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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1.03 12:14
대가야제국의 부활(29)
제5부 하지왕과 광개토왕(3)
/김하기
정복자 태왕이 무엇 때문에 적장을 죽인 것을 사과하고 그 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말인가.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적장은 목을 베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궁녀와 노비로 삼고 그 아들은 질자로 잡아 말구종이나 시키는 일은 정복왕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광개토대왕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살인에 대한 참회를 했던 것이다.
“꺽감아, 네 어미 뱃속에 있는 너를 죽이려고 한 것도 용서해다오. 모두 다 내가 잘못했다. 난 그때 제 정신이 아니었어.”
하지왕이 마음을 억누르며 태왕에게 겸손하게 말했다.
“아바마마, 전 오랜 전에 이미 폐하를 용서하고 제 아버지로 모셨습니다. 제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 대가야 백성들도 폐하와 왕후마마를 어버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제가 태왕의 은택을 입었지 용서를 바랄 입장은 아니옵니다. 그런 말씀은 황송하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아들아. 네 말을 들으니 편하게 내가 편하게 눈을 감겠다.”
태왕은 왕실과 중신, 하지왕과 구투야에게 말했다.
“짐은 고구려 조정에게 마지막 나의 어명을 내리노라. 보위를 잃은 꺽감을 다시 대가야의 왕으로 책봉하노라. 현재 박지가 세운 구야는 더 이상 대가야의 왕이 아니다. 알겠는가?”
“예.”
중신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왕은 이제 마지막 힘을 내어 말했다.
“난 평생을 말 위에서 살았다. 말 밑에서는 수많은 왕과 장수들, 백성들이 말발굽 아래 짓밟혀 죽어갔다. 나는 그것의 응보를 받고 이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것이다. 난 한 생애에 지도상에 몇 뼘의 땅을 넓혔을 뿐 마음은 내가 죽인 자들로 인해 하루도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부처님의 말씀대로 방촌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어가고 있다. 내가 이 임종의 자리에서 깨닫는 것은 누구도 생로병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뺏고자 일으키는 전쟁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탐욕이고 가장 큰 분노이고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전쟁을 빌미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이다. 그러므로 거련아, 악역은 아비만으로 족하다. 아비의 전철을 밟지 말고 부처님의 자비와 평화를 베풀며 살아라, 알겠느냐?”
거련 태자가 말했다.
“네, 아바마마.”
“좋구나. 정말 좋구나. 전륜성왕과 같이 사해에 자비를 베푸는 위대한 왕이 되어라.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은 거련 태자를 도와 고구려가 사해에 덕과 자비를 끼치는 나라로 만들도록 보필하도록 하라.”
“예.”
광개토대왕은 말을 마치고 눈을 감고 호흡을 멈추었다. 삼매에 든 고승처럼 침상에 앉은 채로 좌정입적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국내성 대고전 침전에서 침상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승하하자 모두들 광개토대왕의 주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이 잦아들자 장화왕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침전으로 호위무사를 불러 꺽감을 죽이는 것이었다. 대가야 박지 집사와 구야왕의 후견인인 장화왕후는 하지왕을 대가야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어미 소후 여옥은 태왕의 총애를 독점해 밤마다 왕후는 쓸쓸한 침전에서 잠 못 이루며 질투의 눈을 밝히게 한 원수였다. 더욱이 꺽감이 자신의 아들 거련과 지혜와 무예를 겨루어 이겨 태왕의 사랑을 받을 때는 왕후의 가슴은 숯처럼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 때 꺽감과 소후를 죽였어야 했다.’ 모자를 역적으로 몰아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태왕이 변심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번에는 기어코 요절을 내리라. 감히 꺽감, 깜도 안 되는 네 놈이 임종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 태왕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대가야왕의 책봉을 받아내?’
장화왕후는 침전으로 불러들인 호위무사들에게 명했다.
“거룩한 대고전을 무단으로 침입해 더럽힌 저 두 가야 놈을 당장 베어랏!”
중신들도 덩달아 ‘거룩한 곳을 침범한 두 놈을 죽여라!’고 소리쳤다.
호위무사들이 재빨리 칼을 빼어 두 사람을 베러 들었다.
그러자 구투야가 하지왕을 구석으로 몰고는 사설도를 꺼내들고 거련 태자를 인질로 잡았다. 구투야는 뒤에서 거련의 멱살을 잡고 거꾸로 칼을 잡고 목을 겨눈 채 말했다.
“물러서라. 다가오면 너희들의 새 왕이 죽는다!”
구투야는 고리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대왕이 눈을 감자마자 우리를 죽이려 하는가! 대왕의 유언이 아니꼽더냐. 이것이 천하를 제패한 고구려의 비열한 행토란 말인가!”
“저, 저, 저놈이 우리 새 폐하를.”
중신들은 입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하고 있었다. 호위무사들도 거련태자를 인질로 잡은 구투야를 베지 못하고 칼만 흔들고 있었다. 의외의 사태에 놀란 장화왕후도 말문을 열지 못하고 멈칫거리고 있었다.
구투야는 사설도를 움켜쥐고 거련의 목을 찌를 듯 말했다.
“이 칼은 맹독을 발라 조금만 찔러도 절명한다. 나의 부모와 처자는 너희 고구려 광개토군에 의해 멸족 당했다.”
고리눈에 창대수염을 한 거구의 구투야는 악귀들로부터 사찰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사천왕처럼 보였다. 구투야는 집안이 몰살당하자 검바람재의 산적 두목이 되어 광개토대왕과 세상을 원망하며 술과 투전으로 살았다. 길목을 지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괴나리봇짐을 틀어 돈냥이라도 생기면 곧 바로 투전을 하고 술을 마셨다. 투전판에서 재미를 못 보면 쌈박질을 벌여 화를 풀곤 했다. 그러나 금관가야 이시품왕으로부터 사설도와 암살지령을 받은 뒤 오로지 가문의 원수 태왕을 죽일 일념을 품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하지왕을 만나 잠시 따라다녔으나 이제 그 한을 풀 천시를 얻은 것이다.
구투야는 거련태자를 인질로 잡고 산천이 그르렁 울릴 정도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들! 썩 물렀거라! 대왕의 유언을 듣고 평생 품고 온 복수의 마음을 어리석게도 잠시 버렸다. 헌데 네 놈들은 대왕의 유언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다시 복수의 칼을 든 마당에 이제 용서는 없다!”
구투야는 임종의 자리에서 용서와 평화를 구하는 대왕의 참회에 얼어붙은 복수심이 봄눈 녹듯이 하였다.
‘내가 그동안 가족의 복수에만 칼을 갈았다. 태왕은 죽이기에 너무 큰 인물이다.’
다 죽어가는 임종의 자리에 칼을 품고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의 용렬한 사람들을 보고 잠자고 있던 내면의 복수심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라 그예 폭발한 것이다.
구투야는 산적 두령으로 검바람재에서 금관가야, 비화가야, 대가야, 성산가야를 내리누르고 하지왕을 구하기 위해 녹림떼를 이끌고 사물가야를 쳐들어가 나라를 전복시킨 가야의 괴걸이었다. 죽이려는 자는 다수이고 구투야는 혼자지만 그 포효하는 모습이 호랑이처럼 사납고 태산처럼 위풍당당하여 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급작스레 인질로 잡힌 거련은 눈방울만 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상희공주가 애절하게 소리쳤다.
“꺽감 오빠, 어떻게 해봐요. 저자는 오빠의 부하잖아요!”
상희는 어릴 때부터 용모 단정하고 영민한 꺽감을 좋아했다. 꺽감이 침전으로 불쑥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놀랐으나 헌헌장부로 변한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동안 풍문으로 꺽감의 소식은 간간이 들었으나 꼭 한번 보았으면 했다. 더욱이 어머니 장화왕후가 자신을 신라 왕 실성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혼담을 넣은 때라, 꺽감이 더욱 보고 싶었다.
꺽감이 침전으로 불쑥 들어왔을 때 놀라면서도 내심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거련 오빠가 죽음 일보 직전에 몰리자 오로지 거련을 살릴 생각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꺽감 뒤로 몰린 하지왕도 이 급박한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어린 시절 이후 처음 만난 태왕과 장화왕후, 거련과 상희에 대한 생각들이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갔다. 따뜻한 가야 땅에서 오삭오삭 추운 고구려의 질자의 생활은 고단하고도 긴장된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인연을 쌓으며 들 언덕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아련한 행복감을 느꼈다. 애환의 고구려 질자생활은 이후 이어진 험난한 그의 여정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애음 끊어지는 듯한 상희공주의 말에 하지왕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왕은 거련태자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했다.
“대왕마마, 소신을 용서하소서. 구투야가 차마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구투야를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구투야, 태왕이 임종한 신성한 침전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칼을 거두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