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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수프 /재미로 보는 주역> 3.두 번 가르치지 않는다, 무지몽매(無知蒙昧)

작성일 : 2022.01.01 09:10

두 번 가르치지 않는다, 무지몽매(無知蒙昧)

/양선규

 

중천건(重天乾)’, ‘중지곤(重地坤)’, ‘수뢰둔(水雷屯)’, 주역 초입 세 괘의 괘사(卦辭)와 각 효의 주()를 읽고 나니 어렴풋하게나마 주역주(周易注)를 읽는 방법이 눈에 들어옵니다. 괘사가 전체의 대강을 말하고 주효(主爻)의 해석으로 그것을 정교화하는 특유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능수능란하게 그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제 수준에서 제 멋대로, 느낌적 느낌으로 읽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주역을 거울로 생각합니다. 그것도 오래된 청동거울로요. 그 거울은 저의 안을 어렴풋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자세하고 세밀한 것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제가 채워 넣어야 합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보면 장군이 한 번씩 괘를 뽑아 점을 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 육효(六爻)를 뽑아 보신 듯합니다. 성현들이나 선각들이 주역의 괘를 뽑아서 앞날을 예측하거나 집단의 진로를 점지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계시적 점복 행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능력도 없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거울 속의 저와 악수를 해 보는 게 제 바람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언젠가 신문 칼럼에 쓴 글 한 편을 소개합니다.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이상의 시 거울의 한 대목입니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던이라는 구절이 어린 마음에 뜻 모를 감동을 주었습니다. ‘거울이 상징이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1 때였습니다. 국어 부교재(副敎材) 안에서 그 시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상의 명작 수필 권태도 거기서 읽었습니다. 그 책 속에는 명문장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가 유독 오래토록 제 기억 속에서 웅웅거렸습니다. 수십 년 동안 웅웅거리는 이 구절은 제 일상의 무의미한 왼손잡이들과 심심찮게 내통합니다. 저는 부분 왼손잡이입니다. (지폐)를 셀 때, 자전거를 끌고 갈 때, 커피잔을 들 때, 시험지를 매길(넘길) , 현관문을 열 때, 누군가를 애무할 때(사람이든 동물이든), 저는 왼손잡이가 됩니다. 요즘 하나 더 늘었습니다. 모자를 쓰고 반가운 이에게 거수경례를 할 때 왼손이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제 왼손은 악수를 모르는왼손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세상과 통하는 하나의 출구가 되고 있습니다. , 제 식탁에 올라오는 국그릇도 항상 왼쪽에 놓입니다. 제가 그렇게 조정합니다. 아내도 저의 그런 습성을 감안해서 애초에 그렇게 진열하기도 합니다. 이상한 왼손잡이입니다. 꼭 의미를 둘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그런 것들이 제 초인지에 포착되곤 합니다. 뜬금없이 이것도 모종의 출구 의식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카프카의 이야기를 참조하겠습니다.

 

제가 출구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똑바로 이해받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이 말을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빈틈없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부러 자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방을 향해 열려 있는 자유라는 저 위대한 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거든요. 원숭이였을 때 저는 아마도 그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때도 오늘날도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유로써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기만당합니다.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헤아려지는 것과 같이, 그에 상응하는 착각 역시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입니다. 아닙니다, 전 자유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의 출구를, 오른쪽, 왼쪽, 그 어디로든 간에, 요구했을 뿐,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출구 또한 비록 하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제 요구는 작았습니다. 착각이 더 크지는 않을 테지요.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궤짝 위에서 벽에 몸을 눌러 붙인 채 팔을 쳐들고 가만히 서 있지만은 말아야지(원숭이처럼). 제가 이 사람들의 테두리 안에서 얻은 평정이 저를, 무엇보다 온갖 도망치려는 시도로부터, 막아주었습니다. 이제 와서야 저는 최소한 살고자 한다면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 출구는 도망쳐서는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합니다. 도망이 가능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믿고 있습니다, 원숭이는 언제나 도망칠 수 있다고요.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의 보고]

 

카프카는 출구라는 말을 인간해방과 연관된 말로 쓰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구는 나가는 곳입니다. 노예적 삶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뜻하지요. 카프카는 원숭이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매인 존재입니다. 누구든 자기 밥상 위의 국그릇의 위치를 조정하는 것처럼 자기 삶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신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울고 몸부림칠 뿐입니다. 다만 원숭이로의 도피는 금물이라고 카프카는 말합니다.

이를테면 저는 주역이라는 거울을 제 출구 찾기의 한 작은 도구로 사용하고 싶은 것입니다. 답답하거나 무료할 때 마음에 드는 한 구절을 읽고 제 일상을 반추해 보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6효에 대한 각각의 해석을 읽어나가면서 특별히 심금을 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부여잡고 은근하게 음미합니다. ‘은근하다라는 말은 기분에 지지 않고 음미한다라는 뜻입니다. 6효의 형상적 연관성이나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게슈탈트(전체 형상이 환기하는 직관적 의미나 정서)를 잡아내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그 일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제 안의 움직임들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텍스트에서 자극받아 환기되는 내 안의 움직임들 전체 속에서 하나를 찾고, 그 하나를 다시 전체로 확대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어떤 서사적 통일성을 찾습니다. 그 서사적 통일성이 거하는 맥락은 물론 스스로 처한 입장과 물정과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립니다. 논리로 구하지 않고 직관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찾아야 합니다. 만약 통일성을 외면하고 한 줄이나 한 자가 계속 자기를 주장하면 마지막에 그 한 줄한 자로 돌아갑니다. 그것만 거울에 비춥니다. 하나에 거합니다.

다만, 반드시 하나에 거할 때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점을 망각하면 모든 것이 입니다. 어떻든 그 한 줄이 나의 (허튼 망상이나 욕심으로 주역을 펼치는) 욕심과 기대와 희망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까닭에 교훈을 얻고자 하면 반드시 그것을 뒤집어야 합니다. 가령 수뢰둔에서 밀운불우(密雲不雨), 구름이 끼고 천둥은 치지만 비는 아직 안 온다만 눈에 들어오면 그것을 나에게도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조만간에 큰 비가(천둥치고 번개친 만큼) 올 터이니 단단히 대비하라로 읽어야 합니다. 기대와 희망을 버리는 것, 바로 그것이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는 주역 해석의 요결’(要訣)입니다. 주역 제4괘 산수몽(山水蒙)()편은 배움과 가르침의 일반적인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역 64편 중에서 가장 명료한 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몽은 형통하니, 내가 몽매한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몽매한 어린아이가 나를 찾는 것이라. 처음 점치거든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하면 모독함이니, 모독함에는 알려주지 아니한다.

蒙亨匪我求童蒙童蒙求我初筮告, 以剛中也. 再三瀆, 瀆則不告, 利贞[주역왕필주, 60]

 

아침에 집사람한테서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방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저에게 두 번 안 말한다.”라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커피 끓여 놓았으니 가져가라고 말한 직후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단박에 저는 두 번, 세 번 하면 모독함이니, 모독함에는 알려주지 아니한다(再三瀆, 瀆則不告).를 배웠습니다. 그 한 말씀에 몽매한 이가 되어서 단숨에 계몽되었습니다. 커피를 끓여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가져가라고 분부하셨는데 제가 아마 못 들었나봅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밖으로 나와서 왜 안 갖다주냐고 툴툴거리며 커피잔을 들고 들어가는 뒤통수에다 대고 그렇게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몸에 안 좋다고 몇 달째 다방 커피를 집에서 안 끓여주더니 요즘 며칠간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순한 암말처럼 먼저 커피 한 잔 안 하겠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감사히 얻어 마시곤 했는데 오늘 아침에 잠시 몽매한 이를 포용하면 길하고, 지어미를 받아들이면 길하리니, 아들이 집을 다스리리라(包蒙吉 納婦吉 子克家)(산수몽, 九二)에 심취해서 비몽사몽을 헤매다 그만 말을 탔다가 내려서 피눈물이 흐르는 형국(수뢰둔, 上六)이 되고 말았습니다.

산수몽(山水蒙), 괘의 형국이 산 아래 물이 있는 위태위태한 모양이라 하니 한시도 자기를 돌아다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새깁니다. 상대가 누구든 늘 두려워하고 섬기는 자세로 임하면 내 몸에 화가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