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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더께 열.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작성일 : 2021.11.28 11:15 수정일 : 2021.12.01 02:17
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 기억 <기억의 더께. 열>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기억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나의 기억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는 유령 같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다행히 내 기억의 더께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그 순간부터는 살아서 함께 존재하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세월은 가도 또다시 오는 것.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확연하게 감지된다. 여태까지 붓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림에 보낸 시간과 생각이 살아서 내 몸 곳곳의 기억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연단된 몸의 기억 없이 결단코 쉽게 될 수 없다'는 나의 믿음 방식과 함께...
대체로 고학력자는 현역으로 입대하는 일이 당연하였지만, 나는 폐결핵으로 무종 3회로 방위입대 판정을 받았다. 폐결핵은 아마도 ‘미술학원에서 오래 같이 생활한 김강석(미술평론가)선생님에게서 옮겨온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잘 먹지 못해서인지 주위의 선배, 동료들도 폐결핵을 많이 앓았다.
그당시 아마도 대한민국 최고로 비싼 홍익대 대학원 등록금과 함께 휴학계를 내고 79년 1월 해운대 방위 신병 교육대로 입소했다. 어머님께서는 박대통령 군사통치시절 군에서 의문사한 큰 아들을 잊지 못한 트라우마로 마치 내가 죽으러 가는듯이 생각하셨다. 우시면서 막내인 나의 입영을 걱정하시면서도 현역으로 가지 않은 일을 다행으로 여기셨다.
훈련소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연병장까지 오리걸음으로 도착해 이미 다리는 풀릴대로 풀려서 몸을 가누지 못했는데도 조교들은 입소자를 엄청 좌로, 우로 굴렸다. 삼일 쯤 지나니 하사관이 50여명으로 구성된 내부반 교관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나를 오로지 학력이 좋다는 이유로 향도(반장)를 시켰다. 거절하였더니 나를 구타하고 큰 소리로 구령조정 삼회 실시를 반복해서 시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억울하게 많이 맞았던 것 같다. 군에서 의문사한 큰 형님의 화장한 유골을 집에 던져주고 도망가던 두 명의 헌병 중 한 명의 허리를 잡고 늘어지던 어머님 모습이 생각나서 어떡하든 참고 버텼다. 무슨 이런 일이? 신기하게도 거짓말처럼 마침 미술학원의 한해 후배이며, 교육대 최고참 하사였던 박성원(전동아고미술교사)이 한밤중에 내 고함을 듣고 내무반으로 들어와서 직접 상황을 정리하고 수습해 주었다. 어쩌면 이렇게 훈련소에서도 좋은 인연이 생기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놀랍다. 그때의 내 모습을 본 박성원은 ‘빡빡 깍은 머리에 새까맣게 타버린 얼굴과,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다가 눈만 반짝여서 ‘반 고호‘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사실 거울을 본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사건 이후로 제대 후에도 군에서 오만 핑계를 대며 제대를 시켜주지 않는 꿈이 평생 계속 나와서 정신적 트라우마가 제법 오래갔다.
또, 놀라운 일은 해운대 방위교육대에서 훈련 중 대학졸업 예정자를 졸업식에 참석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발을 쓴 내 모습과 졸업 축하를 해 주러 온 친구들의 졸업식 사진이 남아 있다. (사진1)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부전동 경남병무청이었으며, 근무 역할은 병무청장 따까리(비서)였다.(사진2) 그런데 병무청 자체 내에 배치된 모병관 장교와, 하사관, 현역병, 그리고 방위병들의 군기가 어찌나 센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모병관 여군 장교와 총무과 여직원들에겐 인기가 좋아서 그나마 와중에도 나름 버틴 것 같다. 이상하게도 여군장교나 여직원들이 퇴근 후에 내 화실로 자주 놀러 왔는데 도대체 집에를 갈 생각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술이라도 한잔하면 무슨 사연이 많아서인진 모르지만 왜들 그렇게 우는지 많이 당황했다. 여자와 눈물의 상관관계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느날 합승한 택시에 휴전선 전방에서 지뢰를 밟아 오른쪽 다리를 날려버린 의가사 제대병을 만났는데 그땐 현역으로 입대못하고 방위병으로 근무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79년 제2회 기류동인전을 김광문, 안창홍, 예유근, 정철교가 광복동 <공간화랑>에서 가졌는데 한용식이 사정상 그만두고 김광문이 영입되어 합세하였다. 김광문은 자연석의 여러 모양의 형태와 거친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모여진 돌’을 다시 기하학적 형태의 선속에 배치하는 작품을, 안창홍은 초현실주의적인 ‘루소’ 풍의 작업을 자신의 방법과 특유의 개성대로 재해석한 우울한 문학적인 이야기를 서사하는 그림을, 나는 구겨진 하얀 천이나 찢기어진 종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후, 찟거나 뜯어진 상태의 모양위에 영어로 천, 종이라고 문자를 적어 놓아 보여진 대상과 문자와의 개념적 관계를 표현했다. 정철교는 색 띠 문양의 천으로 묶은 보자기를 그려 담긴 물건의 궁금한 사연과 천주름 묘사의 사실적 회화성을 표현했다. 특히, 지금의 내가 이 젊은 시기의 네 명의 작업을 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본적 단초의 사실 하나는 현재도 활발하게 건재한 네 명의 작업 향방이 향 후 갈라졌다는 것이다. 이미 <기류전>을 통해 그때부터 작업 성격이 변하면서 개성적으로 발전해 나왔기 때문이다. (사진3.4)
군기 살벌한 병무청 근무 중에 광복동 <로타리화랑>에서 포인트79 정기전(사진5)에 출품하고, 한국미술청년작가회에 가입하여 <지방단체 초대전>에도 출품하고 회원들과도 교류하였다. 정관모선생님 등 서울의 한국미술청년작가회 회원들과 부산에서 자주만나며 어울리는 재미가 솔솔하였다. 꾸즌히 부산미술대전에는 출품하여 그 해 부산미술대전 공모에는 세번째 특선을 하였다.
허 황, 김정명선생님 등 선배들의 추천으로 78년에 안창홍, 정철교가〈포인트현대미술회>에 신입회원으로 먼저 가입하고, 나는 학생 신분이라 졸업한 그해에 가입하였다. 이로써〈기류동인〉은〈포인트현대미술회>로 흡수되어 버리고 <기류전>작가는 동인으로서의 지속성을 상실하였다. 때마침 허 황선생님께서 신라대학교(구부산여자대학교)의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연산동에서 운영하던 오리진화실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감사하게도 비품비 등 한 푼도 받지 않고 사용 중이던 그대로 나에게 인수인계시켜 주었다. 허 황선생님 덕에 방위로 근무하면서도 퇴근 후에 화실을 운영하며 작업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많은 수강 학생과 후배 이정형, 홍순명, 김남진, 박재현, 이혜주, 이상윤, (고)이갑재, 김미진(미술사학자.홍익대교수) 등의 작가와 친구 동료들로 화실은 붐볐다. 그리고 화실 곳곳에는 허 황선생님의 작품을 비롯한 이우환, 배 륭, 서상환, 이동일 등 선생님들의 작품이 다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길은 화랑들이 많아서 많은 분들을 오다가다 뵐 수있었다. 특히 백바지에 백구두, 장발과 콧수염의 송혜수선생님은 그 장발을 휘날리면서 창선파출소앞을 지나 다녀도 경찰은 단속하지 않았다. 김인환, 김청정, 이용길, 김종근, 김홍석, 서상환, 김수석선생님은 특히 자주 그 길을 많이 다니셨기에 자주 뵈었다.
그 해 가을. <포인트현대미술회>정기전을 광복동 <로타리화랑>에서 하고 있을 때, 10월 16일부터 시작된 부산시민들의 민주행쟁이 곳곳에서 시위 중이었고, 부산대 등 대학생들은 모였다하면 서면이나 광복동으로 거리행진을 하였다. 전시장 5층에서 밖을 내려다 본 나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폭력을 행사하며 진압하는 모습을 보고 분개하여 뛰어나가 시민들과 합세하여 야유를 퍼부었다. 그리고 군인이 잡으러 오면 무서워서 남포동 회국수집 사이 골목길로 숨어 다녔다. 맞거나 잡혀 끌려 갔더라면 제대는 고사하고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다. 며칠 후 병무청장실에서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중정부장의 총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직원들로 부터 들었다. '아~아. 드디어 국가계엄비상사태에 나는 제대도 못하고 그 원하던 화가로서의 꿈이 허망하게 변해가는구나!' 하고 걱정되었다. 지랄같게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되어 가도, 그래도 지구는 돌고 세상은 굴러가듯이, 최규하대통령이 되고, 전두환이가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되고, 어쨋든 바퀴가 네모라도 억지로 세상은 굴러가고, 나도 제대(소집해제)하였다. 그 해 후로 이상하게 예춘호(전국회의원)아재에게 나의 전시자료를 보내드리면 수취인 불능으로 되돌아 오곤 했다.
어느 날 근무 중인 병무청으로 김응기(서양화가)형이 찾아왔다. 홍익대 대학원을 가고 싶은데 입학시험을 어떻게 치루는지 정보를 얻으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합격해서 나와 함께, 아무리 몸을 굴려도 맞지 않는 그 딱딱하고, 지긋지긋한 밤 열차 2인석 의자에 기대어 타고 3년간 그림을 들고 서울로 같이 학교를 다녔다. 정말이지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기차는 그 기차의 긴 몸처럼, 열차 칸 속에서 보낸 시간도 정말 왜 그리도 길고 길든지...
이때부터 시작된 김응기형과의 인연은 후에 대안공간의 효시인 <사인화랑>운영을 시발점으로 <부산청년미술전>, <부산청년비엔나레>기획 추진 등, 부산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아직도 같이 고운정 미운정으로 지내고 있다. <계속>
(사진1) 1979년 부산대학교 교정에서 졸업식 후. 정철교(작가), 박성원(전동아고미술교사), 가발을
쓴 내 모습, 박기선(서양화가), 구철수(현온사랑장애인지원센타장)
(사진2) 1979년 경남병무청 근무 때 (사진3) 1979년 제2회 기류전(공간화랑) 전시
(사진4) 1979년 제2회 기류동인 김광문, 안창홍, 예유근, 정철교 광복동<공간화랑>전시자료

(사진5) 1979년 포인트현대미술회 광복동<로타리화랑> 정기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