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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7.04 10:49
수많은 설화와 기행을 육지에 남기고 영원한 바다를 향해 세상을 떠난 한국해양소설의 개척자 천금성 작가의 추모특집이다. 그의 가까운 지인이자 후배작가인 김종찬 선생이 파란만장하다 할 그의 인생역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감정으로 넘치지 않고 주관으로도 경사되지 않아 작가로서의 천금성과 인간으로서의 천금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그의 생애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꼭 일독을 권한다. 아울러 그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영해발 부근>을 연재 끝부분에 재수록한다.
천금성의 삶과 해양문학 ②
/김 종 찬 소설가
고려원양 입사. 신춘문예 당선.
1968년 1월. 천금성은 이제 어선 갑종 2등 항해사 면허장을 가진 한 사람의 어엿한 항해사가 되었다. 수료하자마자 그는 동기생 가운데 제일 먼저 고려원양 신조선인 350톤급 ‘제53광명’호 2등 항해사로 승선하는 행운을 얻었다. 인도양으로 출어한 ‘제53광명’호는 마다카스카르 섬의 다마타브, 디고슈아레스, 남아연방의 더반, 케냐의 몸바사, 스리랑카의 콜롬보, 말레이시아의 페낭 등 여러 항구에 기항했다.
11월 중순 ‘제53광명’호는 더반 항에 입항했다. 천금성은 조업 중 틈틈이 써서 완성한 단편소설 「零 海拔 附近」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신문사 주소를 몰라 「대한민국 서울 한국일보사 문화부」라고 영문으로 적어 항공우편으로 발송했다. 봉투 속에는 ‘당선소감’과 함께 ‘수상대리인’까지 지명해서 보냈다. 1969년 1월 9일. 인도양 어장에서 “신춘문예 당선 축하 함. 권정혁”이라는 전문을 받는다. 권정혁은 수상대리인으로 지명한 둘도 없는 대학 친구였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 최초?의 해양소설가가 탄생했던 것이다. 인도양 조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귀국한 것은 1970년 4월 말이었다. 어획 실적이 너무 저조해서 한 항차 더 연장조업을 하라는 본사의 지시로 넉 달이 늦어졌다. 영도 조선소에 닻을 내리던 날 회사 임직원들을 대동한 이학수 사장이 방선(訪船했)다. 이학수 사장은 배에 올라오자마자 2등 항해사인 천금성부터 찾았다.
“자네가 회사의 명예를 드높였네!”
신춘문예 당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학수 사장은 윤정구 상무에게 2등 항해사를 곧바로 선장으로 진급시키라고 명령했다. 이학수 사장의 즉석 선장 발령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회사에서 처음에는 천금성에게 200톤급인 ‘제1광명’호를 맡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천금성은 2년 동안 정들었던 ‘제53광명’호를 맡게 된다.
1970년 7월 20일, 첫 선장으로 부산을 출항한 천금성은 ‘제53광명’호를 몰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생전 처음으로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다. ‘제53광명’호는 2년 반 동안 도합 여섯 번 만선을 하고 1972년 12월 초순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 후 ‘제53광명’호 임금 정산도 하기 전에 회사에서는 천금성에게 530톤급 독항선 ‘제93광명’호를 맡으라고 했다. 그 배는 어선 선장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타고 싶어 하는 최신식 어선이었다. 그래서 승선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1973년 3월 초순 ‘제53광명’호 선원들은 ‘정산금을 지급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저마다 마음속으로 ‘내 집 한 채’를 꿈꾸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충무동에 있는 고려원양 사무실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무지개 꿈은 금방 비구름이 되고 말았다. 정산금 봉투를 받아든 선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원들에게 돌아온 최종 정산금은 적어도 너무 적었던 것이다.
“이 고려원양 도둑놈의 새끼들!”
선원들의 분노가 폭발하자 경리 담당자는 잽싸게 도망갔다. 원망은 선장인 천금성에게 집중되었다.
“이 사기꾼 선장 새끼! 당신이 고려원양 직원들과 한통속이라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아? 이런 회사 배를 다시 타겠다는 꼴만 봐도 뻔하단 말이야!”
나름대로 행복한 내일을 꿈꾸며 어질고 착하기만 했던 선원들은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당장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였다. 천금성은 너무나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털버덕 주저앉고 말았다. 무슨 말로 자신의 결백을 밝히며 선원들의 분노를 달래줄 것인가? 그렇다고 할복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천금성은 30개월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정들었던 선원들과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그 후에 천금성은 자신이 맡기로 한 ‘제93광명’호의 출항일이 다가왔지만 회사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러자 선원과장은 승선계약을 해놓고 나가지 않으면 모든 체선손해(滯船損害)를 몽땅 선장이 물어야 한다고 펄펄 뛰며 위협을 했다. 선장이 없는 배는 보름 동안이나 남항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제93광명’호에 승선하고 말았다.
1974년 4월 인도양 어장에서 귀국한 천금성은 5월에 오매불망 그의 귀항을 기다리던 김태순(金胎順)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번에는 ‘제96광명’호를 맡아 다시 인도양으로 출어했다.
1975년 8월 5일 아들 준범(俊範)이 출생하고 1976년 8월 5일 딸 준화(俊和)가 출생한다. 오빠와 5분 차이 연년생이다. 이것은 독항선의 귀국 일자와 꼭 맞아떨어진다. (自述年譜)
1976년 11월. 이제 보름만 더 파도와 싸우면 만선을 이룰 터였고 선원들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에 들떠 있을 때였다. 본사에서 이런 내용의 전문이 왔다.
“지금 일본은 어가(魚價)가 최저 시세이니 잡은 고기는 운반선에다 양상전재(洋上轉載)를 하고 조업을 계속하다가 어가가 좋은 내년 3-4월에 입항하도록 하라!”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양상전재는 어로계약 위반이었다. 천금성의 판단으로는, 회사의 지시대로 따른다고 해도 지금까지 고려원양이 저질러온 선원 착취 행태를 볼 때 조업연장으로 생기는 이익금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을 성싶었다. ‘제93광명’호 정산금 지급 때 선원들에게 사기꾼 취급을 받고 원수가 된 천금성은 기관장, 갑판장 등 간부 선원들을 불러 놓고 결단코 회사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를 생각이 없다고 선언했다. 만선이 되자 그는 무조건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본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싱가포르에서 배는 일등 항해사에게 맡기고 선장만 귀국하라!’ 그래도 말을 안 듣자
‘회사의 지시를 끝까지 거부하고 입항하면 막대한 손실을 입힌 죄목으로 입항 즉시 형무소에 집어넣겠다!’는 최후통첩까지 보냈다. 그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1976년 12월 초순, ‘제96광명’호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고려원양에서 강제하선 당하다.
입항 수속이 끝나자마자 선원과장과 함께 후임 선장이 올라오고 천금성은 회사의 지시를 어긴 죄목으로 강제하선을 당했다. 그 후 천금성은 부민동에 있던 검찰청에 두어 달 동안이나 불려 다녔다. 회사의 지시에 불복종하고 멋대로 배의 침로를 돌렸다는 혐의(선원법 위반)로 피소되었던 것이다. 까다로운 조사 끝에 내려진 검찰 측 판결은 ‘혐의 없음’이었다. 천금성은 자신이 「정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한 사람의 작가가 아니었더라면 막강한 고려원양을 상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무모한 도전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뒤늦게 실토했다. 당시 고려원양의 선원 임금 착취 행위는 도를 넘은 상태였다. 충무동 바닥에 와글거리는 수많은 고려원양 소속 선원들의 울분을 검찰에서 모를 까닭이 없었다.
<선원법 위반> 사건은 일단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었지만 선장으로서 그의 앞날은 절망적이었다. 막강한 고려원양의 지시에도 불복종하는 그를 채용해 줄 선주는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그의 선장 생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돈키호테 같은 나의 돌출 행동을 곱게 보아줄 선주는 아무도 없었다.’ (自述 記錄)
그는 기회가 올 때까지 당분간 승선을 포기하고 육지에서 적응할 방도를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1977년, 천금성은 한국 해기사 협회 어로지부장, 경희 어업소속 연안 건착선단(巾着船團) ‘제71태양’호 사무장으로 잠시 승선했지만 선장 기질이 몸에 밴 괄괄한 그의 성품에 오래 붙어 있을 자리는 못 되었다.
그가 찾아낸 탈출구는, 그 동안 발표한 작품들을 모아서 작품집을 출간하는 일이었다.
부산 출신 시인 김종해 씨가 경영하는 문학예술사와 창작집 출판 계약을 맺었다. 원고 교정을 위해 서울에 드나들면서 그는 한국문인협회에 자주 얼굴을 내밀고 서울 문인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때 소설가 이문구 씨가 남달리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1978년 5월에 첫 창작집 『虛無의 바다』를 출간했다. 한국문단에서 최초의 해양소설집이 된 그 창작집은 출판사의 적극적인 홍보활동에 힘입어 주요 신문 문화면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작가에 대한 소개 기사도 많았다. 특히 경향신문은 한 면을 통틀어 그의 문학을 언급하고는 ‘새로운 시각의 해양소설을 연재해 보자’는 제의까지 해왔다. 그걸 어찌 마다하랴! 하지만 그게 향후 10여 년 동안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경향신문에 표류도(漂流島)를 연재하기 위해 1978년 12월 그는 식솔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 표류도는 1979년 1월 1일부터 연재했는데 셋집을 얻고 나니 그의 수중에는 생활비도 부족했다. 신문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는 운 좋게 취향에 맞는 직장을 구했다. 『현대 해양』이라는 잡지사였다. 부산 수산대학을 나와 해양 전문지를 창간한 이종례 사장이 선장 출신인 천금성을 편집부장으로 영입했던 것이다.
그는 1979년 두 번째 창작집 『은빛 갈매기』를 출간(高麗苑)하고 그해 10월에 연재를 마친 장편소설 『표류도』를 1980년 1월에 출간(高麗苑)했다.
1980년 8월 11일 오전. 동아일보사 편집국으로부터 천금성을 찾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동아일보 창간 50주년을 맞아 그 기념 이벤트의 하나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 대한해협을 헤엄쳐 건너가고 있으니 이와 관련한 시론(時論)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제아무리 아시아의 물개라도 지느러미를 갖지 않은 인간인 이상 어떻게 세찬 구로시오(黑潮)의 본류가 흐르는 대한해협을 알몸으로 건널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실체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쾌거다”라고. 그 기사가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그 다음날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전화를 받았다. 이 전화 한 통이 자신의 인생여정을 바꿀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허문도(許文道)였다. 부산고를 나온 허문도는 서울 농대 2년 선배로 학보 <常綠>을 같이 편집하며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점심이나 함께 하자며 퇴계로에 있는 아스토리아 호텔 커피숍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허문도는 나타나지 않고 정장 차림의 젊은 청년이 그를 안내했다. 그가 안내된 곳은 말로만 듣던 ‘남산’이었다. 허문도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을 맡고 있었다.
허문도는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이 분 알지?”하며 A4 크기의 복사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전두환 대위가 5.16 당시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있을 때 작성된 인사카드였다.
허문도는 그제야 “그래 요새 뭐 하나? 또 배 탈 생각이냐?”하고 물었다.
천금성은 허문도의 의중을 몰라 “그럴까 생각 중입니다”하고 얼버무렸더니 그는 “배 타는 건 이제 때려치우고……우리는 지금 이 분과 뜻을 같이 하고 있다네. 이 분 전기(傳記)를 한 번 써 보는 게 어때?”하며 독려하듯 천금성을 바라보았다. ‘이 중대한 일을 너에게 맡기려고 너를 불렀다!’하는 눈빛이었다.
천금성은 여태까지 전기는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어 주저하였더니 “너무 어렵게 생각할 건 없고, 이 분이 지금까지 살아오신 고난의 투쟁사에다 군인으로서의 구국신념 같은 것을 적당히 엮어서 쓰면 돼. 국민들은 아직 이 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으니까”했다.
천금성은 차분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만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앞으로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장군의 전기를 쓰는 막중한 작업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정 들었던 『현대 해양』 편집부장 자리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