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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수프 /싸움의 기술㉒ > 도둑이라는 상징

작성일 : 2021.11.26 10:56

도둑이라는 상징

/양선규

 

도둑(盜賊)이야기는 동서고금의 필수모티프입니다. 천일야화에 실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을 비롯해서 허균의 홍길동전, 9000명의 도둑을 거느렸다는 장자의 '도척' 이야기 같은 게 대표적인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도둑'이라는 비유(알레고리나 심볼로 작용하는 이야기)도 신약성서에 나오는군요. 그런 도둑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도둑'이라는 말이 관습적 상징 내지는 원형적 상징의 하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간(3,4?) 청강생으로 참여했던 한 공부 모임이 있었습니다. 엉거주춤,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습니다(탈퇴의 변은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빠지고 얼마 있지 않아서 그 모임에서 기독교 성경을 읽었답니다. 주로 동양 고전을 읽는 모임이었고 그 당시는 불교 유식론 공부를 하던 무렵으로 알고 있었는데 잠시 짬을 내서 그런 이단적인(?) 독서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준 이에게 그 독후(讀後)의 소감을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이 이렇습니다. "전체적으로 백해무익한 책이다. 예수의 삶을 다룬 사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정도는 읽어줄 만했다. 마태, 마가, 누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일말의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전혀 의미 없는 말들의 잔치들이었다(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생활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편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특히 구약은 악서(惡書)의 표본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답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인간이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전'이 받아야 하는 당연한(?) 구박이겠다 싶은 생각은 한참 뒤에 들었습니다.

상식이지만 기독교의 힘은 구원사랑에서 나옵니다. 그 두 가지 삶의 목표는 (자연을 타자로 여기며) 절대고독을 뼈저리게 느끼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무렵부터 한 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동서양의 모든 성인들의 말씀과 같이, 기독교의 성경은 그 두 가지 삶의 목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고 강조하고 있는 서사체(敍事體)입니다. 그 서사체의 의도성을 무시하고 그 자체의 텍스트성을 선이니 악이니 정의니 불의니, 인간의 기준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일 뿐입니다. 일찍이 성경의 내용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단정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함부로 읽어내지 말라고 엄중한 억압이 이루어진 것도 제가 보기에는 그 선한 의도성의 훼손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인간은 구원 받아야 하는 존재다(너나 없이!). 인간은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제 몸처럼!). 그 두 가지만 확실히 인정할 수만 있다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삶의 목표를 무시하면서(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성경을 읽고 이런저런 소감을 덧붙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거나, 채식 전문 식당에 와서 불고기백반을 내놓으라고 트집을 잡는 일과 진배없는 것입니다.

다시 도둑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데미안에 나오는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 이야기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 중 한 명이 죽기 전에 회개하고 천국에 간다는 내용에 대한 데미안의 비판적 독서입니다. 데미안은 그 부분이 엉터리 사제의 싸구려 설교에 불과하다고 혹평합니다. 인간의 구원을 너무 저급하게 다루었다고 비난합니다. 그 부분에서 성경 서사체의 격이 뚝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싱클레어는 그런 데미안의 설교를 듣고 나서 인간 구원에 요구되는 '인간적 노력'에 대한 보다 성숙한 인식의 도정으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한 번은 견진성사 수업 중에 그가 훨씬 더 대담한 견해 하나로 나를 놀라게 했다. 선생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대해 이야기를 막 끝낸 참이었다. 구세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성서의 보고가 나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어린 소년이었을 적 이따금씩 수난 금요일 같은 때, 우리 아버지가 예수 수난사를 낭독하시고 나면 나는 열렬히 감동이 되어 이 비통하게 아름답고, 창백하고, 섬뜩하지만 무시무시하게 생명력 있는 세계 속에서 살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살았었다. 그리고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면 비밀에 가득 찬 이 세계가 지닌 음울하면서도 힘 있는 열정의 광채가 온갖 신비로운 전율로 나를 뒤덮었다. 나는 오늘도 이 음악에서, 그리고 비극적 행위Actus tragicus에서 모든 시의 그리고 모든 예술적 표현의 총괄 개념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수업 시간의 끝에 데미안이 생각에 잠겨 나에게 말했다. 저기엔 뭔가가 있어, 싱클레어, 내 마음에 안 드는 무언가가. 이 이야기를 한 번 따라 읽어봐.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 음미해 봐. 맥 빠진 맛이 나는 무언가가 있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거기 언덕 위에 십자가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굉장하지! 하지만 우직한 도둑들에 대한 감상적인 선교 전단용 이야기야! 도둑은 처음에 수치스런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였어. 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 이제 막판에 와서 마음이 누그러져 그런 개전(改悛)과 회개의 징징거리는 축제를 치르는 거야! 무덤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하는 그런 회개가 (너한테 묻겠는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또 정말 엉터리 신부님의 설교일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달착지근하고 부정직하고, 지극히 교화적인 배경에다 측은지심의 엿기름을 곁들인 거지. 만약 네가 오늘 그 두 도둑들 중 하나를 친구로 택해야 한다면, 혹은 둘 중 누구에게 더 신뢰를 줄 수 있겠는지 생각해야 한다면, 그건 아주 분명히 이 징징거리는 개종자 쪽은 아닐 거야. 다른 쪽이야. 회개하지 않은 그 도둑이야말로 사나이잖아, 개성이 있고 말이야. 그는 개종 따위를 우습게 알았어. 그런 건 그의 처지에서는 그저 듣기 좋은 말이겠지. 그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갔어. 그리고 자신이 거기까지 가도록 도와준 악마로부터 마지막 순간에 비겁하게 도망가지는 않았어. 그는 당당한 개성을 가졌어. 성서 이야기에서는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손해를 보지. 어쩌면 그도 카인의 후예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이 십자가 수난 이야기는 내 자신이 내 집처럼 편안히 확신해도 된다고 믿었었는데 지금 비로소, 얼마나 개성 없이, 얼마나 상상력과 환상 없이 내가 그것들을 듣고 읽었었는지 알았다. 그럼에도 데미안의 새로운 생각은 내게 숙명적으로 들렸고 그 존속을 내가 고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내 안의 개념들을 전복시키려 위협했다. 아니다. 그렇게 아무나, 지고(至高)의 성인(聖人)까지도 마구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그 무엇인가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나의 저항을 즉시 알아차렸다.

나도 이미 알고 있어그가 체념해서 말했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지, 심각할 것 없어! <후략>[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81~82]

 

데미안이 들려준 도둑 이야기를 접하면서 싱클레어는 막연한 정서적 차원의 누미노제(Numinose)’에서 벗어나 의지를 동반한 주체적 종교생활의 삶의 경지로 나아갑니다(종교학자 루돌프 오토(R. Otto)는 인간이 느끼는 종교적 체험을 신비스럽고,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것’(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as)과의 만남이라고 하면서 누미노제’(Numinose)라는 특별한 용어로 표현하였다. 이는 명확한 표상을 이룰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라는 의미의 라틴어 누멘(numen)에서 따온 신조어로 과학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 신비의 경험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체험을 할 때 인간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두렵고 떨리고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느낌과 함께 또는 초월적인 절대자와의 합일에서 오는 안정감과 절대 평안을 느끼게 된다).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이야기는 그 앞에서 접한 카인 이야기에 접목되면서 싱클레어의 어른 되기에 크게 기여합니다.

저에게는 처음데미안을 읽었을 때의 소감이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때는 싱클레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는 데미안의 비판적 독서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데미안의 목소리가 귀에 속속 들어 왔습니다. 그만큼 제가 미숙한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인간은 구원 받아야 할 존재다’, ‘인간은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어려울 것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는 말인 것 같은데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것만큼 어려운 것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만이 이 허랑된 인생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건 알겠는데 몸으로 살아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사족 한 마디 1. 데미안의 '도둑 이야기'에 대한 비판적 독서가 '도둑'이라는 말이 '제 한 몸으로 감싸는 상징'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치한 것들을 가장 크고 높은 자리로 올리는 게 상징의 역할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죠. 그렇게 ''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가장 신성한 장면 속에 편입되어야 하는 그 '필연적이고도 종교적인 이유'에 대해서 데미안은 몰랐습니다. 그가 자기실현에 도달한 이상적인 '자기(Self)'의 표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역시 소년은 소년이었던 것입니다.

사족 한 마디 2 : 구약성경을 희대의 악서라고 혹평한 이에게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대답이 이랬습니다. “너무 자기만 아는 오만방자한 신이었다.” 그 말을 듣고 "오만방자한 것은 당신들 같은데?"라고 대답했습니다.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은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면서 왜 남의 신에게서 싸구려 휴머니즘을 찾는지(이는 '골고다의 도둑 이야기'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소설가 /대구교육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