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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현대문학의 어제와 오늘

<부산현대문학의 어제와 오늘 1-2>조향 시인과 김 춘수 시인의 주고 받기

작성일 : 2024.08.11 09:34

<부산현대문학의 어제와 오늘 1-2>

 

조향 시인과 김춘수 시인과의 주고받기

 

 

(1)

 

조향(본명 조섭제)(1917-1984) 시인과 김춘수(1922-2004)시인과의 인연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두 사람 다 경상남도 출신이다. 조 시인은 경상남도 사천군(현재 사천시) 곤양면에서 1917 년 태어났으며, 김 시인은 조 시인보다 5년 뒤인 1922년 경상남도 통영군 (현재 통영시) 통영읍에서 태어났다. 사천군과 통영군은 사이에 고성군을 두고 있으나 예나 지금이나 가까운 이웃이다. 말하자면 같은 경남 출신이라도 이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 시인과 김 시인의 만남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향 시인은 어린 시절 산청군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고향 사천군을 떠나 산청군 지곡면과 산청읍에서 살면서 1924년 산청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26년 군청 공무원을 그만둔 아버지를 따라 고향 곤양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했다. 곧 진주의 생명보험회사에 취직된 아버지를 따라 진주제1보통학교(중안초등학교 전신 2016년 진주초등학교로 교명 바꿈)로 전학하여 1930년 졸업하고 진주고등보통학교(진주고등학교 전신)를 입학하여 1937년 졸업하였다. 그의 회고기 나의 20년의 발차취(자유문학195810월호)에 의하면 진주고보에서 성적은 우수했으나 수학 과목이 낙제를 하여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대구사범 강습과에 입학하여 1년만에 수료하고 1938년 김해 가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이 무렵 본가는 마산으로 이사를 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1940년에는 매일신문(서울신문 전신) 신춘문예에 초야가 시부문 3석으로 입선을 한다. 그러다가 1941년 일본대학 예술학원( 예술학부의 전신)창작과에 합격하여 도일한다. 그는 창작과에서 전문부 상경과로 옮겨 수학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편지 사건에 연류되어 민족주의자롤 몰려 퇴학 당하고 마산으로 돌아와 1942년 마산 성호초등학교 교사로 복직한다. 한편 김수돈(1917-1966) 정진업(1916-1983) 두 시인과 교류하며 일본 시지에 일어시를 투고한다.

김춘수 시인의 경우 통영의 대지주인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치원도 다니고 통영읍 근처의 안정 간이보통학교에 다니다가 1929년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35년 졸업한다. 그는 졸업하자말자 5년제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4학년 때 경기중학으로 교명변경, 경기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하면서 고향 통영을 떠난다. 193911월 졸업을 앞두고 자퇴하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다. 1940년 동경의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하여 194212월 일본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하였다는 사상혐의로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간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되면서 일본대학에서 퇴학당한다. 재판을 끝낸 후 석방되어 1943년에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요양한다.

이상의 두 사람의 생애를 살펴볼 때 조 시인이 다섯 살이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는 김 시인이 한 해 먼저 입학하였다. 그러나 조 시인이 전문부 상경과로 옮겨 잠시 수학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일본에서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민족주의자로 인식되어 퇴학당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조 시인은 경찰서나 헌병대 유치되지 않고 귀국하여 교사직에 종사하였고 김 시인은 옥고를 치루고 해방 전에는 공직에 종사하지 못하였다.

 

(2)

 

1945815일 광복과 더불어 조향 시인은 마산 월영초등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았고 1946년에는 마산고급상업중학교(6년제 마산상고 전신) 교사로 전직을 한다. 김춘수 시인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그 동안 징용을 피해 숨어 살다가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고 1946년에는 통영중학교 (6년제, 통영고등학교 전신) 교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근무한다. 그런데 이즈음 두 사람은 魯漫派라는 시 동인지의 동인으로 함께 참여하면서 드디어 만나게 된다. 이 동인지의 동인으로는 김수돈 시인이 함께 하였다. 이 사실에 대하여 조향 시인은 앞에서 언급한 나의 20년의 발자취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 있다.

 

해방 후 나는 마산에서 재빨리 로만파라는 시동인지를 시작했다. 박목월, 조지훈, 이호우,김춘수, 서정주 등 시인들의 협조로서 4집까지 내었었다. 이것이 내가 한국 문단에 발을 디디게 된 맨 첨의 일이다. 필명을 조향으로 바꿨다. 김춘수 형의 시가 제일 첨 실린 것이 로만파라는 나의 잡지였다.

 

 

이 시기에 대하여 김춘수 시인은 시인이 된다는 것(김춘수 대표 에세이 왜 나는 시인인가 <현대문학사,2005> 수록)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46년 여름 해방 1주년 기념을 겸해서 부산에서 청년문학가협회경남지부가 결성되었다. 그때 알게 된 마산의 김수돈, 조향 씨와 로만파라는 시동인지를 내자고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의 열매를 맺어 그해 연말에 시동인지 로만파의 창간호가 나왔다. 조향은 그 무렵에는 전통적인 서정시를 쓰고 있었다. 수돈이 오히려 모던한 터치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야말로 습작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세 사람 중에서 내 것이 가장 치졸했다고 생각된다. 지금 내 수중에 그 때의 자료가 없는 것이 다행이다. 기념은 되겠지만, 그 때의 내 습작들을 다시 보면 아마 질겁을 하리라.

로만파는 이듬해까지 3집을 겨우 내고 폐간되었다. 그동안 비용이며 편집이며 인쇄 등 궂은 일을 조향 혼자서 도맡았다.

이 두 글을 비교하여 볼 때 조 시인의 글은 로만파동인에 대한 부분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으나 김 시인의 경우는 비교적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당시 김 시인은 통영중학교 교사였고, 김수돈(1917-1966) 시인은 나중에는 마산에 머물지만 당시에는 부산에서 중등교사를 하고 있었다. 조 시인은 마산상고 교사였으며 동인지는 마산에서 나왔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동인지 발간을 주도한 사람은 조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 시인은 동인지를 나의 잡지라 하고 있고 김 시인의 회고 역시 모든 일을 조 시인이 주도했다고 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의 연보에 의하면 19469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애가哀歌를 처음 발표하고 동시에 로만파동인활동을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조향 시인이 김 춘수 시인이 로만파(1946년 연말 창간)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였다는 것은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 로만파동인지가 완벽하게 수습되어 있지 않다. 마산의 마산문학관에 3집이 수습되어 있고, 2집이 서지학자에 의하여 발굴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회고 가운데 서로 다른 점은 조 시인은 4집까지 내었다고 하고 김 시인은 3집까지 내었다고 하고 있는 점이다. 아마 동인지를 주도한 조 시인의 기억이 정확할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질이 수습되지 않아 확정할 수 없다.

동인지 이름도 3집에는 魯漫派에서 浪漫派로 바뀌고 있다. 로만파는 애초 조향 시인이 제안한 명칭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영어 Romanticism浪漫主義로 번역한 것은 일본 발음에는 가깝지만 우리말은 그것이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魯漫主義를 사용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와 김수돈 시인에게 동인 이름을 로만파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시와 반시(1996년 가을호)그늘이 깃든 시간· 5-<나의 예술인 교우록> 에서 회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향의 일제잔재를 청산하자는 의식에서 나온 이름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한 浪漫主義라는 관습을 새로운 조어가 깰 수 없는 현실 때문에 3집부터 바뀌어 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한정우 교수(경남대)지역문학연구5(경남·부산지역문학회,1999.10)꽃 없는 낭만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浪漫派(19471) 3집 해제 작업을 이미 오래 전에 했고 3집 전체를 자료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3집 혹은 4집 심지어 경남문인협회에서 편찬한 경남문학사(1995)에서는 5집을 종간호로 보는 혼란의 극복을 위해서도 확실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필자 역시 명칭문제도 검증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러나 조향 시인이나 김춘수 시인 은 여러 글에서 로만파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 魯漫派로 부르기로 한다.

3집에 발표된 조향 시인의 작품 純白飛翔學,폭풍우 우는 밤에,한가위,草原으로 가자!,NUDE,異域의 거리에서6편은 그의 전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된 까닭은 김춘수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소 거리가 먼 전통적인 서정시라는 특질 때문에 조향 시인 자신이 보관에 소홀하였을 수도 있고, 후학들은 자료 자체를 발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의 경우도 人形과의 對話, 잠자리와 柚子도 마찬가지로 전집에 수습되지 않고 있다. 특히 김춘수 시인의 경우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처럼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하여 많이 부끄러워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연으로 조향 시인과 계속 접촉하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 계속되고 있는 다음의 김춘수 시인 회고기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6·25가 터진 그해 나는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이었다. 부산의 임시수도에서 조향과 다시 접촉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향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후반기동인회後半期同人會 라는 동인회의멤버였고, 그 동인회는 이른바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듯했다. 그러나 조향만은 보다 쉬리얼리즘 쪽으로 훨씬 경도되어 있었다. 이미 그때 그는 자기의 직장인 동아대학에서 자기 과의 학생들을 모아 쉬르의 연구회를 조직하고 있는 듯했다. 가이가아시체雅屍體니 하는 연구지 발간을 그때부터 이미 계획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것들은 이 땅에서는 드물게 본격적인 쉬르의 연구지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 후반기동인회로부터 어떤 신선한 자극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은근한 가입 권유가 있었는데도 나는 나대로의 길을 모색해 가기로 했다.

 

조향 시인은 1947년 마산상고를 떠나 서정주 시인 후임으로 동아대학교 교수로 부임한다. 그러나 서정주는 동아대학교 전신인 남조선대학교에 부임하여 한 학기만 하고 서울로 떠났기 때문에 조 시인은 동아대학교 초창기부터 詩學敎授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수록된 남선대학설립기성회(부산)항목에 보면 남조선대학교의 설립과정과 그것이 동아대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해방직후 미군정하에서 남선재단(현 남성재단) 김길창 목사를 중심으로 남선대학교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군정청 경상남도 고문 정기원 박사가 이를 후원했다. 이들은 서대신동 구 입정상업학교 교사를 가교사로 하고 정기원을 총장으로 추대하여, 194621일 학생을 모집하는 광고를 냈다. 이때 교명을 남조선대학교로 개명하였다. 당시 남조선대학은 신학부와, 법문학부, 정경학부로 구성된 대학학부와 문예학과로 구성되었으며 1학년 정원은 500명이었다. 그러나 개교를 앞둔 2월 중순 경상남도 학무과는 미군정의 인가가 없었음을 근거로 남조선대학교의 개교를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미군정청 고등고등교육 감독관 역시 재정·교수진·시설문제 등 대학 설립을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며 정식인가를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대학은 정식인가 없이 42남조선법문학원으로 개교하였고, 결국 모집학생들이 국립 부산대학교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김길창 목사 등 기성회 측 간부 5명이 사퇴하고 하원준을 이사장으로 하는 30여 명의 이사회기 새로 조직되었다. 새 이사회는 더 이상 대학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정재환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대학교 설립기성회에 모든 것을 이관하였고, 그 결과 1946111일 동아대학이 개교되었다. 이후 동아대학은 19471230일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동아학숙의 설립 인가와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상으로 볼 때 초창기에는 문리학부에 문학과를 인가받았다. 아마 조향 시인은 문학과 소속 교수였다고 볼 수 있다. 동아대학교의 현행 홈 페이지 연혁란에 보면 195537일 국문학과가 영문학과, 사학, 화학과와 함께 문리학부에 신설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1947년 조향 시인이 부임하고 나서 한참 동안 국문과가 학과로 독립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조 시인은 동아대학교 국문과의 창설 멤버라고 볼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은 19489월 통영중학교에서 마산중학교(6년제 현 마산고등학교)로 전근하여 19539월까지 근무한다. 19539월부터는 진주의 해인대학 ,해군사관학교, 연세대 부산분교, 부산대학교 등의 시간강사를 하면서 마산과 진주, 진해. 부산 등지를 오가며 지낸다.

한편 로만파동인 이후 첫 시집구름과 장미(1948)를 통영에서 발간하여 청마 유치환(1908-1967)의 극찬을 받는다. 한편 서울에서 소설가 김송(1909-1988)이 발간한 잡지 白民(1949.1)에 시산악을 발표하고 부산의 소설가 염주용(1911-1953)이 주재하는 문예신문, 진주의 설창수 시인이 주재하는 嶺文등에 시를 발표한다. 19503월에는 서울 문예사에서 서정주 서문으로 제2시집 , 이듬해 7월에는 제3시집 를 역시 문예사에서 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한다.

이상으로 볼 때 김춘수 시인에게 조향 시인은 시창작을 함께한 동인이었으며 후반기 동인이나 조향 시인의 초현실주의 지향성과 동인 활동은 김 시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선의의 경쟁자였다.

 

(3)

 

다음으로는 조향 시인과 김춘수 시인이 상대방의 작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글을 통하여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조향 시인은 1950년대부터 1966년 동아대학교를 떠나기 전이나 1966년에 상경하여 19848월 동해안 피서지에서 급서할 때까지의 서울에서의 문학활동도 초현실주의 문학운동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김춘수 시인의 시에 대하여 언급한 경우가 극히 드물다. 다만 조향전집-2 시론·산문(열음사,1994)에 의하면 문학3(1959.12)에 발표한1959년 시단 총평이란 일종의 연평에서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640편의 시 가운데 22명의 시인을 거명하면서 12명의 시인의 작품을 부분적이지만 직접 인용하여 언급한 다음의 글이 있다.

 

시 네 편(김춘수, 신풍토시집·1). 릴케를 닮으면서 지금 가경佳境에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벽이 걸어온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온다.

머리가 없는 인형이 걸어온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오틀담 사원의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밤 한 시를 친다.

어딘가 늪의 바닥에서 거머리가 운다.

그 눈물 위에 떨어져 쌓이는

붉고 붉은 꽃잎.

 

이 시는 슈르적인 이마쥬의 세계로 경사져 가고 있다는 것을 춘수 자신 의식하는지?

(조향 전집 2,시론산문집,1994,열음사 p57-58)

 

길게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연평에서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김춘수 시인의 1960년대 중반 무의미시로 변모할 징조를 보이고 있는 인용시를 초현실주의 이미지의 등장으로 보고 있는 점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아도 정확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김춘수 시인의 시론이나 시에 관한 저서에서 조향 시인의 작품을 언급한 글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김 시인의 첫 저서로 1958년 부산의 해동문화사에서 출판한 韓國現代詩形態論에서부터 조 시인을 주목하고 있다. 이 저서는 文學藝術19558월호부터 19564월호까지 9회 동안 연재한 형태상으로 본 韓國現代詩를 개제한 것이다. 김 시인은 이 저서로 1959년 문교부로부터 교수자격심사규정에 의해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자격을 인정받았다. 이 저서는 한국 현대시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96·25 이후에서 一群의 모더니스트라는 항목에 조 시인의 바다의 層階전반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면서 언급하고 있다.

 

낡은 아코뎡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趙鄕바다의 層階라고 하는 詩篇의 상반부이다. <여보세요?><왜 그러십니까?> 를 각각 한 으로 끊은 의도는 쉬이 짐작된다. 靜寂效果, 沈默音聲 그런 것이다. 말 하자면 行間(여기서는 聯間)그것 일 것이다. Mallarme는 언어의 音樂的 暗示에서 오 는 效果를 생각하였던 것인데, 여기서는 보다 視覺的인 것, 이를테면 東洋畵餘白을 노린 것이 분명하다. 10의 글 중에 動詞<뒀습니다.<피는> 둘뿐이고 대개가 名詞에서 끊어져 있는데,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그리고 그 명사들은 모두가 具象名詞.

다섯째에서 이 시는 지나친 기교를 부리고 있다. 첫째<모래밭에서.>2단 낮추고 있고 셋째<女人의 허벅지>1단 낮추고, 넷째<낙지 까아만 그림자>4단 낮추고 있는 것은 그 의 높이의 순위대로의 濃淡으로써 그런 물체들이 暗示하는 世界意識 속에서 명멸한다는 것일 것이다. 形態를 통하여 시에 입체적인 量感을 주고 있다.

 

이상의 인용 말미에 너무 심미적이고 자유시의 새로운 형태인 산문시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 글을 쓸 당시인 1956년으로서는 최근의 작품에 해당되어 저서의 끝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이 시는 그 당시의 문예지에 발표된 것이 아니고 조향 시인이 대학교재로 편찬한 개정 증보판 現代國文學粹(自由莊,1952)에 처음 발표한 것이다. 이것을 김춘수 시인이 주목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형태론적 접근이 가능하면서 바다의 풍경을 초현실주의 경향으로 접근했다는 것 자체는 조 시인의 실험의식과 초현실주의 이론을 육화시킨 역량에서 왔다. 그러나 그것을 한국현대시사에 소개한 것은 김 시인이다.

바다의 層階에 대한 김춘수 시인의 관심은 그의 두 번째 저서 詩論(문호사,1961)에도 지속된다. 이 저서 역시 新文藝라는 문예지에 19596월부터 7회 연재한 글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연재할 때의 제목은 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지을 것인가?였다. 이 저서의 속표지에는 저서명 위에 詩作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시의 이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법에 치중한 저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저서는 詩作의 단계를 의식하여 서술한 흔적이 보인다. 머리말에 이어 <형태, 언어, 영감, 상상, 감성과 지성, 제재, 이해의 방법,제목, 행의 기능, 아류> 로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앞의 저서와 달리 형태에 주목하지 않고 제목에서 ‘(3) Formalism의 경우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작품을 전문 인용하여 길게 해석하고 있다. 특히 조향 시인이 195810월호 신문예에 발표한 바다의 層階를 집중적으로 해석한 자작시 해설 데뻬이즈망의 美學(1961년 신구문화사 판 世界戰後文學全集·8-韓國戰後問題詩集에 조 시인의 시 13편과 함께 시작노트로 재수록)을 바탕으로 조 시인이 입체파 화가 Bracque의 말을 인용하였다는 점을 밝히면서 길게 해석하고 있다. 김 시인은 형태주의자는 제목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바다의 層階라는 제목이 내용을 상징하는 의미는 없고 다만 독자를 위해 붙인 친절이라고 보고 있다. 사실 이 시는 해석하기가 어려운 시이다. 그러나 조 시인이 붙인 제목에 근거하여 해석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자작시 해설이 조향 시인의 대표적인 詩論인데 앞에서 인용한 전집 2권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201610월호 시문학에 심상운 시인이 신구문화사의 한국전후문제시집에 실린 시인들의 작품과 시작노트를 소개하는 시리즈의 하나로 소개되었다.

다음으로 김춘수 시인의 세 번째 시론인 詩論(송원문화사,1971)시의 理解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저서는 제1韻律·이미지·類推, 2韓國現代詩, 3詩人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부분이 제1장이다. 이것은 앞의 저서처럼 김 시인이 직접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19654월 서울에서 문덕수 시인이 주도하여 창간한 시문학(청운출판사)에 창간호부터 作詩講義라고 하여 연재한 글이다. ‘韻律과 장르라는 제목으로 4월호와 5월호,7월호, ‘이미지라는 제목으로8월호,9월호,10월호,12월호,19661월호,3월호,4월호, 10회로 끝내었다. 그런데 저서에는19663월호의隱喩語義라는 부분에서 끝내고 있다. 3월호 말미에 諷喩’,4월호의 象徵‘, 短詩長詩부분이 빠져 있는 것을 이번의 글을 쓰면서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 저서에서도 역시 이미지에서 바다의 層階 전문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2韓國現代詩에서도 후반기동인회를 언급하면서 역시 부분 인용하고 있다.

1976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시론집 意味無意味는 체계적인 시론집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국현대시의 계보라는 글에서 이 글의 부제로 붙인 이미지의 기능면에서 본이라는 글의 특성 때문에 역시 부분 인용하고 있다.

1991년에 나온 位相(둥지)이라는 시론집은 현대시학20회에 걸쳐 연재된 것을 저서로 엮은 것이다. 1-55까지 번호가 붙어 있는 짧은 글들 가운데 20에서 李箱詩第13의 전문을 인용한 후 설명하고 난 뒤 조향 시인의 시 Episode전문 김구용의 八曲 2부분, 김종삼의 戀人전문, 이승훈의 가을전문을 함께 인용한 후 조 시인의 작품을 19세기식 리얼리즘을 완전히 거부한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37에서도 바다의 層階전문과 Episode전문 그리고 산문 초현실주의의 사상과 기교雅屍體를 부분 인용하면서 50년대 동아대학교 시절부터 지향한 초현실주의 이론을 도식적으로 적용한 바다의 層階보다 Episode를 오히려 성공한 작품이라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산문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4)

 

김춘수 시인은 그의 시론을 확립하는 초창기인 1950년대부터 결산기라고 볼 수 있는 1990년대까지 40년 넘게 조향 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은 조향 시인이 그와 함께 최초로 동인 활동을 한 멤버인 탓도 있겠으나 그의 무의미시론의 근간이 되고 있는 초현실주의 이론과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단적이긴 하나 매우 고집스럽게 실천하고 있는 조향 시인의 자세를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형태론적 시학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작품이 바다의 層階인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춘수 시인은 만년에 이 작품보다 오히려 Episode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작품이 김 시인의 말대로 바다의 層階의 지나친 불연속보다 다소 정연한 질서가 있으면서 아름다운 환상을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