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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기억

예유근의 시간 기억. 나는 어쩌다가 화가가 되었을까?

기억의 더께 열하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내 청춘의 인피니티 미스테리

작성일 : 2024.07.07 01:54 수정일 : 2024.07.07 02:17

예유근의 시간 기억. 나는 어쩌다가 화가가 되었을까?

기억의 더께 열하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내 청춘의 인피니티 미스테리

 

기억은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재의 인식작용이다. 기억은 지나온 과거 감정의 산물이지만 그 기억을 불러온 것은 현재화된 것이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은 짧디 짧지만 아직도 살아 있다는 그 사실은 추억한다는 사실만으로 숭고함을 느낀다. 잠시 머무는 동안 의식과 기억이 준 선물을 누리는 것이다. 적어도 사건의 지평선을 넘기 전까지는 말이다.

1978년도 포인트현대미술회에 최연소로 가입하고 선배님들과 동인으로서 활동을 한다는 자부심에 참으로 나름 열심이었다. 8평 남짓의 양정의 조그만 화실은 친구 임택근(재미)이가 전세금도 지원해 주었다. 사실 틈만 나면 친구들이 모여 노는 놀이터였다. 당시 누구나 그렇듯이 그저 하릴없이 밤을 새우며 그림 그리고, 기타도 치며 노래하고, 담배피며 술 마시고, 당구치고, 여자들과 어울리며 그저 친구들이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가끔은 미래의 삶에 대한 치열한 이야기로 무수한 밤도 새웠다. 다들 가난해서인지 모든 생각의 마지막 흐름은 무엇을 하며 살것인가? 이었다. 특히 가수 함중아 닮은 ()양희재형부터 서울로 보내 연예인을 시키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잘 생긴데다가 기타도 잘 치고 노래 실력도 뚸어 났기 때문에 여기서 썩히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웃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답이 없어 망연자실하며 생각의 초점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들 흐릿해져 갔다.

2여 년 지날 동안 어느 날 김종근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 자택 2층에서 대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 실기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왔었다. 그저 감사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동래고 동문 선배님이시기도 했지만, 고교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동래고 미술부때 부터이다. 김홍석선생님께서 미술선생님으로 부임해 오시고부터이다. 두 분은 오랫동안 서로 모든 걸 나눈 정말 절친이셨다. 부산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한 역사에 세상 버리시기 전까지도 평생 헌신하신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나는 집안 형편도 어려워 친구들과 노는 틈 사이에 나는 학비와 최저 생계비를 벌기 위해 김종근화실 강사로 뛰었다. 선생님 댁 2층 화실에는 10여 명의 정예?학생과 특히 전시도록이 가득했는데 거의 직접 참가하신 전시의 현대미술에 관한 작품도록 이었다. 아카데믹한 사실화 풍의 부산대학교에서는 보고 배울 수 없는 귀한 자료들이었다.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작가와 작품 성향은 거의 외워 버렸다.

2012. 혁그룹 회장 허종하형의 요청으로혁동인 50주년 기념전전시 서문에 이때의 느낌을 <금혼식을 맞이한 <()>과 나의 인연>이란 글로 적었었다.

 

- <()>은 열정에 타오르고 스스로를 태운다. -

-전략-

아 아... 청춘의 대학시절! 나의 인생에 큰 은혜를 베푸신 분! 김종근 선생님을 만난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젊은 가슴에 인연의 깊은 의미를 주신 분! 선생님 댁 2층 작업실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김남진, 박재현 외) 학생들의 그림지도를 나에게 맡기면서 어느 시절이나 마찬 가지겠지만 당시 학비조달에 어려워 서울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사대 미술교육과에 다니던 나에게 강사료를 특별히 아주 많이 주셨다. (내 아내 김영아도 고교시절 김종근 선생님의 자택화실에 다녔던 제자임을 훗날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때주신 강사료는 대학을 무사히 자립으로 졸업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선생님작업실의 석고상 밑에 무수히 꽂혀 있던 <>의 전시 도록들... 또 한창 현대미술이 무르익던 70년대 초부터 현대미술제, 국제현대미술교류전 등이 전국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의 자료들, 아마 지금도 내가 전국의 현대미술작가들의 이름이나 작품들을 

많이 기억하는 건 그때 미친 듯이 탐닉해서 보았던 작품전, 전시 자료집들 때문일 것 같다.

거실에는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지만 가로로 된높고 푸른 큰 소나무라고 씌여진 서예작품이 걸려있었는데 그 글을 아주 마음에 든다며 좋아하셨다. 하루는 파리에서 김창열선생님께서 보내온 안부 편지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빨간 낙엽위에 안부를 묻는 내용의 글과 함께 직접 그리신 반짝거리는 단 한 방울의 물방울 그림이었다. 그림만으로 머리 가득 찬 대학시절, 그때 보여주신 그 영롱한 물 한 방울에 나의 가슴은 화가로의 열망으로 다 젖어버렸다.

우리 때는 미술공부를 제대로 배워서 한 것도 아이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아무도 도와 주지도 않았어! 너거는 공부를 마이했다 아이가! 그러니까 제대로 작업해야 돼!” 자긍심 강하면서 스스로 겸손하셨던 말씀은 나에겐 늘 아직까지도 짐이 되어버렸다.

-하략-

 

내 화실 길 건너편에서 화실을 하셨던 같은 포인트현대미술회 회원이었던 조숙한 천재화가 k선배님(다른 여러 지역에서 사셨다가 몇 년전 인천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은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자주 만나 술을 마셨다. 이 분의 긴 곱슬 장발과 약간 기른 콧수염 포스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이상한 영매처럼 보였다. 늘 이청준의 단편소설 <병신과 머저리> 비유를 자주하고 말만하면 직설적으로 촌철살인의 현실 비판적인 설명이었다. 포인트현대미술회 모임에서도 늘 전위적이면서 비판적이며, 부정적인 분위기를 몰고 다녔다. 작품은 주로 한글의 획에서 오는 단순한 조형미를 주제로 굉장히 실험적이고 난해한 작품을 많이 했다. 뿐만아니라 손에 잡히는 오브제나 꼴라쥬 재료를 여러 형태로 다양하게 평면화시켰다. 그야말로 다소 천재적인 작가였다. 어느 날, 이 분께서 다급하게 내 화실로 오셔서는 김종근선생님께서 나를 보러 오셔서 근처 식당에 와 계시는데 같이 가자.”고 하셨다. 평소 K선배는 나와 자주 문학이야기와 작업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술도 어울렸던 범상치 않은 작가 선배님의 말씀이라 당연히 얼른 따라나섰다. 그 날 김종근선생님께서 화실 근처까지 찾아 오셔서 밥도 사주시며, 이왕이면 선생님께서 활동하시는 <>동인으로 가입해서 활동하면 좋겠다고도 하셨다. 나를 격려해주시는 모습에 그날은 제대로 감동을 먹었다.

자리를 같이하고 불러준 K선배도 고마웠다.

그런데, 그다음 날 김종근선생님 화실에 수업하러 갔는데, 갑자기 조용히 나를 부르시더니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셨다. 선생님께 악감정을 가진 젊은 놈 하나가 밤마다 자신에게 테러를 가하기 위해 골목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그 놈이 바로 나라고 하는 말을 선배 K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자신에게 가해를 하려는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그 놈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전날 찾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정의 식당에서 K선배 말이 기다리고 계시면 그 놈을 데리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면서 많은 고민을 하던 중에 K선배와 함께 들어선 그 놈이 바로 였다는 것이다.

세상에! 놀랍고, 또 놀랍고, 놀라운 말이었다. 그저 억울한 충격으로 놀라 멍했다. 설명이 안되어 한참 동안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면서 말을 잊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님은 풀렸지만, 이 사건은 오랫동안 내 인생의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그 일이 일어난 후 시간이 지난 어느날 K선배는 부산을 떠났다. ~. 난 그 K선배에게 그날 왜 그랬는지 묻지도 못했다. 단지 갓 미술계에 입문한 젊은 놈 하나가 같이 동인 활동을 하면서 처신을 잘해야겠다는 안타깝게도 작가로서 부질없는 사회성을 배워버린 것이다.

 

뱀다리: 불로 작업하며, 불과 같이 사신 김종근선생님께서 남긴 글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그의 행적과 작업에 대한 역사기록은 어쩌면 문자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저 언어로 전달된 기억의 역사이다. 주로 그 역사는 재구성된 사건(감정)과 사물(장소)의 현재의 기억으로써 글로 남긴다.

 

예유근3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