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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기술⑩ - 공부 안 하는 것도 공부다

작성일 : 2024.07.01 12:25

싸움의 기술- 공부 안 하는 것도 공부다

/양선규

 

검도에 미쳐서 밥 먹듯이검도를 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검도 안 하는 것도 검도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다고 엄살을 떨었더니 한 유명한 일본 검도가가 한 말이라며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자기 깜냥이나 분수에 넘치는 공부나 노력은 득이 되기보다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반성도 같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염려가 떠올랐습니다. 나이 들어 하는 운동이라 무리하면 반드시 몸에 탈이 났는데 자칫 잘못하면 어느 한 곳이 영구 불구의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 하나와 조급증을 내다가 정통파(바른 마음 바른 자세)를 벗어나 삿된 기교파(이기는 기술 위주)로 엇나갈지도 모르겠다는 것 둘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팔과 다리에 늘 통증이 뒤따라 다녔습니다. 평소에는 아프다가도 운동을 하면 통증이 사라지는 탓에 몸이 상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매일매일 격하게 운동을 했습니다. 기술을 익히는 데에도 시합에서 이기는 기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그때 생각에 반드시 이기는 기술(得意技)’ 한두 개는 가지고 있어야 어디 가서도 행세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실제로 시합에 나가 수 차례 우승도 했습니다. 자연히 큰 기술보다는 작은 기술에 손이 더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하는 검도교실에 선배 검도가 한 분이 오셔서 회원들을 지도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운동 후 강평을 하시는데 이 도장 분들은 사범을 닮아서인지 모두 손목을 잘 치더시군요라고 했습니다. ‘손목치기도 엄연한 기술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머리치기보다는 작은 기술 취급을 받는 기술이었습니다. 상대와의 거리가 머리보다는 손목이 훨씬 짧거든요. 기회를 노려서 후발선지(後發先至)’하기도 힘이 덜 들고요. 상대를 압박해 들어가면서 치고 들어오는 머리치기를 누르는 손목이나 받아치는 허리로 제압하는 기술에는 어지간히 자신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자각이 들어 그때는 제가 우정 의식적으로 선의 선으로 치는 머리만 치려고 노력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손목이야기가 나와서 내심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갔습니다. 그만큼 저의 검도가 그 선배분에게는 손목 잘 치는 검도로 각인이 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저에게 검도를 배우는 사람들의 검도를 제가 좀더 자상하게 살피지 못했다는 것 등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처음 배울 때 몸을 아끼는 검도에 물들면 쉽게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시범도 보여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검도 안 하는 것도 검도다라는 말과 함께 제 검도 인생도 한 번 크게 변화를 보이게 됩니다. 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검도를 의식적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爲人之學)가 아니라 사람되는 공부(爲己之學)에 치중해야겠다는 각오도 새롭게 하게 됩니다. 그 뒤로 검도가 더 재미있어졌습니다.

 

그 당시 본 영화 중에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라쇼몽(羅生門)이 있었습니다. 7인의 사무라이등과 함께 일괄 본 영화 중 한 편이었습니다. 감독은 세상에는 <진실>이 아니라 <현실>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훨씬 이전에 유종호 선생님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라쇼몽(羅生門)이야기를 하신 글을 읽어본 적이 있었기에 내용은 별로 큰 울림을 주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의 말도 너무 작위적이었고 여성성에 대한 묘사도 너무 스테레오 타입이었습니다. 물론 그 영화가 만들어졌던 시대를 생각해 보면 그마저도 대단한 것이긴 했지만요.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상상보다(책으로 읽었을 때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생긴 미녀, 미남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제 뇌리 속에 형성되어 있던 영화 라쇼몽(羅生門)의 인물 형상들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게 된 것인지는 설명이 곤란합니다. 당시로는 황당하게 다가온 그 못난 스토리가 그런 선입견을 조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크게 보면 감독이 관심한 부분은 그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후 실존주의의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인생에 과연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전후(戰後) 정체성 위기에 직면해 있던 일본 사회를 한 번 되짚어보는 차원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일본인의 체면 중심 세계관이 빚어낼 수 있는 극단적인(극적인) 상황 하나를 잘 묘사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라쇼몽(羅生門)의 영화로서의 작품성을 논한다는 것은 약간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영화는 7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야말로 고전(古典)입니다.

사족 한 마디 달겠습니다. 한 때 그렇게 심취했던 라쇼몽(羅生門)을 정작 영화로 대면한 것은 책으로 그것을 만나고도 장장 수십 년 뒤였다는 게 좀 께름칙합니다. 그것이 구축해 놓은 성곽이 워낙에 도도(滔滔)한 것이어서 감히 다른 것으로(진짜 영화보기로) 그 감격을 희롱하고 싶지가 않아서였을까요? 아니면 이미 그 시절부터 제 공부 안에서 공부 안 하는 것도 공부다라는 자각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라는 서태지의 노래가사가 생각나는 아침이군요.

 

혹시 영화 라쇼몽(羅生門)을 처음 대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줄거리만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영화 라쇼몽(羅生門)의 주 내용인 단편 수풀 속1922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한 도둑이 남편과 함께 길을 가던 여인에게 남편 면전에서 성적 폭행을 가한다. 숲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어서 남편 되는 위인이 죽고 여인은 도망을 갔고 도둑은 붙잡힌다. 먼저 시체의 발견자였던 나무꾼, 도둑을 잡은 순검, 여행 중인 부부를 목격하였던 스님, 사위의 시체를 확인한 장모 등 네 사람의 간단한 진술이 전개되어 사건의 윤곽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이 네 사람은 증인으로서 경찰 간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이어서 작품의 중심인물인 도둑, 아내, 남편이 각각 모순되는 진술을 들려주고 있다. 시대는 12세기경으로 되어 있으며 남편은 사무라이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네 사람의 증언과 사건 당사자 세 사람의 진술로만 구성되어 있고 지문이나 작가편의 논평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작품의 초점은 사건 당사자 세 사람의 엇갈린 진술에 있다. 도둑은 폭행을 가한 후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여인 쪽에서 미친 듯이 매달리면서 <두 남정네에게 수치를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괴롭다.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한다. <살아남은 사람을 따르겠다>는 여인의 말에 살의를 느꼈고 묶여 있는 남편을 해치는 것이 비겁하다고 생각되어 남편을 풀어 준 뒤 칼을 돌려주고 결투를 해서 23() 째에 치명상을 가했으나 그 사이 여인은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편은 죽였으나 여인은 살해하지 않았으며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극형을 내려달라면서 말을 맺는다.

한편 절간으로 도망간 아내가 참회하는 자초지종은 전혀 딴판이다. 도둑은 폭행을 끝낸 후 묶여 있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비웃었다. 남편에게로 달려가려는데 도둑에게 걷어차였다. 그때 남편의 시선에서 자기를 비웃는 차가운 눈빛을 발견하였다. 섬찟해서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둑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남편과 함께 살기는 틀렸다 생각하고 죽을 작정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도 자신의 봉변을 목격했으니 혼자 남겨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함께 죽어 달라고 하였다. 남편의 입에는 낙엽이 잔뜩 물려 있어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죽여라>고 말했음을 알고 단도로 남편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차려 보니 묶인 채 남편은 숨져 있었다. 새끼줄을 풀고 그 자리를 떴다. 목을 찌르기도 하고 연못에 몸을 던져 보기도 했지만 죽지를 못하고 말았으니 관세음보살조차 자기를 버린 게 아니냐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그녀는 흐느껴 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은 남편의 혼령이 무당의 입을 통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도둑은 아내를 범한 후에 위로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이상 남편과는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지 못할 터이니 자기 아내가 되어 달라고 유혹하였다. 이때 아내는 황홀한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처럼 아내가 예뻐 보인 적은 없었다. 아내는 어디든지 데려가 달라고 하더니 <저이를 죽여주세요. 저이가 살아 있다면 함께 될 수가 없어요>라고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도둑조차 이 말에는 기가 차서 아내를 걷어찼다. 도둑은 <이 여자를 죽일까, 살려 둘까?>라고 물어왔다. 이 말만으로도 도둑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었다. 자기가 망설이는 사이 아내는 숲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도둑은 새끼줄을 한 군데 끊어 놓고 그곳을 떴다. 아내가 버리고 달아난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얼마 후 누군가가 소리죽인 발걸음으로 다가 오더니 가슴의 단도를 빼었고 자기 자신은 영원히 어둠속으로 잠겨 버렸다는 게 무당의 입을 통해서 남편의 혼령이 토로한 자초지종이다. 여느 경우와는 다르게 세 사람이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각기 자기가 살해자라고 엇갈리는 진술을 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나고 작자는 지문이나 논평 없이 일곱 사람의 진술만을 전해 주고 있는데 사건의 진상은 모호하다.“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중에서]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