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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11.19 09:55
싸움의 기술㉑ - 부활하는 사랑
/양선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찾았습니다. 47년 전, 고등학교 때 사진입니다.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친구들이 여섯 명 앉고 서서 찍은 것입니다. 편집위원 일동이라고 사진 밑에 적혀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이 친구들과 함께 사진관 골방에 들어앉아 졸업앨범을 만들었습니다. 마침 사진관이 우리가 다닌 학교와 교명이 같은 여고 앞에 있었습니다. 누구의 소개였는지(사진 속의 한 인물이었을 겁니다) 미대를 지망하던 그 학교 학생 두 명이 와서 작업을 도왔습니다. 여백에 작은 삽화를 그려 넣었습니다. 두 사람 얼굴과 이름이 가물가물합니다. 지금 만나면 분명 못 알아 볼 것 같습니다. 아마 다시는 못 보고 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인연이 없는 한 그렇게 될 공산이 클 겁니다. 사진 속에는 먼저 이 세상을 떠난 두 친구도 희미한 미소를 띤 채 함께 있습니다.
사진은 망각과 시간에 저항합니다. 시간은 새로운 것을 가지고 와서 낯익고 편한 것들을 대체합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들을 탈색시킵니다. 그렇게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갑니다. 망각과 영원한 고립의 세계, 시간 여행의 종착지는 그렇게 죽음입니다. 살아있다는 것들은 누구나(무엇이든) 한 발 한 발 죽음을 향해 걷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의 것들을 자기 영토 안으로 옮깁니다. 그 시간의 폭력에 저항하는 게 사진입니다.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문득 어머니의 사진에서 ‘죽음’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빛과 시간의 정지, 특히 흑백의 명암이 주는 이미지는 죽음을 연상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이미지가 있어서 살아있는(살아있던) 것들은 더 화려합니다. 그는 죽음에 대비되는 '부활하는 사랑'을 사진 속에서 발견합니다. 그렇게 모든 사진은 죽음에 저항하고 사랑의 부활을 도모합니다.
죽음과 사랑 :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두 운명이 죽음과 사랑이라면 사진 또한 다르지 않다. 바르트가 말하듯 사진의 아이도스(eidos)가 죽음이라면(eidos : 관념체계·경험의 해석 기준 따위, 하나의 문화가 갖는 형식적인 내용) 사랑은 또 하나 사진의 본질인 인덱스 (index, 목록)다. 사진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음의 이미지로, 정지의 이미지로 바꾸지만, 동시에 그 죽음의 이미지는 사랑의 사건 속에서 베로니카의 손수건(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베로니카 여인의 손수건. 예수의 얼굴이 인화된 그림으로 유명하다)처럼 보는 이에게 생생하게 부활한다. ‘그때 거기서 그랬었다(that has been so)'라는 명증성, 즉 빛의 자국들인 사진의 인덱스 이미지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애도의 슬픔과 고통과 만날 때, 죽음에 대한 강력한 사랑의 protest(항의)가 된다. [김진영, ’사랑과 죽음 그리고 사진 : R. 바르트의 밝은 방 『카메라 루시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이 오래 된 흑백 사진이 바르트가 말한 대로 ‘죽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넘어서는 '부활하는 사랑'의 전도사가 되고 있는지 아직은 확실치 않습니다. 사진 속의 친구들과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아직은 아무런 말을 들려주지 않습니다(저에게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없습니다. 이 사진은 한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려 준 것을 캡처한 것입니다). 좀 더 두고 보면서, 사진 속 과거의 시간들과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어 볼 생각입니다. 시간이 하는 일은 시간에게 맡겨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강제할 수는 없는 것들을 억지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차분하게 기억 속의 그(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가/ 대구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