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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7.23 12:25
별빛 기행의 추억
/윤일현
악동 서너 명이 드디어 냇가에 다다랐다. 꽤 먼 거리를 빨리 걸어 온몸이 땀에 젖었다. 물가 너른 바위 위에 옷과 신발을 벗었다. 해가 긴 여름이라도 그믐밤엔 9시가 넘으면 샛강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나중에 못 찾는 일이 없도록 벗은 옷은 한군데 모았다.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게 돌과 신발을 옷 위에 얹었다. 대개 검정 고무신이지만, 백 고무신을 신은 아이도 있었다. 별빛만으로도 흰색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흰 고무신은 나중에 옷을 찾을 때 도움이 됐다. 한 시간 남짓 물속에서 장난치며 우리는 물을 많이 먹었다. 어떤 날은 하도 냇물을 많이 마셔 배가 부를 때도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물이라 배탈이 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멱 감으러 갈 때도 좋았지만, 돌아오는 길은 정말 좋았다. 논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은하수는 우유를 뿌려놓은 듯, 쌀뜨물을 부어놓은 듯 신비롭고 황홀했다. 우리는 북두칠성 외의 별자리 명칭은 아는 것이 없어 친숙한 별에 멋대로 이름을 붙이곤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다.
2011년 본사 주최로 학생과 학부모를 위한 '영천 별빛 기행'을 꽤 여러 차례 실시했다. 인기가 좋아 사고(社告)가 나가면 바로 마감됐다. 일요일 아침 신청자들은 신문사 1층에 모였다. 먼저 영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주 담는 체험을 했다. 자기가 버무린 포도는 플라스틱병에 넣어 집으로 가져갔다. 오리장림을 함께 걷고 나서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자천교회 등을 둘러보고 해 질 무렵에는 보현산 천문대 아래 별빛 마을에서 저녁을 먹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별자리 설명 장소로 이동했다. 천문대장님이 직접 나와 하늘에 레이저 광선을 쏘아가며 별자리 명칭과 찾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별자리 위치는 달랐다. 지금도 어느 여름날을 잊을 수 없다. "보세요. 하늘 한가운데로 은하수가 흐르고, 그 위로 백조가 날고 있지요? 은하 양쪽에는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을 기다리며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천문대장님이 독수리자리 알타이르(견우), 거문고자리 베가(직녀), 백조자리 데네브를 레이저 빔으로 연결해 대삼각형을 그렸다. 이어 헤라클레스자리, 전갈자리, 궁수자리 등등을 설명해 주었다. 별빛 기행에 참가한 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 별밤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오늘의 학생들은 방학이 와도 그렇게 즐겁지 않다. 어느 학생이 방학은 학원에 수강하는 과목이 늘어나는 특별 과외 기간이라고 했다. 초등 의대반까지 거론되는 현실이니 할 말이 없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남모르게, 남보다 빨리, 남보다 많이 시켜야 한다'를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학부모가 많다. 이런 심리를 이용한 선행학습은 교실 붕괴의 주범이며 교사의 수업권을 방해한다. 특히 '남보다 많이, 남보다 빨리'는 학생들의 휴식권과 수면권 등 기본적인 행복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지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향해 가고 있다. 챗GPT, 휴머노이드 로봇, AI 등 첨단 과학은 획기적인 대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현재 기준으로 특정 직업을 맹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정 가치관을 주입하는 훈육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새로운 것이 나올 때마다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로 배우려는 마음가짐과 학습 능력이 더 중요하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는 학습 능력과 함께 낯선 것에 대한 도전정신, 새로운 사조와 경향에 적응하는 유연성, 이질적인 것과도 기꺼이 대화하고 협조하는 소통 능력 등이 중요하다. 우리 아이들은 탐험가, 창조적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유소년기에 폭넓은 교양과 실력을 쌓으며 사고력을 배양하고, 사회 변화와 자연을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는 관찰 능력을 길러야 한다.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 지적 호기심을 위해서는 어린 시절 좋은 책을 읽으며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여름 오후 강변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불타는 노을에 붉게 물든 얼굴로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거나, 밤하늘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막연히 미지의 세계를 꿈꾸며 동경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
'영남일보 별빛 기행'을 위해 샀던 '별자리 여행' 책자를 다시 펼쳐본다. 별들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던 그 얼굴들을 잊을 수 없다. 방학을 아이들에게 온전히 돌려주면 좋겠다. 교실 밖의 다양한 경험이 미래 생존 수단인 창의력과 상상력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