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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6.24 11:27
비약의 순간을 맞이하려면
/윤일현
"물리학자가 꿈이어서 수능 과학 탐구 한 과목은 물리1을 선택했습니다. 6월 모의평가에서 3등급 나왔습니다. 수능 수준의 문제에서 이런 성적이 나오는 걸 보면 물리에 재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리학과 진학을 포기하고 선택 과목을 바꿀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수능성적을 올릴 수 있을까요?" 어느 고3 수험생의 말이다. 물리가 재미있는지 묻자, 성적과 관계없이 물리 공부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토머스 쿤의 학창 시절 일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패러다임 이론을 제시한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년)'는 세계 지성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현대의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토머스 쿤은 하버드대학에 입학해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그런데 1학년 때 물리학에서 C 학점을 받았다. 교수를 찾아가 이 성적으로도 유명한 물리학자가 된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다. 교수는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쿤을 조용히 격려했다. 용기를 얻은 쿤은 문제 풀이 기법을 더욱 연마해서 그다음 학기에는 A-, 또 다음에는 A로 차차 성적을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물리, 수학 같은 자연계 과목뿐만 아니라 학점의 절반 정도는 철학 수업을 들었다. 특히 칸트의 지식의 전제 조건들에 매료되기도 했다. 2학년부터는 하버드 대학의 학생 잡지 '크림슨(crimson)' 편집에 참여했고, 3학년 때는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물리학을 직업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지만, 일단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다음 다방면에 걸쳐 폭넓게 공부하여 과학사라는 학문 영역을 개척했다. 패러다임 개념은 1960년대에 인기를 끌었지만, 많은 학자로부터 뜻이 모호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지금은 자연과학보다는 인문·사회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일상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패러다임이란 과학사의 특정 시기에 어떤 특수한 과학 공동체가 '세계를 보는 관점' '인식의 틀'을 말한다. 과학과 지식은 어떤 과정을 거치며 발전하는가?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하나의 패러다임하에서 연구 작업이 이루어진다. 패러다임이란 기본형, 표준형이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원래 쿤이 언어학에서 차용한 용어인데, 한 동사의 기본형에서 온갖 활용어가 파생되듯이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여러 가지 과학적 인식과 모델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떤 한 패러다임을 의문시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누적되고 새로운 과학적 성과가 축적되면서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 모순은 어느 순간 터지게 된다. 이렇게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을 때 촉발된다. 쿤은 산소의 발견을 예로 든다.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발견함으로써 그때까지의 연소 개념을 총체적으로 전복하고 새 패러다임을 열었다. 그는 정상과학이 비정상 과학이 되고, 비정상 과학이 정상 과학이 되는 과정을 탐구했다.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을 연장하는 선에서 점진적,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불연속적, 비약적, 단절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기존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된다.
인간의 역사와 개인의 삶도 정상적인 안정의 시기와 압축적인 비약의 시기가 있다. 수능시험에서 비약적인 성적향상을 꿈꾸는 학생은 패러다임 이론을 곰곰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정상과학에서 성과가 쌓여야 어느 순간 패러다임이 바뀌듯이 성적향상을 위해서는 첫째, 학습량의 축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질적인 비약이 일어난다. 한두 주일 공부해 보고 기대만큼의 성적향상이 없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물을 끓일 때 일정 시간 가열해야 비로소 끓게 된다. 공부도 이와 같아서 학습량이 누적되면 점수변화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비약적, 불연속적으로 일어난다. 둘째, 과정이 올바르고 제대로 절차를 밟아야 결과가 좋다. 세상 대부분 것들이 그렇지만, 특히 공부는 과정이 날림이면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셋째, 꿈을 꾸고, 꿈의 실현을 확신하며, 끊임없이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찾아 노력하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꿈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고도 사람의 활력을 배가시켜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인내란 집결된 끈기라고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꿈을 성취한 사람들은 단일 목적을 위해 일정 기간 극도로 단순해질 수 있는 폭발적인 집중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혁명의 와중에서 보내는 20일은 평상시의 20년과 맞먹는다"고 했다. 몰입하고 집중하면 하루를 일주일보다 알차게 활용할 수 있다. 시간은 사용자에 따라 그 길이가 달라진다. 변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조만간 놀라운 비약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