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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7.12 11:04 수정일 : 2024.07.12 11:09
특별기고/ 천금성의 삶과 해양문학③
/김종찬 소설가
『黃江에서 北岳까지.』 집필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든 주선은 허문도 특보가 맡아 해 주었다. 그 첫 번째로 천금성은 장군의 장인이신 이규동 씨부터 만났는데, 전두환의 생도시절부터 둘째 딸 인 이순자 씨와 결혼하기까지의 갖가지 생생한 기억들을 아주 소상하게 회고해 주었다. 장군의 형인 전기환 씨 등 여러 형제들로부터도 장군의 과거사를 세세하게 들었다. 태어 날 때의 태몽 이야기와 당시 합천 주재소에 근무하던 일본인 순사부장 시오쯔끼 가즈야(鹽 月一夜)와의 다툼으로 아버지 전상우 씨가 먼저 만주로 도피하게 된 경위, 길림성에서 마적 단 등쌀에 못 견뎌 다시 대구로 되돌아오기까지의 험난한 역정, 그리고 대구에서 바로 학교 에 가지 못하고 신문팔이를 해야 했던 고난의 소년 시절 등등. 밤낮으로 매달려 두 달여 후인 10월 말에는 한 권 분량으로 충분한 원고를 탈고하기에 이르렀다. 원고를 다 읽고 난 허 비서관 (허문도 씨는 이 때 대통령 공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말했다. “수고했다. 각하께서도 읽어보셔야 하니까, 연락할 때까지 좀 기다려라.” 그러나 다시 두어 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답답해서 전화를 넣었더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그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영부인께서 보자고 하니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 라고 했다. 허 비서관의 안내로 천금성은 영부인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영부인이 말했다. “그 동안 자료를 수집하느라 고향 합천이며, 육군사관학교며, 전방의 제1사단까지 두루 방문한 것을 비서관을 통해 보고를 받았어요. 수고가 많았지요? 그런데 원고를 보니 내용 가운데 언급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더군요. 그건 나의 시집살이에 관해서인데, 작가는 왜 나의 시집살이 이야기를 빼버렸어요? 그때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세요? 신혼 초 여 섯 달이나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그런 다음 영부인은 더욱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지금 탈고된 원고를 보면 각하가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한 대목에서 끝나고 있는데, 그건 매우 잘못된 거예요.” 그러면서 허 비서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전기에 싹 빠져 있으니 이게 말이나 돼요? 사람들의 기억 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중요한 일도 깡그리 잊게 된다고요. 당시,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목숨 걸고 가담한 군 지휘관들이 지금 수도권 각 부대에 포진 하고 있으니 작가로 하여금 그들을 직접 만나도록 해요. 그렇게 해서 각하 생애에서 가장 격정적이면서도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던 당시의 상황을 세세하게 밝히도록 하세요. 그래야 그 사건의 실상을 잘 모르는 국민들이 다 알 수 있지요!” 영부인의 지시가 떨어지자 허 비서관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감히 거부 할 수는 없었다. 지엄한 영부인의 하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이 끝나자 영부인은 천금성을 바라보며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를 했 다. “작가 선생이 이만큼 고생을 하셨으니 이를 어떻게 보답해야 하지요?” 천금성은 큰 기대에 부풀어 그만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치도 않게 허 비 서관이 가로막고 나섰다. “영부인님, 그건 조금도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작가에 대해서는 우리 비서진이 적절 한 보답을 해주려고 계획하고 있으니까요.”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런데 허비서관의 말을 들은 영부인의 반응이 또한 걸작이었다. 아주 손발이 척척 맞았다. “아이구, 그래요? 그거 아주 잘했어요. 작가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으니 비서실에서 그 보답을 섭섭지 않게 해주어야 할 거에요.” 영부인과의 접견이 끝나자 천금성은 화가 잔뜩 나서 허 비서관에게 따지고 들었다. “아니 형, 지금까지 죽도록 일만 시켜 놓고 아무 것도 해준 게 없으면서, 도대체 비서실 에서 뭘 어떻게 해주기로 했단 말입니까?” 그러자 허 비서관이 툭 쏘았다. “아니, 그럼 넌 각하나 영부인 앞에서 돈 이야기를 꺼낼 작정이었나?” 천금성이 화난 표정으로 허 비서관을 노려보자 허 비서관은 이렇게 너스레를 떨며 다독거 렸다. “마, 걱정마라. 우리 당원만 해도 2백만 명이 넘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인세 수입이 만만치 않을 거니까. 한 1백만 부 나간다고 치자. 그러면 인세가……아이구나! 1억 원이나 되네!” 『黃江에서 北岳까지』는 당초 출판 타이밍을 조절하자던 허 비서관의 계획대로 전 대통 령의 제12대 대통령 취임식 한 달 전쯤인 1981년 1월 23일에 발간되었다. 책 제목은 순전 히 허 비서관이 지은 것인데, 땅콩 밭을 경영하다가 미국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가 펴낸 <땅콩 밭에서 백악관까지>라는 책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허문도 씨는 자신이 지은 책 제목을 저자인 천금성에게 “책 제목 좋지? 각하께서도 아주 맘에 드는 모양이야!”하며 자랑 했다. 『黃江에서 北岳까지』가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는 허 비서관의 예상은 금방 무너지고 말 았다. 책이 나온 시점에 전 대통령에 대한 평판이 너무 나빴기 때문이었다. ‘광주 학살의 원 흉’으로까지 매도되고 있었으니 서점에서는 통 팔리지 않았다. 영부인의 엄명을 받은 천금성은 다음날부터 청와대 부속실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의전비 서관인 황진하(黃震夏) 소령의 주선으로 수도권 각 부대 지휘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련 장 군들을 차례차례 찾아갔다. 한남동에 총성이 울리던 날 밤의 상황부터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천금성은 도합 200명도 넘는 관련자들을 만났다. 천금성은 이 무렵에 만난 별 들의 수를 다 합하면 대충 헤아려도 200개는 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들의 생생한 증언 을 바탕으로 1981년 연말에는 「10.26, 12.12, 광주사태」 라는 제목의 실록(實錄)을 탈고 했다. 책 두 권 분량의 원고였다. 천금성은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사로 떠오른 「12.12 사태의 전말」이 책으로 발간되면 틀림없이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어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 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어느 누구한테서도 취재비 한 푼 못 받고 꼬박 1년이 나 걸려 탈고한 그 원고는 빛도 보지 못한 채 그만 사장(死藏)되고 말았다. 某 기관에서 나 온 사람들이 ‘청와대 고위층’의 단호한 지시라며 인쇄 직전의 조판을 왕창 뒤엎어버렸던 것 이다. 그 순간 천금성은 너무 억울해서 ‘아! 이놈의 더러운 세상 차라리 죽음으로 청산해버 릴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12.12 사태의 전말」 원고가 깡그리 사라진 것을 아니었다. 천금성이 고이 간직 하고 있던 한 권의 초고가 지하로 번져나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제공되었고 나중에 벌어 진 <5공 청문회>에서 신군부를 단죄하는 자료로도 활용되었던 것이다.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천금성의 고난은 여기서 끝 나지 않았다. 천금성,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감금되다. 어느 날 아침 동이 채 트기도 전에 천금성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연행되었다. “너 각하 전기 쓴 놈 맞지? 근데 각하 욕을 왜 하고 다녀?” 천금성은 그제야 왜 잡혀왔는지 감이 잡혔다. 술에 취하면 울분을 참지 못해 허문도 선 배를 욕하다가 ‘전통’이나 ‘5공’까지 싸잡아 욕을 퍼부었던 것이다. 『黃江…』을 비롯해서 세 권이나 되는 책을 써 주었는데도 팔아주기는커녕 인쇄 직전의 조판까지 뒤엎어버리니 눈 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밖에서 술에 취하면 ‘전 아무개’며 ‘5공’이며 겁도 없이 마 구 욕을 해댔던 것이다. 그 정보가 그만 청와대 비서실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너 영부인도 만났지? 돈은 얼마 받았어?” “한 푼도 안 받았습니다.” “이놈 봐라! 확인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을 해?” 천금성은 돈 문제라면 겁날 게 없어 얼마든지 확인해보라고 대들었다. 그러자 살벌하던 분위기가 달라졌다. 몽둥이 뜸질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격리된 방에 가두어 놓았 다. 당시 특수수사대 대장은 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대구 출신 김화남 씨였다. 그는 석방하 기 전에 천금성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를 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각하나 윗분들을 욕하지 말아요. 술도 좀 절제하고 조용히 입 닫고 있 어요. 큰일을 했으니 위에서도 다 생각이 있겠지요. 다음에 또 말썽을 피우면 그때는 우리 도 어쩔 수가 없어요.” 천금성은 특수수사대에서 그렇게 악몽의 사흘을 보내고 풀려났다. 그 후 천금성은 집에만 틀어박혀 이를 악물고 창작에 몰두했다. 몇 달 후 겨우 단편소설 한 편을 탈고해서 어느 잡지사에 보냈다. 그런데 ‘사정상 원고를 실을 수 없다’라는 매정한 메아리가 되돌아왔다. 천금성은 그 ‘사정’이 무엇인지 곧 알아차렸다. 국민적 지탄 대상이 된 정치가를 미화한 ‘어용작가’ 내지는 ‘매문작가’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1982년 연말이 되었다. 서울로 이사한 지도 어언 4년이 지났다. 신문 연재를 한다고 겁 도 없이 서울로 이사 올 때, 셋집을 얻고 나니 여유 자금은 조금도 없었다. 그 동안 취재비 도 제대로 못 받고 책 세 권을 쓰느라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바람에 월세가 몇 달이나 밀 려 곧 거리로 쫓겨날 신세가 되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천금성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청와대 민정비서관 이수정(李秀正) 씨였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나중에 문화방송 전무를 거쳐 문공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 다. 비서실에서 천금성의 딱한 사정을 듣고 1983년 1월부터 ‘편집위원’이라는 직함으로 문 화방송에 출근하게 해주었다. ‘편집위원’이 맡은 일은 본사를 중심으로 전국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20개의 계열사를 아우르는 <社報>를 창간하는 일이었다. 그는 『현대해양』 편집부장 시절의 경험을 되살려 두 달 만인 3월에 창간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社報>에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틈틈이 사내 각 스튜디오를 둘러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프로그램이 없을까 하고 탐색을 했다. 머리에 번쩍 떠오른 것이 한국 TV방송 사상 최초의 해양다큐멘 터리가 된 <의지와 도전의 현장-오대양을 가다>였다. 천금성은 그 기획안을 이웅희 문화방 송 사장에게 직접 올렸다. 이 해양다큐멘터리는 세계의 바다를 직접 탐방하고 항해하면서 카메라에 담아야 했으므로 제작 기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제작비도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나 이웅희 사장은 곧장 보도국장에게 넘겨줌으로서 제작이 확정되었다. 『黃江에서 北 岳까지』 이후 원수지간이 된 허문도 선배가 이번에는 방송업무를 관장하는 문화공보부 차 관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관계부처의 협조를 얻어내는 데도 큰 문제가 없었다. 4개월에 걸쳐서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탐방한 나라가 70여 개 국 이나 되었고 카메라에 담은 테이프가 무려 300개도 넘었다. 「한국 해양산업의 오늘과 내 일」편을 제작할 때는 당시 현대그룹 홍보실에서 팀장을 맡고 있던 소설가 백시종 씨가 여 러모로 도움을 주어 해외 제작을 원만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귀국한 다음 두 달여 동안 편 집 작업을 한 끝에 이 프로그램은 1984년 1월 들어 세 차례에 걸쳐 특집으로 전국에 방영 되었다. 그 반향 또한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 후 TV제작국 표제순 국장의 제안으로 천금성의 해양소설들을 원안으로 하는 해양드라 마를 만들게 되었다. 남태평양의 사모아, 대서양의 라스팔마스 등지에서 현지 로케를 감행 한 3부작 <남태평양 3천마일>이라는 해양 특집 드라마였다. 1년여의 제작 기간이 걸린 이 드라마는 1985년 12월 초에 문화방송 창사 24주년 기념 특집으로 방영되는 행운을 안았 다. 그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다. 문화방송에서 천금성의 입지도 옛날 같지 않았다. 1988년 ‘6.29’ 해빙 무드를 타고 천금성은 6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잠재워 두었던 『10.26, 12.12, 광주사태(上,下)』 (吉韓文化社) 그리고 연이어 『軍 決斷 1000時間』 (民 潮社)을 출간했다. 하지만 천금성의 문화방송 생활도 끝장이 났다.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1층 로비 유리창에 갖가지 구호가 나붙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내걸린 게 『전 대통령 전기 를 쓴 낙하산 인사 C씨(천금성)를 축출해야 한다!』는 대자보였던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그 대자보를 본 천금성은 얼굴이 화끈거려 사무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 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1988년 연말의 일이었다. 만 6년 만에 쫓겨난 것이다. 입사할 때부 터 시한부 직장이라고 각오는 했으나 너무 빨리 밀어닥친 파도였다. 갈 곳 없는 천금성은 잠시 회한에 잠겼다. - 이제 내가 설 땅은 어디 있는가? 아무리 더러운 강물이라도 다 받아주는 저 광활한 바다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 원양 ‘제96광명’호에서 회사의 지시에 불복종하지만 않았다면 지금까지 배를 타고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어선 갑종2등 항해사 면허도 시효가 만료되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