형태적으로 산문시이고 그의 만년의 작품이라고 짐작되는 바다를 제재로 한 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호랑이 구렁이 늑대 앞에 부끄러워라. 부끄러움을
가리우는 치마폭같이 밤바다는 있어야 한다. 저물은 물결은 廣義의 불길을 더
불어 살아 온 가슴 언저리. 먼 물 구비에 서러움은 감출 수 있어, 외마디 고동
이 재 너머를 울리고 사라지면 꼭이 있어야 할 우리들의 밤. 서로가 눈을 감
으면 나는 너의 처참을 본 일이 없고 너는 나의 단말마의 눈매를 느끼지 않아
비로소 숨막히게 포옹이 이루어지는 內港의 密度이고보면 어둠 속으로 원래
의 줄기찬 마음은 倒影지으며 가슴 풀어 흔들리다 희미하나마 한 가닥 등불 쪽
으로 돌아눕는 것은 오직 너와 나에게 남은 바다의 출렁임.
-「바다에 關한 覺書<Ⅱ>」 둘째 연
이 시는 동일 제목의 연작시 세 편 가운데 두 번 째 작품입니다. 이 연작시들은 제1시집 『낙엽일기』 마지막 부분에 편집되어 있다. 지금까지 주된 경향인 절제된 시어와 행과 연 구분의식이 사라진 산문시 형태를 택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보면 그의 시적 긴장이 무너진 것도 같은 작품이다. 인용된 부분에도 그렇지만 반복과 열거가 빈번해지는 점은 세 편의 공동적인 특색이다. 뿐만 아니라 감정이 이입된 어조를 가지고 있다. 인용된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호랑이 구렁이 늑대 앞에 부끄러워라’처럼 각 연의 도입부에 감정이 노출된 부분이 많습니다. 이 작품의 경우 인용되지 않은 첫째 연은 현실에 대한 문명비판적인 태도가 노골적이며, 마지막 셋째 연은 그 당시 영도 해안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었던 해녀의 신산한 삶이 등장하지만 필자가 둘째 연을 주목한 것은 이러한 삶을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하여 빚어진 부끄러운 현실로 인식하고 그것을 감추어 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바다, 특히 밤바다로 인식하고 있는 한 시인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발견되는 지금까지 그의 시에서 전혀 발견하기 힘든 다소 에로티시즘적인 부분이 등장하여 시의 재미를 더하여 주고 있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밤바다’는 ‘먼 물굽이의 서러움’과 시적 청자 ‘너’의 ‘처참’과 화자 ‘나’의 ‘단말마의 눈매’를 감추어 주는 존재인 동시에 ‘너와 나에게 남은 밤바다의 출렁거림‘은 절망적인 현실에서 잊을 수 있는 에로티시즘적인 위안이기도 한다. 이렇게 그에게 밤바다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감추어주고 위안을 가져다주는 사물이었다.
지금까지 살핀 바다 시편은 일관되게 그의 일상에서의 고통과 슬픔, 실향민으로서의 애한을 잊게 해주고 있다. 따라서 한 시인에게 시작 행위는 그가 제1시집 『낙엽일기』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사물의 현상보다 내부 구조의 형상화인 동시에 그의 신산한 삶을 내적으로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바다 시 연작에서는 앞으로 훨씬 역동적 이미지로 독자를 감동시킬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57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시를 버리고 세상을 떠났다.
(7) 마무리
한찬식 시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다정다감한 인품 때문에 그의 문우들과 유족들에 의하여 사후에 2권의 시집이 엮어졌고, 1999년 11월 15일 영도 구청에서 해양대학교 가는 길목에 있는 미니 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의 형태는 기단석 위에 자연석으로 된 비신이 있고 비신에는 오석 두 장을 붙여 왼 쪽에는 시인의 약력과 시 세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비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여 친하였던 시인이자 비평가이며 최근에 고인이 된 박철석(1930-2016) 동아대 명예교수가 썼다. 오른 쪽에는 박 교수가 시인론에서 대표작이라 언급한 시 『늪』을 새겼다. 높이 240cm, 너비 200cm로 그의 신산한 삶을 압도하듯 웅장하게 서 있다. 시비의 설립 주체는 부산시인협회이고 영도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재정적 부담은 큰 따님 한남숙 여사가 주도한 그의 자녀들이 했고, 시비 제막식에 참석한 문인들은 자녀들의 따뜻한 대접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시인/ 부산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