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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이상한 목욕탕 /박명호

작성일 : 2024.06.05 02:57

<짧은 소설>

이상한 목욕탕

/박명호

 

 

출근길에 비가 왔다. 우산이 없어서 잠시 목욕탕 처마 밑에 비를 피했다. 잠시가 아니라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비 속 거리 풍경이 몽롱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탕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엉망이다. 특히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몹시 추해보였다. 마침 목욕탕 이발소에는 손님이 없었다. 이발사가 자리에 먼지를 털며 앉기를 권했다. 그런데 하얀 백발의 이발사였다. 늘 대하던 단골 이발사 아니었다. 주인이 언제 바뀌었는지 질문하려는데 그가 코를 훌쩍였다. , 그는 내가 늘 대하던 그 이발사였다. 그 이발사는 코를 훌쩍이는 게 특징이었다. 게다가 내게 보내는 지긋한 미소까지 틀림없는 그 단골 이발사였다. 그런데 그가 며칠 사이 저렇듯 백발이 되었는가. 단순히 머리만 백발이 된 것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팍삭 늙은 영락없는 백발노인이었다.

 

이발을 끝내고 목욕탕에 들어와도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발사 말이다. 평소에 약간 늙어 보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저렇게 팍삭 늙어버릴 수 있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만 늙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늙었을 수도 있다. 아니, 우리 모두가 같이 늙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내가 세월의 흐름을 잠시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한 십 년을 깜빡했을 것 같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다. 분명 엊그제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십 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친 것이었다.

거울을 봤다. 다행히 내 머리카락은 백발이 아니었다. 백발만 아니었지 얼굴은 늙었는지 알 수 없다. 거울을 자세히 보려니 목욕탕 더운 김이 잔뜩 서려 있다.

,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발사만 늙었는지, 나만 빼고 그들만 늙었는지, 아니면 모두 늙고 내 머리카락만 유전적으로 백발이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목욕탕에는 아무도 없고 목욕탕의 거울은 목욕탕 김이 서려 자세히 볼 수 없으니 나는 그의 백발에 대해 정의할 수 없었다.

따스한 목욕탕에 턱을 베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있다. 생각은 더욱 몽롱해졌다.

시간이야 가든지 말든지...

따뜻한 목욕탕 물은 모든 긴장을 풀어준다. 그 온기를 마음껏 감각하면서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세상사 늘 그렇듯이 고민이란 것 해봐야 오십 보 백 보일 때가 많다. 십 년 이쪽이든 저쪽이든 아무렴 어떤가.

예스터데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비틀즈의 노래였다. 언제가 목욕탕에서 한 장님이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노래는 내가 지금껏 들은 노래 가운데 가장 잘 부른 노래였고, 가장 아름다운 노래였다. 그 노래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목욕탕에는 나 하나뿐 아무도 없었다. 현실과 비현실이 도무지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지금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 갑자기 앗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수업을 깜빡한 것이었다. , 나는 수업을 하기 위해서 출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가 와서 지각을 감수하고 잠시 객기를 부려 목욕탕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일교시 반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선생님 찾다가 없으니 그냥 조용히 자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며 대체 수업을 하고 있을까?

아무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학교에 가서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욕탕을 나와 물기를 닦고 옷장을 열려고 하니 열쇠가 말을 듣지 않는다. 급한 김에 주먹으로도 쳐보지만 별 수 없었다. 옆에 인터폰이 보였다. 주인은 여자였다. 기술자가 와야 하니 기다리라고 한다. 주인이라도 와서 빨리 고쳐야할 게 아니냐? 내가 목소리를 높인다. 여자이기 때문에 남탕에 갈 수 없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급한데 남자, 여자가 무슨 문제냐고 나는 목소리를 더 높인다. 여자 주인은 한결 부드럽고 섹시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래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알몸으로 옷장 앞에서 발만 동동 굴린다.

<시민시대 20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