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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부터 부산시인협회 결성 전까지의 부산 시단 -1945년부터 1974년까지의 부산시인협회 전사

작성일 : 2024.08.05 12:54

 

 

해방기부터 부산시인협회 결성 전까지의 부산 시단

-1945년부터 1974년까지의 부산시인협회 전사

/양왕용

 

 

1. 해방 직후부터 임시수도 시절(1945-1953)까지의 부산 시단

 

(1)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부산

 

부산은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도시이다. 1876227일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일명 병자수호조약)과 더불어 개항하면서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로 국제무역항으로 변해간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중반인 1925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조선조 말부터 진주시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을 서부경남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산으로 이전하여 417일 부산의 도청 신청사(현재 동아대 부민 캠퍼스) 광장에서 이전식을 거행하게 된다. 따라서 이때부터 항만도시와 도청 소재지로서 행정도시의 기능을 겸하게 된다. 1925년부터 1945815일 해방을 거쳐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인 196311일 부산직할시로 승격되기까지,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로 6.25 전쟁기에는 임시수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1945815일 해방 직후 부산이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요, 남부의 거점도시라고 해도 문예지나 시전문지의의 창간을 할 수 있는 여건은 되지 않았다. 다만 해방과 더불어 좌우익의 신문사가 난립되다가 1950년대에는 진보진영의 민주신보(1945.9.20.민주중보로 창간,1949.9.민주신보로 개명, 1962.8.1.폐간), 우익진영의 자유민보(1946.2.26. 창간-1956.4.19. 폐간), 현재의 부산일보(1946.9.10. 창간), 현재의 국제신문(1947.9.1. 산업신문으로 창간,1950.8.19. 국제신보로 개명, 1977.6. 국제신문다시 개명,1980.12. 5공화국 정권에 의하여 강제폐간, 1989.2.1. 복간 등 우여곡절을 겪었음)4대 신문사가 있어서 시인들이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고 문화면에 시 발표지면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 경남도정 홍보지 경남공론慶南公論이 지면을 제공하기도 했다.

문학잡지는 발간되지 않아도 해방공간에 문학 중심의 주간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일이다. 염주용廉周用(1911-1953) 시인의 주도로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문예신문이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매주 월요일 발간되었다. 집필진으로는 우파라고 할 수 있는 유치환, 오영수, 김수돈 등과 좌파 김상훈, 이병철, 김원룡 등이 두루 참여하였다. 신춘문예 제도를 도입하고 아동문학상과 학생문학상을 제정하여 초,중고등학생에게도 지면을 제공했다. 경영난과 염주용의 지병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보관본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점이 애석하다. 그러나 이곳을 통하여 많은 시가 발표되었고 그 당시 학생으로 투고한 후 나중에 문인이 되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의미 있는 매체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해방기의 개인시집을 여러 권 발간해준 곳도 문예신문사였다.

 

(2) 일제강점기의 유일한 동인지 생리生理와 해방공간의 부산 시단

 

일제 강점기에 부산 지역에서 발간된 유일한 동인지는 생리生理이다. 생리1934년부터 1937년까지 화신백화점 부산사무소(소장;시인 조벽암)에서 구매 사무를 보던 청마 유치환柳致環(1908-1967)시인의 주도로 염주용 시인, 장하보(1913-1970)시조시인, 유치상(청마의 동생), 최상규, 김기섭, 박영포(1913-1939) 시인 등이 동인으로 참여 , 193771일 창간호를 발간하여 5호까지 지속되었다. 유치환은 곧 통영의 협성상업학교 교사로 직장을 옮겼으나 부산의 시인들과 끝까지 활동하였다. 청마의 동생 유치상이 부산에 머물며 편집과 발행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청마는 1931년 서울서 발간한 문예지문예월간(박용철 주재 193111-19324월 통권4호로 종간) 2호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데뷔한 초창기였으며 첫 시집청마시초靑馬詩抄(청색지사,1939)를 발간하기 직전이었다. 이 시기 청마는 초량동 1000번지에 거주하였으며 청마가 부산에 체류한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청마는 6·25 전쟁 시절(1950-51) 통영에서 부산으로 피난 와 대청동 복병산 부산측우소 근처에 머물던 시절로 청마는 경남문총국구대의 일원으로 원산까지 종군한다. 이 시절의 종군시편從軍詩篇들은 제5시집 보병步兵과 더불어(문예사,1951)에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은 196373일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에서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보된 때부터 1967213일 오후 930분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 시절 문인들과 헤어져 부산동구 수정동 봉생병원 앞 대로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너다가 시내버스에 치여 운명하기까지이다. 이 시절 그는 부산문인협회(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 회장과 부산예총 회장을 주위의 문인들과 예술인의 추대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1964년 제7회 부산시 문화상 문학부문을 수상하였다.

해방기에 서울서 발간된 문예지에 등단한 사람은 두 사람이다. 194512월 월간지로 창간하여 19505월까지 중간 중간에 결간한 결과 통권 22호를 발행한 백민白民19506·25전쟁 직전까지 경남여중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소설 습작을 한 오영수吳永壽(1914-1980)가 시를 두 편 발표한 것이다. 194810월호 (통권 16)골 아기, 19495월호(통권 19)六月의 아침을 발표한 것이다. 이 잡지에는 추천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유망한 신인으로 인정받아 두 편을 발표한 것이다. 그는 19491서울신문현상모집에 소설 머루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전향하고 6·25 전쟁이 끝난 후 상경함으로써 부산문단을 떠난다.

6·25 전쟁 직전인 194981일 창간하여, 피난 시절에는 부산에서 전시판을 발간하기도 하다가 환도하여 19543월호까지 통권 21호를 발간한 문예文藝손동인孫東仁(1924-1992)3회 추천 완료로 시단에 데뷔하였다. 19494월호에 누님의 무덤가, 19505월호에 산골의 봄, 19506월호에 이별離別로 추천완료하였다. 그러나 1954년에 김태홍, 안장현과 함께 발간한 동인지 시문詩門(1954-1955)에서부터 소설로 전향한다. 그리고 동시집과 동화집도 남겼다. 그러나 손동인이 경남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50년대 중반에는 이유경 시인의 경우 손동인 시인 때문에 경남고등학교로 진학할 정도로 부산의 중고등학교 시인지망생에게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 역시 1968년부터 인천교육대 교수(현재의 경인교대)가 되어 부산을 떠난다.

 

(3) 임시수도 시절의 부산 시단

 

해방 이후 부산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506·25 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의 피난민이 몰려 오고, 대전과 대구로 전전하던 정부가 818일 부산으로 옮겨와 부산의 임시수도 시절이 개막된 때부터이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그 해 9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13·8선을 돌파하여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자 10월 정부도 일시적으로 서울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1·4 후퇴로 인해 다시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고 피난했다. 1953727일 휴전협정 성립 전부터 단계적으로 서울로 옮겨간 정부에 이어 국회까지 환도한 것은 1953916일이었다. 따라서 19508월부터 539월까지를 부산의 임시수도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절 부산은 대구와 더불어 피난 문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국의 문인들이 부산으로 몰려와 대전에서부터 조직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라는 종군문인단이 조직되어, ··공군의 정훈국에 소속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육군과 공군의 종군문인단은 511·4회퇴 때 대구에 자리잡았으며, 해군 종군문인단은 바다를 끼고 있는 특성상 부산에 자리 잡았다. 이때에 대구와 부산의 지역문인들은 자연 피난 온 서울과 다른 지역 문인들과 어울려 종군문인단으로 활동하게 되고 생활의 여유가 있던 문인들 중에는 피난 문인들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특히 부산에 임시수도가 있었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 많은 문인들도 체류하였으며 광복동 밀다원密茶苑을 중심으로 몇몇 다방에 주로 이들이 모여 환담도 나누고 원고도 쓰면서 간혹 시화전도 열었다. 말하자면 전쟁의 불안과 현실의 암담함 속에서 전시라는 특수 상황과 생활의 방편으로 종군문인단에 참여하면서, 다소 부진한 활동이지만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 시기의 정황을 제재로 한 소설이 바로 김동리(1913-1995)밀다원시대(19554월호 현대문학)이다. 이 시기는 부산 지역 독자적 문단이나 시단은 형성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러나 피난 문인들과의 교유나 그들의 활동에 자극되어, 앞으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할 발판을 마련한 시기였으며 특히 중고등학교 문학도들에게는 유명한 문인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훗날 시인 혹은 소설가 지망의 꿈을 키웠다.

이 시기에는 해방 이전에 문단에 공식적으로 데뷔한 사람은 아니라도, 연령적으로 해방 이전에 중등교육을 마쳤거나 전문학교나 대학을 중퇴하였거나 졸업한 사람들이 언론계와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해방과 더불어 작품 활동을 하다가 피난 온 서울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자극도 받아 수복 후 지역신문과 경남공론문예신문에 활발한 작품활동을 한다.

우선 시인으로서는 최초로 1958년 부산시문화상(2,1회 수상자는 소설가 이주홍<1906-1987>이었음)을 받은 홍두표洪斗杓(1904-1966) 시인을 들 수 있다. 그는 진주 문산면 지역 토호의 외아들로 출생하여 향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중앙고보를 거쳐 동경 시부야 농과대학을 중퇴하였다. 임시수도 시절 서울에서 피난 온 문인들을 여러 면에서 도와주었으며, 특히 오상순 시인을 지극히 모셨다. 환도 직후 한국문인협히 부산지부장을 맡아 오랫동안 지역 문화예술 활동에 공헌하였다. 그는 진주의 영문嶺文경남공론3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는 생전에 시집을 한 권도 발간하지 못했으나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지부장 박문하)에서 발간한 부산문학5(1973,작고문인특집)13편의 시가 수습되어 있다.

손중행孫重行(1907-1973) 시인은 경남 합천군 초계면 출신으로 1927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를 2년 반 동안 하다가 해방될 때까지 향리에서 농촌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 그는 주로 부산의 언론계에 투신하여, 연합신문,국제신보를 거쳐 1954년부터 부산일보편집국장, 논설위원, 논설주간, 주필, 이사 등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주로 사설, 칼럼, 촌평인 고정란 <동남풍東南風>을 집필하였으며 1967년에는 저서 동남풍을 엮기도 했다. 그는 동년배의 다른 시인들보다 비교적 오래 생존하였으나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작품 역시 부산문학5집에 8편이 수습되어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언론인답게 조국애를 강조한 것이 많다. 그는 1962년 언론인의 공적으로 제1회 경남문화상을 받았다.

홍원洪原(1907-1967) 시인은 경남 창원군 웅촌면 출신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중학교를 다니다가 도일하여 일본 山口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946자유민보창간 당시 편집국장으로 참여하여 1956년 폐간될 때까지 주간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는 동시대의 시인들이 시집을 가지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제1시집 (자유문화사,1954)을 청마 서문으로 발간하고, 2시집 홍원시집(자유문화사, 1956)을 발간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허무주의 적막감이 흐르고 있으나 내일을 향한 동경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박영환朴英煥(1913-1995) 시인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신으로 일제말 조선일보 함양지국장으로 있다가 해방 이후 부산으로 내려와 동향인 하기락과 함께 자유민보논설위원을 지냈다. 그는 본명으로보다 호 노석奴石으로 시단활동을 하였다. 그는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연맹 기획조직부장, 대한독립촉성경남협의회 연락선전부장, 문총경남지부 사업선전부장도 지냈다. 그는 휴전 직후부터 1956년까지는 진주의 경남일보의 편집국장과 진주에서 연간지영문嶺文의 주간, 문총진주지부 문학부장 등을 지냈다. 그 동안 그는 영문경남공론등에 시를 발표한다.

1956년 부산으로 이거하여 월간지 민주조선등에 간여하나 단명으로 끝난다. 1973년에는 회갑 기념이자 생애 유일한 시집 바위의 염원念願(예문관)을 발간한다. 1983년에는 7순 기념으로 시와 수필이 수록된 백운산 뻐꾸기(태화출판사)를 엮기도 하였으며 1988년에는 제1회 우봉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부산지역 문단 후배들이 힘을 모아 역시 시문집 행운유수行雲流水를 엮기도 한다. 말하자면 만년에 그는 10년마다 책을 하나씩 엮었다. 1950년대의 노석의 초기 시는 대상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리움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평생지기였던 청마와 궤적을 같이 한다.

박영한朴英漢(1917-1956) 시인은 해방기의 유일한 교사 출신이다. 그는 동래 출신으로 1936년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사범 연습과를 마친 후 해방 전에는 초등학교교사를 하다가 해방이 되자 경남여중(1945-1950), 경남여고(1951-1953),부산여중(1953-1956) 교사로 근무한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경남여중 동료교사였던 오영수의 습작소설을 읽어주고 김수돈金洙敦(1917-1966)의 첫 시집 소연가召燕歌(문예신문사,1947.2)의 맞춤법 교정도 해준다. 김수돈의 이 시집은 해방 이후 부산에서 발간한 첫 개인시집이다. 동래중학을 거쳐 1950년 경남 진해중학교 교사로 옮기면서 부산 시단을 떠난다. 그러나 그는 일제 강점기의 문예지 文章에 정지용 시인으로부터 2(1939.5월호-소연가,고향,10월호-동면,」「낙타)추천을 받은 바 있는 시인이다. 박영한 시인은 문단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박민朴民이라는 필명으로 개인시집산역山驛의 밤((문예신문사, 1949.5)을 발간한다. 이 시집은 앞의 김수돈의 시집에 이은 해방 이후 부산에서 발간한 두 번째 개인 시집이다. 그의 작품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다. 해방기의 시인 가운데 사물에 대한 인식력과 정서의 객관화하는 수사력이 돋보이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수술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인 19395월호 文章에 이태준 소설가로부터 단편소설카추사에게를 추천받은 정진업鄭鎭業(1916-1983)시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60년대 이후 마산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195341일부터 19545월말까지 국제신보 문화부장으로 있었다. 그는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였고 해방 전 평양의 숭실전문 문과에 수학하였으며, 교사로 극단 황금좌의 전속 배우를 지냈고 해방 직후에도 최초의 문예영화 해연海燕에 출연하였다. 6·25전쟁기인 1951년 수도 육군병원에서 주관한 영화 3천만의 꽃다발을 끝으로 배우는 청산하였다. 해방기인 1948년 서울의 시문학사에서 제1시집 풍장風葬을 냈는데 서문은 소설가 김정한이 후기는 김용호가 썼다. 국제신보 문화부장 시절인 1953615일 제2시집 김해평야를 남광문화사에서 냈는데 서문은 6·25 전쟁기에 부산으로 피난와 남광문화사 주간을 맡으면서 부산대학교에 출강하였던 김용호가 서문을 썼다. 그는 제1시집부터 그의 정렬적인 베우 기질을 반영하듯이 현실에 대하여 비분강개하였다.

이 시기에는 아직까지 부산 시단의 동인 활동이나 시적 경향의 집단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정부가 환도하여 부산에 머물던 많은 문인들이 서울로 돌아갔으나 전부터 부산에 있던 시인들과 동아대학교와 부산대학교를 중심으로 임시수도 시절부터 활동하던 시인들에 의하여 부산 시단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2. 환도 직후부터 직할시 승격 직전(1953-1962)까지의 부산 시단

 

(1)조향의 초현실주의 지향의 모더니즘

 

우선 조향趙鄕(1917-1984) 시인 중심의 초현실주의 문학활동 즉, 모더니즘 지향성을 들 수 있다. 조 시인은 경남 사천군 곤양면 출신으로 본명은 섭제燮濟이다. 창소년기를 진주에서 보내면서 1937년 진주고보(오늘날의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 해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 후 초등교사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와 전문부 상경과를 다닌다. 그러다가 편지 사건으로 필화를 입어 마산으로 돌아와 초등교육에 종사한다. 해방 후 잠시 초등학교 교감을 하다가 1946년 마산상고 교사를 하면서 시동인지 로만파魯漫派를 주재한다. 1947년부터 동아대학교 문학부 국문학전공 전임강사 발령을 받아 부산문단에 편입하게 된다. 그는 대학교수가 되면서 6·25 전쟁 직전 서울의 <후반기동인회> (이한직, 김경린, 박인환, 이상로)에 참여한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동인지는 발간 못하고 피난지 부산에서 이한직, 이상로가 빠지고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가 가담한다. 그러나 이 동인회는 정치집단으로 오해를 받아 해체된다. 그러는 가운데 1952년 그의 대표작 바다의 층계層階Episode를 자신이 출판인으로 되어 있는 자유장自由莊에서 발간한 일종의 대학교재 현대국문학수現代國文學粹에 발표한다. 이 작품은 프랑스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아 다다이즘의 경향이 두드러진 것이다. 그는 1953년 현대문학연구회現代文學硏究會를 조직하여 이듬해에 회지 1집을 발간한다. 1956년에는 감마Gammas 동인회를 결성하여 동인지 Geiger(정보 탐지기란 뜻) 1집을 발간 한다. 1962년에는 일요문학회를 결성하여 일요문학1집을 엮기도 한다. 그는 부산 시인으로는 유일하게 1961년 발간한 신구문화사 판 세계전후문학전집8권인 한국전후문제시집13편의 작품과 시작 노트 데페이즈망의 미학이라는 일종의 초현실주의 시론이 실리게 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부산예술문화단체 대표, 문총지부 대표위원 예총지부 지부장 등으로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는 한편 1960년에는 동아대 문리대학장 1963년에는 도서관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966년 동아대학교 설립자에 도전한다는 오해를 받아 동아대학을 사직하고 서울로 떠나면서 부산 시단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초현실주의 경향의 모더니즘은 동아대학교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부산시단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조향 시인과 동인활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 지속적으로 시 창작을 하여 시인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노영란, 구연식, 이민영, 조봉제, 정영태 등이 있다.

유일한 여류시인 노영란盧映蘭(1924-1991) 시인은 1950년대부터 부산에 머물며 같이 동인 활동을 했으며 다만 1962년부터 동아대 가정과 전임강사로 잠시 강단에 섰다. 그는 경남 함양 출신으로 일본제국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해방 직후 진주여고 교사를 지냈다. 1947년에는 진주시인협회(영남문학회의 전신) 회지인 등불의 창간 당시부터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황혼,호수등을 발표하였다.

노 시인은 1950년대에 이미 제1시집 화려한 좌표座標(자유장, 1953)와 제2시집 흑보석黑寶石(금문사,1959)을 발간하였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소 악마주의적이었다. 그는 1965년경 연탄가스 중독으로 3일간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 9년 동안 가족들의 보호아래 투병생활을 했다. 1974년 회복하여 소생기라는 수필을 재부 작가·작품론에 발표하면서 집필활동을 재개한다. 그 후 1980년대에는 서울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제3시집 현대의 별(한국문화사,1980)을 발간한다.

구연식具然軾(1925-2009) 시인은 경남 사천시 사남면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방되기 직전인 19453월 서울의 중앙고보를 졸업했다. 그리고 피난 시절인 19523월 동아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경남여고 국어교사로 있으면서, 19544월 동아대 국문과 강사로 출강하다가 19594월 국문과 조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조향 시인이 떠난 1966년부터는 동아대학교의 유일한 시학 교수가 되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입체파 문학연구와 3·4문학동인 등을 연구하였으며, 그 결과 그의 문학박사 학위 논문을 보완한 한국현대시의 고현학적考現연구(시문학사,1979)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동아대학교 재직할 때나 정년 후 작고할 때까지 모더니즘 지향성의 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하였으며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50년대 발표한 시편들을 모아 제1시집 검은 산호珊瑚의 도시都市(국제신보사 출판부,1962)를 엮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검은 색이 상징하는 절망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면서 감정이 배제된 비정한 도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민영李民英(1927-2015) 시인은 조향 시인이 주도한 현대문학연구회 회원이지만 그 이전에 장호(1929-1999),고원(1925-2008) 시인과 더불어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협동문화사,1952)을 발간하였다. 그는 경남 김해시 상동면 출신으로 해방 직전 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부산 동성고등학교와 동아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92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시집화도花禱일기(친학사,1965),바람부는 언덕(시로,1988), 시선집송사松史시초(시로,1992)를 발간하였다. 3인시집을 발간한 두 시인은 부산을 떠났지만 그는 끝까지 부산을 지켰으며 고등학교에서 많은 시인 지망생 제자들을 키웠다. 3인 시집 발간 이듬해인 1953425일 파도다방에서 <3인 시집의 감상회>라는 문학의 밤을 가졌는데 사회 김용호, 개회사 오상순 그리고, 이하윤, 양명문의 논평 등 순서 맡은 시인들의 면면을 봐도 피난 문단의 풍성한 행사였으며 3인 시인 자작시 낭독, 여성독자들의 낭독이 더하여졌다. 그 역시 3인집 수록 검은 지표연작시에서 검은 색이 상징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조봉제趙鳳濟(1926-2012) 시인은 조향 시인의 아우로 일제 강점기 일본 후쿠오카 현립 이토시마 중학을 거쳐 동아대 국문과를 구연식 시인과 같은 해인 1952년 졸업하였다. 남성여고 교사를 거쳐 1950년대 후반 동아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66년 형이 동아대 교수를 물러나자 그도 부교수 직위에서 물러나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는 그의 형 조향이 주도하는 동인회들의 실무를 맡았으며 문예신문부산일보등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1년에는 그 동안 발표한 시들을 모아 제1시집 가을 바다와 묘비명(친학사)을 발간하였다. 그의 작품 경향은 주지적이며 초현실주의 경향이 짙었으며 난해시를 옹호하는 시론을 발표한 바 있다.

정영태鄭永泰(1928-2003) 시인은 일본 경도에서 태어나 토야마 상업학교를 중퇴하고 해방직후인 1946년부터 젊은 나이에 부산매일시문, 항도일보, 부산방송국,민주신보등에서 기자 혹은 부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1974국제신문사업부장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난다. 그는 아동문학도 창작하였고, 산악인, 수석인 그리고 파스텔 화가였다.

그는 문예신문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류근주, 한승권과 함께 3인 시집전환하는 새벽(자유장, 1953)을 엮었다. 그의 제1시집 검은 태양의 계보系譜(자유장,1958) 역시 1950년대의 중요한 시집이며 시집 속에 보이는 역설적 표현은 그의 모더니즘 지향성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은 문명비판적이면서 절망의식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핀 여섯 사람의 시에 등장하는 공통적인 특질은 그들의 시집이나 시의 제목 속에 수식어로 혹은 상징화된 사물로 나와 있는 검정색 이미지이다. 이것들은 6·25전쟁과 전후에 만연한 절망의식을 모더니즘 수법으로 보여준 것이다

 

(2) 신작품新作品의 주지적 서정주의.

 

1950년대에 처음으로 지속적으로 발간된 동인지는 기성 시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앞의 조향이 주도한 동인지는 한결같이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었다. 그러나 임시수도 시절인 19523월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 와 있던 전시연합대학과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젊은 대학생들 가운데 시인 지망생이 중심이 되어 발간된 동인지가 바로 신작품新作品이다. 신작품19523월 창간되어 195412월까지 모두 여덟 번에 걸쳐 발간되었다.

신작품1(1952.3)부터 6(1953.9)까지는 프린트 판으로 시에 한정되었으나, 7(1954.3)8(1954.12)은 활판으로 인쇄되었으며 시에 대한 평론이 추가되었다.

1집부터 8집까지 시가 총 72, 평론 4, 번역문 1, 그리고 3-4편의 수상이 실려 있으며 그 동안 참가한 동인들은 모두 28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1집부터 8집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시를 발표한 동인은 송영택이다. 다섯 번 이상 참가한 동인은 천상병, 고석규, 김재섭, 이동준, 김일곤 등이다. 송영택, 천상병, 이동준은 창간 멤버였고, 김일곤은 2, 김재섭은 3, 고석규는 4집부터 가담했으며 이들이 주축 멤버였다.

19506625 전쟁 나기 직전 부산중학 6학년인 송영택 (요즈음 부산고등학교 3학년)의 주도로 부산 시내 남녀 중학교 5-6학년 학생 10여명이 <서지瑞枝동인회>를 발족시켰다. 그들이 모두 중학 6학년을 졸업하고 다른 대학으로 진학을 했는데, 6·25 전쟁기라 모든 대학이 부산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모일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 말자 송영택(독문과)과 천상병(상학과) 2(사실 최계락도 참가할 계획이었으나 원고가 훼손되어 불참)이 만든 동인지 처녀지處女地의 경험도 바탕이 되어 대학생 연합의 동인지 ·신작품이 창간된 것이다. 6집에는 조영서, 손경하, 유병근, 최용만, 하연승 등이 새 동인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7집에서는 고석규가 모더니티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발표하여 평론가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7집에는 이미 문예19501월호에 P발레리 단고斷稿를 발표한 이래 활발하게 평론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김성욱도 나와 내 주위의 신화라는 평론을 발표함으로써 신작품에 참가하는 최초의 기성문인이 되었다. 비록 시와 평론을 합하여 40여 페이지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아 국제신보에 소개되기도 했다. 마지막 호인 8집은 80여 페이지로 지면도 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미 네 권의 시집을 발간하여 해방직후부터 당당한 기성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던 김춘수金春洙(1922-2004) 시인도 시 꽃밭에 든 거북과 서정주의 작품을 해석한 평론 서정적 인간을 발표하면서 참여한다. 김춘수 시인은 1954년부터 1957년까지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시간강사로 영도에 있던 연세대 부산분교에는 전임대우로 출강하고 있었다.

7집과 8집을 의욕적으로 발간한 신작품동인지는 다수의 동인들이 정부 환도와 더불어 대학을 따라 서울로 돌아가게 되고, 고석규 주도의 부산대 출신 동인들이 새로운 동인회를 구성하여 시조詩潮1952년부터 1953년까지 여러 권 내게 되면서 구심점이 약화되어 8집으로 중단하게 된다. 그러나 신작품이 가지고 있던 정신과 패기는 시조와 부산대 강사 김춘수와 대학원생 고석규가 주재한 시연구詩硏究(1955)에 계승되었다. 신작품7·8집의 평론이나 시연구의 특집 <모더니즘 비핀>을 볼 때 조향 시인 중심의 초현실주의를 기반으로 한 모더니즘 경향과는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작품은 서정주의 경향이 농후했다. 그들 가운데 부산시단과 인연이 있는 대표적 시인 몇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송영택宋永擇(1933-) 시인은 부산시 동대신동 2가에서 출생한 부산 토박이로 부산중학 6학년 때부터 동인활동을 하다가 피난와 있던 서울대 독어독문과로 진학했다. 그는 천상병과 함께 신작품동인의 산파역을 했으며 서울대학교가 서울로 돌아간 뒤에는 방학 때 내려와 동인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동인활동 중이던 1953년 봄 6·25 전쟁으로 발간에 난간이 많았던 문예신춘호와 9월호에 소녀상이라는 같은 제목의 시로 2회 추천 받았다. 그러나 문예1954년 폐간되고, 19551월에 창간된 현대문학19562월호에 3회 추천 완료되어 동인 가운데 맨 처음으로 기성 시인이 된다. 그는 1955년 가족 모두와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간다.

그는 독문과 졸업 후에는 독일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번역문학가로 실력을 인정받아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의 독일시집 번역과 산문집을 번역한다. 그 가운데 칼· 히티의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휘문출판사,1961)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1960년대 초반 대학생들과 청년들에게 많이 읽혔다. 그의 작품은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사물에 대한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면서도 낭만적이며 서정적이었다.

조영서曺永瑞(1932-2022) 시인은 경남 창원 출신으로 동아대를 수학하다가 1953년부터 지역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자유민보를 거쳐 국제신보에서 편집부 기자로 있다가 19624월 편집부장을 마지막으로 서울의 동아일보로 옮겨 갔다. 그 뒤 조산일보편집부장, 편집부국장, 주간조선주간 등을 역임했다. 언론계 정년퇴임 후에도 계간지 문학예술을 주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2022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1952년 부산서 발간한 주간지 문예신문에 이미 1회 추천을 받았고, 서울의 월간지 문학예술19568월호에 벽에는, 19577월호에 3회 추천되어 시단에 데뷔하였다. 이 작품은 기억 속의 풍경 즉 내면의식을 감각화한 작품이다 제1시집 언어(삼애사,1969)), 2시집해빛 수사학(1979,일지사) 등에서 이러한 형상화 능력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즉 관념보다는 정서의 감각화 내지 사물화를 통한 주지적 서정시를 지향하였다.

신작품동인으로 기성 시단에는 데뷔하지 않았지만 요절한 고석규高錫圭(1932-1958) 평론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함남 함흥 출신으로 월남한 의사 고원식의 외아들이었다. 1952년 부산대 국문과에 입학하여 동인 활동을 주도적으로 한 것과 대학원 진학 후의 활동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19542월 동국대 재학 중이던 신작품동인 김재섭과 함께 2인집 초극超劇을 발간하였다. 여기에 고석규는 <청동의 계절季節>이라는 제목으로 5편의 평론을 발표하였고 ,김재섭은 <달과 암초暗礁>라는 제목으로 시 15편을 발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진작부터 평론가의 꿈을 가졌다. 그는 19583월 대학원을 졸업하는데 그 직전인 1957문학예술6회에 걸쳐 시인의 역설逆說이라는 평론을 연재하면서 평론가의 입지를 굳힌다. 그리고 석사논문 시적 상상력은 일종의 시론으로 그가 급서(1958419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직후인 19586월호부터 11월호까지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다.

그의 전집은 친구와 후배 평론가에 의하여 19935권으로 집대성되었다 .그리고 1995년부터 <고석규 비평상>이 제정되어 신예비평가에게 시상되고 있다. 2012년에는 그의 미망인이자 시인인 추영수(1937-2022)여사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고석규 평론가로부터 받은 서한을 어렵게 공개하면서 그의 유복녀 고명진(1958-) 여사의 노력으로 증보판 전집 5권이 도서출판 마을에서 발간되었다. 그의 시 149편은 전집 1청동의 관이라는 제목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시집을 묶을 계획에서인지 서시가 있으며 생사가 불명이신/어머님께/처음 이것을 드립니다라는 그의 친필이 수습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앞의 두 시인들에 비하여 실향민이기 때문에 슬픔과 그리움의 정서가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적 기질 때문에 정서는 직접 노출하지 않고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사물화 과정을 거쳐 형상화된다.

신작품동인으로 60년대 이후 많은 활약으로 부산 시단을 지켰던 두 시인으로 손경하와 유병근 두 시인을 들 수 있다.

손경하孫景河(1929-2019) 시인은 경남 창원 출신으로 부산대 상대 상학과를 나와 줄곧 부산의 중등교육계에 종사하다가 교장으로 1994년 정년퇴임했다. 그는 작고 직전 부산지역 신문의 인터부에서 마산상고 재학중이던 1949년 제1회 개천예술제에서 이형기, 박재삼에 이어 입상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부산대 국문과 출신 고석규와 어울려 신작품동인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는 과작의 시인이었다. 1985년 첫 시집 인동忍冬의 꿈(예문관)을 낸 이후 2015년에 제2시집 그대 홀가분한 길손으로(산지니)을 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 19741019일 창간호를 발간한 부산시인협회 연간지 남부의 시부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였다. 1977년제 4호부터 199118호까지 김규태, 허만하, 이형기(9호까지 함)와 함께 편집위원으로 수고했다. 부산시인협회가 회장 체제로 전환한 것은 19894월 허만하 시인을 제1대 회장으로 추대하면서부터이고 초창기는 편집위원 공동 대표체제였다. 따라서 초창기의 부산시협의 대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1989년 회장 체제로 전환한 1대 때에는 작고한 박현서(1935-1992) 시인과 함께 부회장으로 수고했다. 그의 제1시집에서는 사물과 현실에 대한 절제된 인식을 담담하게 표현하였는데, 2시집도 노시인의 오랜 삶을 되돌아보는 관조의 자세에서 특히 노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로 채워져 있다.

유병근劉秉根(1931-2021) 시인은 경남 통영 출신으로 6년제 통영중학을 나온 이후 줄곧 군부대의 전파 담당 전문병사로 제대 후에는 같은 직종의 군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통영중학 시절 김춘수 시인의 제자로 시에 눈을 떴으며, 해군 병사로 근무할 때 윤동주 시인의 동생인 윤일주(1927-1985) 시인을 대위로 만나 시에 입문하게 되었다. 1970월간문학에는 시 봄빛으로 정식 등단한다. 그는 수필로도 일가를 이루고 있다. 그는 1978년 첫 시집 연안집沿岸集(연문사)을 낸 이래 2017년에는 시집 꽃도 물빛을 낮가림 한다(작가마을)를 제14시집으로 내었다. 거의 2년 만에 1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그리고 수필집도 10권을 내었다. 그의 시는 이미지 전개가 환상적이며 날카롭다. 그림으로 비유하면 해체된 풍경화이면서도 엄격할 정도로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 그는 2021423일 담도암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가 별세하였다

역시 신작품 동인으로 경남 창원에서 시작활동을 하면서 노년을 보내고 있던 하연승河然承(1933-2020) 시인이 202046일 별세하였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진주고와 부산상대 경제과를 나와 경남지역에서 지방 공무원 생활을 했으며 시집 이슬의 탄생(1997)나비의 생태학(2007)을 발간했다.

 

(3) 시문詩門의 현실 비판과 반전사상

 

다음으로 환도 직후에 활발하게 시작활동을 한 시인들의 동인지로 앞의 두 경향과는 다른 것이 시문詩門이다.1(1954.11.)2(1955.10)만 발간한 동인지이지만 1950년대 시의 특성 가운데 한 측면인 리얼리즘 지향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동인으로는 김태홍(부산고 교사), 안장현(남성여고 교사), 손동인(경남고 교사)이 있다. 그러나 손동인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로 데뷔하였으나 동인지에는 소설만 발표하고 있기 때문에 언급의 대상이 안 된다.

김태홍金泰洪(1925-1985) 시인은 경남 창원에서 출생하였으며 초등학교교사를 거쳐 해방기에 마산여중 6년제(현재 마산여중,) 마산상고 등에서 국어교사를 하면서 1950년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을 졸업했다. 마산에서 문단활동을 하다가 1954년부터 부산에서 중등 국어교사로 있었다. 주로 부산고등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한성여대(현 경성대학교)와 부산여대(현 신라대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부산일보논설위원을 겸하여 4.19 혁명 때에는 부산일보에 논설과 시로서 현실참여를 했다. 5.16 직후 구금되면서 교원에 해직되었다가 1963년 복직되기도 했다. 부산시 교육청 연구사와 연구관으로 부산시 중등 교육계의 시조 부흥 운동에 일조를 했으며 감만중 교장을 거쳐 충렬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중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해방기인 1947년 염주용의 문예신문에 서정시 고향을 발표하였으며 1950년에 제1시집 땀과 장미와 시(흥민사)를 발간하면서 시단에 등장했다 초기의 서정시 지향성은 동인지 시문을 거쳐 제2시집 (자유문화사,1954), 3시집조류潮流의 합창(인간사,1958)부터 현실참여 경향으로 변한다. 그의 생전의 마지막 저서인시와 산문(신한출판사,1984)에서 표지에다 다른 제목으로 시와 사회성을 붙인 것으로 보아도 그러한 경향을 알 수 있다. 그는 6권의 시집과 1 권의 시선집, 시론집 수필집을 가질 정도로 왕성한 창작욕을 가지고 있었으나 만년에는 투병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안장현安章鉉(1925-2003) 시인은 경남 김해시 진영읍 출신으로 1954년 동아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남성여고에 근무했다. 그는 1950년대 말 서울의 무학여고로 올겼다가 1963년부터 부산고등학교에 근무했다. 그러다가 2년제 부산여자대학에 국문과가 존속하던 70년대 초반까지 교수를 했다. 국문과 폐과로 다시 서울로 올라가 공립중등학교 국어교사를 하다가 정년퇴임을 했다. 정년퇴임 후에는 1956년 창간한 계간지 한글문학발간에 정열을 쏟았다. 한글문학1972년까지 계간지 체제를 유지했다. 창간호부터 한글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단행했다는 데서 그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다. 그 뒤로도 비정기적 발간에 힘을 쏟았으나 정상적인 발간은 어려웠다. 그가 작고할 때까지 그 자신이 한글문학회 종신회장을 하면서 지속되었다. 지금은 제자들과 한글운동가에 의하여 계속 발간되고 있다. 2005년 그의 부산고등학교 제자인 류자효 시인에 의하여 그의 별세 2주기 기념 추모문집 안장현과 한글문학(한누리미디어)이 발간되었다.

그의 제1시집 어안도魚眼圖(인간사, 1957)는 발간 당시부터 그의 역사의식이 심화되고 상황의식이 표출되면서 동시에 간결한 시어와 섬세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특히 전쟁에서는 6.25 전쟁의 아픔을 간결하게 형상화한 반전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고희 기념시집 빛의 소리(시와시학사,1997)까지 5권의 시집을 발간했으며 수필집도 5권이나 발간했다.

이상의 두 시인은 김태홍의 자유당 정권에 대한 비판과 안장현의 6·25전쟁의 비정을 바탕으로 한 반전사상 등은 1970년대 주류가 되는 리얼리즘 시의 선구자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3) 문예지와 월간지 그리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들

 

박철석朴哲石(1930-2016) 시인의 경우 19557월호 현대문학까마귀가 초회 추천된 뒤 자유문학19588월호에 문학평론 순수시비평론이 당선되어 시인과 비평가를 겸하게 되었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출신인 그는 해방 직후부터 해동고등학교와 동아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문예반 담당으로 많은 시인들을 길렀다. 그는 부산여전 교수를 거쳐 동아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하다가 1995년 말 정년퇴임하였다. 퇴임 후에도 부산의 원로 시인으로 작품 활동과 평론 활동을 하다가 2016217일 숙환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다가 별세했다.

그는 제1시집 목련木蓮(영남문학회,1954) 2시집까마귀(갑진출판사,1956) 2권이 50년대에 발간되었으며 그 외 하단의 바람(1989),외로운 귀 하나(1995), 계란 밥(2001),젊은 악사를 위하여(2006)등이 있다. 연구 논저도 한국현대시인론,한국현대문학사론,새 발굴 유치환의 시와 산문도 남겼다. 그의 평론이 노장사상에 바탕을 둔 한국의 전통적 자연관 탐구와 변용이 주축을 이루고 있듯이 그의 초기 시세계 역시 그렇다. 2018년에는 그의 삼남 박영산이 유고시집 산다화를 엮었다.

조순曺純(1926-1995) 시인은 경남 의령군 화정면 출신으로 해방 직후 진주사범학교를 나와 중앙대학교 정치과를 졸업하고 부산상고, 부산여고, 경남여고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일찍 퇴직했으나 교육계에 계속 종사하였고 만년에는 경남대학교 대학원을 나온 후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19584월호 자유문학에 시 항아리를 발표한 이래 주로 자유문학을 통하여 1950년대 말에 집중적으로 시를 발표함으로써 50년대 시단에 편입되었다. 그는 1961년 제1시집 전후戰後에 내리는 비(조광출판사)를 엮은 이후 5권의 시집을 엮었다. 특히 만년에는 갈숲동인을 주재하다가 심장질환 때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사려 깊은 인품을 가지고 이었으며 만년까지 낭만과 시적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그의 초기시는 자연이나 사물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과 6·25 전쟁 이후의 모순된 현실인식을 형상화한 두 경향이 있다.

박재호朴載頀(1927-1985) 시인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수학했다. 1955문학예술12월호에 작은 고동鼓動이 추천되고, 사상계195910월호에꽃은 흔들리다2편이 발표되면서 시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70년대 초반까지 부산문협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나 1970년대 후반 경남신문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마산시단에 편입하였으며 1979년에는 경남시인협회 창립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제1시집석화石花시집1960년에 엮었다. 그의 시는 초기부터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에다 따스하고 인정어린 정서를 부여하였다.

이상의 세 시인 말고도 50년대 후반기에 문예지와 월간지로 등단한 시인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김규태金圭泰(1934-2016) 시인을 들 수 있다. 그는 대구에서 출생했으나 청소년기에 부산에 정착하여 동래고등학교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 재학시절인 1956년 문리대문학회에 가입하여 회지문학에 이일, 성찬경, 유종호, 이어령, 오상원, 송욱, 박이문 등과 함께 작품을 발표했다. 1958년부터 부산지역 언론계에 투신하여 국제신문문화부장, 사회부장, 정경부장 등을 거쳤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언론병합으로 부산일보로 옮겨 논설위원, 논설주간을 역임했다. 1990년에는 복간된 국제신문으로 돌아와 논설주간으로 정년하였으며 1995년 이후에도 논설고문으로 있으면서 국제신문 50년사발간을 주도했다. 매주 화요일 김규태 칼럼4년 여 썼다. 그리고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을 연재하여 부산과 인연이 있는 문인, 예술인의 이야기를 남겼다. 이 글은 그 사람들(말ᄊᆞᆷ,2009)로 엮어져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되었다.

그는 1957문학예술로 추천받고 1959사상계아직도 잊지 않을 것을 위하여로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하였다. 1964년 서울의 현대시동인으로 참여하여, 허만하, 이유경, 주문돈, 김영태, 정진규, 이승훈, 박의상, 이수익, 김종해, 마종하, 오세영 등과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는 과작의 시인이었다. 그의 첫 시집은 1969년 삼애사에서 철제鐵製 장난감오늘의 한국시인시집 시리즈로 발간하였다. 그는 제2시집 졸고 있는 신(1985), 3시집 들개의노래(1993) 그리고 마지막 시집인 흙의 살들(2005)을 남겼다. 그는 초기부터 견고한 이미지로 사물에다 내면적 심리현상을 밀착시키는 작품을 썼다. 이러한 기조는 계속 유지되었다. 그의 첫 시집 제목을 보아도 이러한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1959사상계를 통하여 등단한 부산 출신으로는 서림환徐林煥(1934-2006) 시인 이 있다. 그는 경남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였다. 19599월호에 음악2편이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시단에 데뷔하였다. 그런 후 불란스 유학을 떠나 70년대 초반에 귀국하여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인문대 불문과 교수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 후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귀국 후 그는 간간이 시를 발표하였으나, 프랑스 시 번역과 교수로서 학생들 가르치기에 전념하였다.

이유경李裕璟(1940- ) 시인은 경남 밀양시 하남면 출신으로 경남고등학교와 외국어대학 불어과를 졸업하였다. 그의 본명은 이유곤이다. 그는 경남고등하교 3학년 졸업 직적인 195911국제신문신춘문예에 과수원에서가 당선되어 시단에 데뷔하였다. 그때의 심사위원은 김춘수 시인과 김용호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 해 3월호 사상계에 이유경이라는 필명으로 과수원시편 3편이 당선되었다. 말하자면 대학 입학하기 전 이미 그는 기성 시인이 된 것이다. 대학 재학중 서울 시내 대학생들 동인회인 <화요회>에 참여하였고, 재학 중 군에 입대하여 제대한 후인 1964년부터 현대시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는 졸업직전인 1965국제신문에 입사하여 1968년 조영서 시인의 천거로 조선일보로 옮길 때까지 주로 편집부에서 일했다. 그는 국제신문에 근무하면서 결혼도 했고 두 딸의 아버지가 됐다. 그는 1998스포츠 조선에서 정년퇴임 후 3년간 부산에 머물며 낚시 관련 월간잡지를 만드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학시절과 이 시기에 쓰여졌는데 주로 영미 시의 영향을 받은 모더니즘 기법과 다양한 제재로 현실을 풍자하고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기의 시를 1969오늘의 한국시인시리즈이자 그의 첫 시집 밀알들의 영가(삼애사. 1969)에 엮었다. 그러나 그는 70년대 이후 제2시집하남下南 시편(일지사,1975) 이후 주지적서정시의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초략도(문학세계사,1983),몇날 째 우리 세상(문학수첩,1998),자갈치 통신(황금알2007)바다로 간 강(책만드는 집,2017) 8권의 시집과 시선집 우리의 탄식(고려원,1986)1 권을 엮었다.

한찬식韓讚植(1921-1977) 시인은 함남 함주 출신으로 6.25 전쟁 직전에 월남하여 전쟁기에 부산에 정착한 시인이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미술학교에 다닌 것을 바탕으로 대양중학교 미술교사를 오래 했다. 그는 그 당시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58자유문학섭리攝理(1958.8) 물무늬(1959,8),하류(1959.12) 등이 양명문楊明文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등단 전에 부산 지역의 시동인회에 참여한 적은 있다. 1시집 낙엽 일기1974(친학사) 엮었다. 그는 지병으로 일찍 작고했으나 자녀들과 친지 등의 협조로 유고집 다시 섬에서(시문학사,1978) 한찬식 전집(빛남,1999)를 엮기도 했다. 힌 시인은 화가로서도 추상화를 주로 그렸는데 그의 초기작은 내면의식에 대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후기에는 실향민의식이 형상화된 것도 있다.

1959-1960자유문학으로 등단한 마지막 시인은 임수생林秀生(1940-2016)이다. 그는 부산 출신이었으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하동에서 졸업하고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거쳐 서라벌예술대학을 수료하였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인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자유문학195911월호에 대화,19604월호에 미스 강에의 연가,19619월에 동양철학 초등으로 3회 추천 완료하여 시단에 데뷔하였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1966경향신문일등항해사로 가작, 1971」《조선일보임진강의 딸기로 가작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에는 서정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철저한 리얼리즘 경향의 시를 썼으며 현실참여에도 행동적일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196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밤의 편력으로 당선된 박태문(1938-1992)시인은 부산상고 시절부터 시재가 뛰어 났다. 그는 고등학교도 중퇴하였으나 22세 되던 1960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는 시인이라 사무직을 제안하는 것을 마다하고 현장 노동자로 살아간 진정한 민중 시인이었다. 그러나 생전에 밤의 편력(1975),풀 하나가(1983),축복받을 일 하나 없어도(1989) 등 세 권의 시집을 엮었다. 그의 친구들과 후배 시인이 뜻을 모아 1995박태문전집을 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