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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6.28 08:58
2016년 유월, 많은 설화와 기행을 육지에 남기고 영원한 바다를 향해 세상을 떠난 한국해양소설의 개척자 천금성 작가의 추모특집이다. 그의 가까운 지인이자 후배작가인 김종찬 선생이 파란만장하다 할 그의 인생역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감정으로 넘치지 않고 주관으로도 경사되지 않아 작가로서의 천금성과 인간으로서의 천금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그의 생애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꼭 일독을 권한다. 아울러 그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영해발 부근>을 연재 끝부분에 재수록한다.
천금성의 삶과 해양문학 ①
김 종 찬
『해양소설 개척자, 한국해양문학가협회 초대 회장 천금성 소설가 별세』
2016년 6월 26 천금성 선생이 별세했다.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을 선두로 서울신문, 동아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이데일리, 연합뉴스 등 대부분의 중앙 매스컴에서 그 소식을 부고란(訃告欄)이 아닌 별도의 기사로 비중 있게 보도했다. 크기는 신문사별로 조금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아래와 같이 대동소이했다.
『우리나라 해양소설 개척자 천금성 소설가가 지난 6월 26일 별세했다. 향년 75세. 고인은 2012년 설암(舌癌) 수술을 받고 고생을 하다가 건강을 잠시 회복하는 듯 했으나 2015년 다시 폐암으로 전이되어 부산 고신대 복음병원에 입원했다. 몇 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가족들이 가까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동탄 성심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41년생인 고인은 경남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농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한국원양어업기술훈련소를 수료하고 어선 갑종 2등 항해사 면허를 취득했다. 1968년 고려원양 소속 참치잡이 원양어선 <제53 광명>호 2등 항해사로 승선하여 인도양으로 출어했다. 승선 중 틈틈이 썼던 단편 해양소설 <零海拔 附近>을 남아프리카 더반 항에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7년 가까이 원양어선 선장 생활을 하면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20여 권의 해양 장편소설 및 창작집을 냈다.
2010년 발간된 「불타는 오대양」에는 원양어선을 타며 체험했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인생행로를 바꾸게 한 「黃江에서 北岳까지」를 쓰게 된 동기와 그 후일담을 사실 그대로 피력했다. 고인은 하선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에 다시 해양소설의 자료를 찾기 위해 사조산업과 동원산업 소속 선망선에 말단 어부로 약 6개월 동안 승선했다. 또 해군소설을 쓰기 위해 해군본부에 청원하여 해군사관학교 졸업생 순항 훈련함대와 환태평양 훈련함대에 편승하기도 했다.
1993년 한국 소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해양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또 「월간 현대해양」에 편집고문으로 활동하며 <오대양 開拓史> <한국 漁民史> <세계해양문학 순례> <쪽빛 바다 지켜온 선구자들> <세계를 경악시킨 해난사고들> 등을 연재하는가하면 ‘파랑(巴浪) 칼럼’을 실었다.
빈소는 경기도 화성시 한림대 동탄 성심병원 장례식장. 발인 6월 28일 오전 9시. 장지는 오산시 오산 시립 쉼터 공원 납골당.』
천금성의 출생과 청소년 시절
천금성은 1941년 10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 천두진(千斗辰) 씨와 어머니 박시중(朴時中) 씨 사이에서 3男 3女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慶南 晉陽君 晉城面 泉谷里이다. 본(本)은 중국 영양천씨(潁陽千氏)로 시조는 중국 명나라 사람 천엄(千嚴)이며 중시조는 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이다. 영양은 지명으로 영(潁)은 중국 화남성 등봉현(登封縣)에서 회수(淮水)로 흐르는 강 이름이라고 한다.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잠간 영양천씨의 족보를 들추어 보았다.
천만리는 중국 明나라에서 무과에 장원하여 태청전(太淸殿) 수위사(守衛使) 겸 총독오군사(總督五軍師)를 역임했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영량사(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 형제와 함께 부하 2만을 거느리고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되었다. 군량수송을 담당하였고 평양과 동래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동래,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전란이 끝난 뒤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정에서 그 공을 인정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다. 우리나라 천씨는 모두 천만리의 후손으로 千氏는 단일 본이다.
憂國亡家曰忠 勝敵克至亂曰壯 爲親至誠曰孝.
“가정을 잊고 나라 일을 걱정함은 忠이요, 적을 이겨 난리를 극복함은 壯이며,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것은 孝이니라.”
李如松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파병되었다가 전란이 평정된 후 모든 병사가 회군하였으나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두 아들과 함께 그대로 남아 千氏 가문을 연 千萬里 장군이 남긴 家憲이라고 한다. 큰 아들 千祥은 漢城府左尹, 작은 아들 千禧는 司憲府掌令을 지냈으며 아들 형제에게서 각각 6남과 4남이 태어나 千氏 10파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千氏 가문은 조국 明나라의 멸망과 함께 큰 시련을 겪는다.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굴복시킨 청은 明에서 귀화한 사람들을 잡아들이니 千萬里의 후손들도 심산유곡으로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솔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던 千氏들은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농사와 고기잡이 등으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 천두진 씨는 가솔을 이끌고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에서 북해도까지 떠돌았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연락선 편으로 귀국하여 부산 서구 아미동 (속칭 谷町)에 정착한다. 1년 후에 중구 충무동 3가 왕자극장 뒷골목으로 이주하여 부친은 목수 일이나 연탄 찍는 일을 하고 모친은 구멍가게를 열었다.
1948년 천금성은 남일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952년 신설된 충무국민학교로 전학한다. 1954년 충무국민학교 제1회로 졸업하고 경남중학교에 입학한다. 중학교 1~2학년 때 특별한 이유 없이 수시로 가출하여 서울, 마산, 거제 등지로 돌아다녔다. 1957년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유도부에 들어가 검은 띠를 땄다. 1960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14회)하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에 합격했다. 1961년 학보사에 들어가 학보 <常綠>誌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때 부산고 출신으로 서울 농대 2년 선배인 허문도를 만난다. 그 당시는 내일 일을 몰랐지만 실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1962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한다. 해병 128기로 신병훈련을 마치고 진해기지사령부 정훈 참모실에 배속 <海兵 鎭海 週報> 편집을 담당한다. 1964년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여 <常綠>誌 편집장을 맡는다. 이때 학보에 투고하던 후배들의 소설 수준에 실망하고 직접 단편소설을 써서 후배 이름으로 게재한 게 인기를 끌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65년 某 日刊紙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을 처음으로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아깝게 떨어졌다. 여기에 고무된 천금성은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1966년 서울농대 임학과를 졸업(20회)한 그는 잠시 세대(世代) 誌 기자로 일한다. (自述年譜에서)
한국원양어업훈련소 입소
1966년 연말, 모처럼 부산으로 내려온 천금성은 시청 앞 영도다리 부근을 걷다가 벽에 나붙은 포스터 하나를 보았다. 마도로스 청년 하나가 부릅뜬 눈으로 물레바퀴처럼 생긴 타륜을 돌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제목은 이랬다.
『어선해기사 단기 훈련생 모집!!』
그것은 <한국원양어업기술훈련소>라는 기관이 내다붙인 것으로 유엔 기구의 하나인 FAO(국제식량농업기구)가 특별히 지원한다고 했다. 일체의 훈련비는 모두 국가가 부담하며 어로학과와 기관학과 두 분야에 각각 30명씩 훈련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훈련기간은 1년 코스인데 수료와 동시에 해기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고 시험에 합격하여 면허증을 취득하면 원양어선 사관으로 승선할 수 있다고 했다.
포스트를 읽고 나자 천금성은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이 흔하지 않은 교육과정을 마치기만 하면 세계의 바다를 떠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중한 체험을 통해 <모비 딕> 같은 소설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천금성은 망설이지 않고 응시 원서를 접수했다. 명색이 서울대학 출신인 천금성에게 필기시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입소 여부를 최종 판정하는 면접시험관인 서의수 교관 앞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다. 서 교관은 천금성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 이런 손으로 그물을 당기기나 하겠어요?”
천금성은 난감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라는 생각에서 아주 애절한 표정으로 매달렸다.
“교관님, 저는 물론 바다에 대해서는 아직 무지몽매합니다. 그러나 훌륭한 뱃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소양과 자질을 갖춘 뱃사람만 필요로 한다면 이런 교육기관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선 ‘틀렸구나!’하는 실망감이 먹구름처럼 떠돌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그는 영도 남항동에 위치한 그 훈련소로 달려갔다. 떨리는 가슴으로 정문 게시판에 나붙은 합격자 명단을 훑어보니 ‘천금성’ 이라는 이름 석 자가 맨 첫머리에 붙어 있었다.
1967년 1월 4일 천금성은 동기생들과 함께 FAO 제5기생으로 입소 선서를 했다. 그렇게 해서 원양어선 선장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6개월간의 학과 교육을 마치고 해기사 국가고시 필기시험을 치른 날 밤이었다. 천금성은 동기생들의 부추김에 떠밀려 평소에 불만이 많았던 사감에 대한 데모에 앞장을 섰다. 그 사건으로 그는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선상난동’이란 죄목이었다. 여기서부터 앞뒤 가리지 않는 천금성의 괄괄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제아무리 호탕한 기질이라 해도 원양실습을 앞둔 시점이라 그는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서의수 교관의 충고로 천금성은 권영두 소장을 찾아갔다. 해군 고위 장교 출신인 권영두 소장은 냉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관심을 갖고 자네를 눈여겨보았네. 학과 성적이 너무 우수해서 말이야. 수료하는 대로 우리 교관 요원으로 발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네. 그런데 선상반란을 주도하다니!”
천금성은 권 소장의 호된 질책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끝장이구나!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실습선 진달래호가 원양실습 항해를 떠나기 직전이었다. 동기생 한 명이 헐레벌떡 집으로 찾아왔다. 복적(復籍)이 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그의 우수한 학과 성적을 아까워한 권영두 소장의 특별 배려였던 것이다. 그래서 가까스로 실습에 동참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태평양을 항해하며 참치 잡이 시험 조업을 하고 말로만 듣던 사모아, 타히티 등지를 돌아보았다. 사모아에 상륙해서는 대만 어부들과 진달래호 실습생들 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천금성은 회칼을 들고 덤비는 대만 선원들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다급한 나머지 바다에 뛰어들었다. 바다에서 하마터면 상어의 밥이 될 뻔했다. 원양실습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그해 12월 어렵사리 어업훈련소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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