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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구의 다방 이야기 /문성수

작성일 : 2021.11.15 05:03

부산 중구의 다방 이야기

밀다원시대문학제 운영위원장 소설가 문성수

 

1. 일제강점기 동안 부산의 다방은 어떠했을까 -‘에덴다방

 

1930년대에 들어서면 경성에는 다양한 다방이 각각의 특색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여가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동경 우에노(上野) 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이순석이 경영하였던 낙랑파라’,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이 소공동에 개업한 '프라타나' , 이들 다방들은 주인의 의도에 따라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서양의 살롱문화처럼 당시의 독특한 다방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의 부산에는 경성과 같은 다방문화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다만 부산출신 소설가인 김말봉여사와 관련된 에덴다방이외엔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부산은 1945년 당시 인구가 28만여 명이었고 관부연락선이 오가는 항구도시이자 경부선의 시발점인 교통의 요충지로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근대식 다방이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이와 관련된 문화적 기록이 없는 탓에 그 역사를 알 수 없어 안타깝다. 다만 박원표의 부산의 고금(1965) 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광복동 에덴다방은 일제 때 동아일보 기자를 하던 고 강대홍씨가 사서 제일다방이라 이름을 고치고 태평양전쟁 직후까지 경영했다. 지금은 다시 에덴다방이란 이름으로 돌아왔는데, 한국인 경영으로서는 역사가 제일 오래다. 이 다방에는 여류작가 고 김말봉 여사와 지금 중앙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부산 출신 한무숙 여사도 자주 드나들었다. 음악이래야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이 판을 쳤다.

 

소설가 김말봉여사가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 <밀림>을 연재할 때 소설의 삽화를 당시 부산고녀 4학년생이었던 17세의 한무숙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김말봉과 한무숙은 부산의 첫 찻집인 에덴다방에서 만나 원고와 삽화를 주고받았다. 한무숙은 원래 화가를 지망했는데 이 일로 인해 소설가로 전향했고, 그의 동생 한말숙 또한 소설가로 등단하여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전 부산시청 건너편인 광복동 입구에 위치한 음악다방인 에덴’(중구 광복로 85번길 4)은 광복동 다방 거리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815 광복이후 피란시기에는 많은 음악인, 미술인, 문인 등이 왕래하면서 부산만의 독특한 다방문화를 선도하게 된다.

 

2. 광복이후 전문적인 음악다방 - ‘문화장

 

문화장은 바이올린 전공의 배도순(1920~2000)19495월 중구 보수동의 2층 건물 중 1층에 연 클래식 전문다방이었다. 그는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815 광복이후 진해여고 음악교사로 근무하다가 19475월에 부산으로 와서 부산음악연구소를 개설하였다. 이어 19495월 중구 보수동에서 음악다방 문화장을 경영하였는데, 이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현악 4중주단을 김광수·백경준·윤이상(尹伊桑)과 함께 조직하였다고 한다. 제갈 삼 교수의 초창기 부산음악사에 의하면 보수동의 적산건물인 1층은 고전음악다방인 문화장’ 2층은 부산음악원을 운영하면서 지역과 피란 온 음악가들의 사교장으로 장소를 제공했으며. 부산의 초창기 클래식 음악의 산실역할을 하면서 배도순이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 올라가기 전인 19583월까지 운영되다가 폐장되었다고 쓰고 있다. 8·15 광복 후의 시기는 유학생들이 속속 귀향하면서 이들이 몰고 온 이른바 서양풍의 문화 특히 고전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문화의 척도가 되던 시절이었다. 이들의 문화적 갈증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던 장소가 음악다방이었는데 그 중심에 에덴다방문화장이 있었다.

 

3. 피란수도 시절 부산 중구의 다방 전성기

 

6·25전쟁 기간 중 피란수도 시절(1950818~1026, 195114~1953814. 1023)의 부산은 '다방의 도시'였다. 2012년 부산발전연구원 시민연구로 채택된 유진경의 '1950년대 부산 중구 다방지도(임시수도기념관 학술연구총서 '부산, 1950's')를 보면, 그 시절 중구에만 73개의 다방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중앙정부가 옮겨온 서구의 부민동과 보수동이 정치 행정의 1번지였다면, 중구의 광복동과 남포동은 당시 한국 문화의 메카 역할을 했는데 그 중심에 다방이 있었다. 지역과 피란 온 문화예술인들이 서로 모여 시대적 불안과 정신적 허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은 다방 밖에 없었다. 김병익은 한국문단사 1908~1970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다방은 당시 갈 곳 없는 문인들의 안식처였고, 찾기 힘든 동료들의 연락처였으며, 일할 곳 없는 작가들의 사무실이었고 심심찮게 시화전도 열리는 전시장이었다.

 

당시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찾던 다방으로는 중앙동에 백조, 햇피’, 대청로에 청구와 루네쌍스광복동에 에덴, 예술구락부, 춘추, 다이야몬드, 미화당, 밀다원, 오아시스창선동에 금강, 휘가로, 늘봄, 망향, 파도남포동에 비원, 뉴서울, 스타다방 등이 있었다.

 

)피란수도 시절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안식처인 밀다원(蜜茶園)’

 

밀다원(광복동238-2)은 당시 전쟁이라는 시대적 절망과 피난살이의 고통 속에 있던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안식처 역할을 한 다방이었다. 마담이 일제강점기 때 도청 학무국장을 지낸 이의 딸이었으며 그녀가 작가들의 시선을 모으는 모나리자적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고은은 회상했다. 하지만 아래층에 전국문인단체총연합회의 사무실이 있어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가 매우 편한 곳이었기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밀다원에 모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들은 밀다원에 모여 전쟁의 불안과 삶의 고통을 서로 나누고 또 창작의 산실 공간으로 이용했다. ‘밀다원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김동리는 소설 밀다원시대를 통해 피란 온 문화예술인들의 삶과 예술, 절망과 고통 등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바 있다. 또 그는 문단회고사인 나를 찾아서에서 소위 예술 문화인만큼 난리 속에서 약하고 무능하고 서글픈 부류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때 찻집 밀다원에 모여들던 소위 예술 문화인들을 생각할 때만큼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모두가 거리에 나와 있었고, 거리에 계속 돌아다닐 수도 없으니까 결국은 아는 얼굴들이 모이는 다방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첫 번째 다방이 밀다원이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고은의 1950년대에 의하면 김동리와 황순원 조연현, 김말봉 등 기성문인들은 주로 밀다원에 모였고, 박인환과 이봉래 김규동과 같은 신진시인들은 주로 인근의 금강다방(창선동 15번지)에 모였는데 김환기와 이 준 같은 화가들이 금강다방의 단골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195181, 실연의 상처를 안은 정운삼 시인이 고별이라는 시를 유고로 남기고 자살한 사건으로 인해 밀다원은 문을 닫았다. 얼마 뒤 다시 문을 열었지만 그해 12월 영구 폐업하면서 기록에도 사라지고 말았다. ‘밀다원이 있던 자리는 1980년대에 한동안 왕비다방으로 업종을 유지한 적도 있었으나 현재는 의류대리점으로 바뀌어 그 흔적을 짐작만 할 뿐이다. 다만 중구청이 현 건물의 뒤편에 피란시절 밀다원다방의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을 설치함으로써 이곳이 피란시기의 역사적 장소임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부산 미술계의 황금기를 구가한 중구의 다방들

 

1952년 당시 대한미술협회 회장이었던 고희동은 에덴다방을 위시한 중구의 모든 다방에서 대한민국미술협회전(국전)을 분산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100여회의 전시회를 연 사실을 당시의 신문들은 전한다. 그리고 차철욱의 피란시절 부산의 문화에 의하면 19523월 대청동의 루네쌍스다방에서 문신의 개인전이 있었고, 19533월 서성찬, 김영교, 김종식, 임호가 중심이 된 <토벽>동인의 창립전도 열었다. 그 후 2회는 창선동의 휘가로다방에서 3회는 신창동 실로암다방에서 동인전을 가졌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창선동의 금강다방은 김환기와 유영국이 중심인 한국 최초의 추상파 그룹 신사실파의 아지트였으며, 이중섭은 여기서 양담배의 내피인 은박지에 철필로 선묘화를 그렸다. 이른바 다방이 그 유명한 은지화의 산실이 된 셈이었다.

 

) 그 밖의 문화적 기록을 남긴 다방들

 

정운삼 시인의 자살 사건으로 밀다원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들의 절반은 스타다방으로 절반은 금강다방으로 옮겨갔다고 고은은 회상했다. 고전음악다방으로 개업한 스타’(남포동 229번지 건물 지하)는 종군문인이자 시인인 전봉래가 그리운 사람에게 보낸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1951216일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한 장소이다. 비참한 피란 현실과 내일을 알 수 없는 시대의 불안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건은 당시의 문화예술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왔었다. 김규태 시인은 죽음으로 현세의 부조리를 극복했고, 그가 남긴 유서는 전쟁 시기에 우리 가슴을 무겁게 울린 광복동 엘레지였다고 회상했다.스타다방 자리는 670년대 태백, 등대, 백조다방을 거쳐 고전음악감상실과 민속주점으로 업종을 바꿔가며 운영되었다. 그 밖에 1953년 남포동에 문을 연 음악다방인 비원은 많은 음악인들이 드나들었는데 특히 작곡가 윤용하가 박화목의 시를 받아 이곳에서 가곡 <보리밭>을 작곡했으며,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청음훈련을 받기 위해 자주 찾던 곳이라고 한다. 11세 소년 백건우는 1959년 미화당백화점 근처의 아폴로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가진 바 있다.

 

)퇴폐와 향락의 장소, 다방

 

피란시절 부산의 다방은 문화공간으로서의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처절한 생존투쟁의 현장에 선 피란민들의 눈에는 한가한 이들이 모여 허황된 담론이나 퇴폐를 부추기는 타락된 장소로 비쳐졌는지 모른다. 얼굴 반반한 마담이나 젊은 레지를 앉혀 놓고 커피를 마시며 희희닥거리던 지난날의 다방풍경을 연상해 보면 그리 터무니없는 오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듯 다방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피란수도의 장면 총리가 나서서 다방과 요정을 출입하는 공무원들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 동아일보(1952515일자)는 단속된 공무원의 수가 191명에 이른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수의 다방이 부정행위의 은밀한 장소로 이용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 환도 이후 부산의 다방.

 

1953727일 휴전이 되자 정부는 피란수도 부산을 떠나 서울로 환도했다. 많은 피란민들이 고향을 찾아 부산을 떠났다.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경향신문 1953914일자 환도 이후의 부산이란 기사에 의하면 피란민들이 부산을 떠난 후 다방의 숫자는 3분의 1로 급격히 줄었고 파리만 날리던 다방과 요정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 또한 부산이 겪어야 할 숙명적 시련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광복동과 남포동의 다방들은 여전히 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적 공간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에덴문화장을 비롯한 많은 다방이 음악감상실의 역할을 지속했고, 시화전이나 미술작품 전시회가 다방을 중심으로 꾸준히 열리면서 부산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데 그 장소로서의 소임을 수행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