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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5.26 12:36
싸움의 기술⑤ - 싸이코지만 괜찮아
/양선규
<싸이코지만 괜찮아>(tvN, 2020)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김수현(문강태), 서예지(고운영), 오정세(문상태)가 주인공을 맡은 멜로드라마였는데 스토리는 지금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강태와 상태, 두 형제 사이에서 벌어지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드라마’가 짜임새가 없었던 드라마였습니다. 인물들이 남긴 인상도 그리 강렬하지 않았습니다. 느낌적 느낌으로, 운영이 나비의 몸통(진싸이코)이라면 강태와 상태가 두 날개(역할이 도치된 형제관계)가 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긴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캐릭터의 폭이 너무 좁고 인물들간의 관계설정도 조금 억지스런 조합이었습니다. 드라마든 소설이든,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성격 창조’가 참 어려운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싸이코를 전경화시킨 드라마인데 작가가 싸이코가 아니거나, 싸이코 경험이 없거나, 최소한 진(眞)싸이코를 만나본 경험조차 없는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도 일게 했습니다. ‘싸이코지만 괜찮아’라는 제목으로 드라마를 그리려면 최소 싸이코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어떤 느낌인지, 염력으로 움직여지는 세상인지, 아니면 얼음 위에서 제식훈련을 하는 느낌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진정하고 엄숙한 것이 되지 못하는 느낌인지, 자기가 몸으로 느낀 ‘느낌적 느낌’을 대사나 정황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밖에서 보는 싸이코만 가지고는 그 어떤 싸이코드라마도 쓸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싸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의 작가는 그 정도의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듯했습니다. 감독(pd)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시청자에 대한 예의와 성의가 많이 부족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제목은 좋았는데 제목 값을 못하는 드라마였습니다.
싸이코는 시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보면 ‘이마에 표식이 있는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데미안이 어머니에게 싱클레어도 그런 사람(동일 부류의)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을 이루어 ‘자기(自己, Self)’가 실현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융은 그런 인격을 '싸이코를 넘어선 경지'로 봤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싸이코와는 환전히 대극점에 위치하는 존재들입니다. 그와 반대로 싸이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절대로 통합(화해, 타협, 소통)되지 않는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자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타고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싸이코들은 싸이코라는 것에 대해서 일절 죄책감이나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당당하게 타고난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타고난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싸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말이 그래서 괜찮은 드라마 제목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 관계로(타고나는 관계로), 후천적인 싸이코 자질은 싸이코마다 각양각색입니다. 이를테면, 창의적인 싸이코, 선하고 유쾌한 싸이코가 있으면 미련한 싸이코, 악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싸이코, 이도저도 아닌 있으나마나한 사이코도 있습니다. 셜록 홈즈와 같은 인물(허구적 인물입니다만)이 창의적이고, 선하고, 유쾌한 싸이코라면(본인은 소시오패스라 주장합니다만)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악질 범죄자들이 악한 싸이코에 속합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전자는 향기로운 발효 식품이고 후자는 악취가 나는 부패한 식품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어차피 인간 사회는 수많은 싸이코들의 경연장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가장 기초적인) 싸이코 자질은 ‘부분을 전체로 여기는 것(편집)’과 ‘항상 먼저 도달하는 것(망상)’입니다. 인생은 수많은 조각들이 얼기설기 연결된 복합체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주관하는 변화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사람 사귀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라는 말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합니다. 개를 정승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게 인간 세상입니다. 돈의 힘이고요.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또 ‘텅 빈 자아’이기도 하고요. 그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내포가 숨어 있지만 결국 ‘싸이코지만 괜찮아’입니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도 변합니다. 그 변화하는 시류를 감내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인생입니다. 그런데 싸이코들은 그런 인생 복합체와 변화의 우주원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불쾌를 안기는 한 가지 사항에 전력투구합니다. 시간 속의 변화를 부정하는 강박 안에서 삽니다. 오직 그것만이 ‘나의 것이 되는 내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의 표적이 되면 괴롭습니다. 큰 싸이코를 만나면 멸문지화를 입기도 합니다. 일상의 작은 싸이코들에게도 괴롭힘을 많이 당합니다. 불문곡직하고 자신의 레인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싸이코를 만나면 일상이 엉망이 됩니다. 그들을 상대하는 게 두렵고 힘듭니다. 직접 당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보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경계합니다)으로 간주합니다. 제가 총구성원이 100명 안 쪽인 소규모 직장에서 삼십 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기초 싸이코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척보면 알 만한 사람들이) 못 잡아도 10%는 족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서 최소 열 명 중 한 명 이상은 싸이코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싸이코지만 괜찮아’가 맞는 말입니다. 하등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10% 이상이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편집이나 망상으로 싸이코들이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할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입니다. 반드시 끝을 봐야 하는 싸이코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에게 불쾌(모욕감)를 선사한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를 파멸시키려 듭니다. 자신의 지배성이 확인 되거나(넘치게) 표적이 되는 사람이 물질, 비물질적 피해(치명적인)를 충분히 입을 때까지 린치(사적 보복)를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잔인하게 가해합니다(상급 싸이코들은 반드시 충실한 수하를 둡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용서되는' 커다란 하나의 에로스가 존재합니다). ‘큰 싸이코의 복수’가 진행될 때는 대체로 ‘내 일이 아니면 내 몰라라’라는 비겁한 집단 정서가 널리 유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이 처신에 문제가 좀 있었다"는 식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 식으로 맹수(포식자)에게 동료가 잡아먹히는 것을 그냥 두고 봅니다. 개중에는 포식자가 배불리 먹는 것을 도와주는 배신자(그 역시 하급 싸이코입니다)들도 많습니다. 자신의 처신이 상급 싸이코의 눈에 들어 그의 가호를 입으며 무사히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여깁니다. 그렇게 피해자에게 이중 가해를 가합니다. 그런 하급 싸이코까지 포함하면 싸이코 비율이 20%를 넘게 됩니다. 그래서 또 ‘싸이코지만 괜찮아’가 됩니다. 20%는 잘만 뭉치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도 가질 수 있거든요.
타고나는 게 싸이코이고 주변에 널린 게 싸이코인지라 ‘싸이코지만 괜찮아’는 어디서나 진리가 되는 게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정말이지 이런 징한 불패의 싸이코들을 어떻게 하면 징벌할 수 있을까요? 법으로는 안 된다는 건 이미 눈치채셨죠? 법망(法網)으로는 싸이코를 가둘 수 없습니다. 원래 법을 만든 게 그들이니까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신 분이 거두어 가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났으니 태어날 때 그 자질을 주신 분이 그들을 챙겨 가셔야 합니다. 그때 유용한 격언이 두어 개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못하면 시간이 한다”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말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듯이 싸이코도 늙으면 힘이 빠집니다. 그때를 기다려 세월의 몽둥이로 때려잡으면 됩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으면 민심이 움직이면 됩니다. 동병상련하고 이심전심하는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면 싸이코도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려면 한두 사람 앞장을 서줘야 합니다. 불굴의 투지로 그들 싸이코들에게 대항하는 기개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들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 세상을 만드신 분이 말합니다(제 경험담이니 말분인 헛말이라고 생각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싸이코지만 괜찮아’는 그래서 또 정답이 되는 말입니다. 그것들이 아무리 돌풍을 일으키고 위세가 당당해도 본류가 아닌 이상 반드시 거품으로 사라집니다. 본류는 본류이기에 싸이코에게 절대 지지 않습니다. 싸이코는 본류가 아니기 때문에 싸이코인 겁니다. 그래서 싸이코들에게 ‘싸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말은 항상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이 귀한 지면을 빌려 '거지 발싸개 같은' 싸이코 이야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교양이 되는 인용 한 마디 하고 마치겠습니다. 늑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늑대는 남성 유혹자만은 아니다. 늑대라는 존재는 역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반사회적이고, 동물적인 경향을 대표한다. “오로지 한 마음으로 걸어가라”는 학교 다니는 어린이의 덕목을 포기하고,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빨간 모자는 쾌락을 쫓는 오이디푸스적인 어린이로 되돌아간다. 늑대의 꾀임에 빠져, 빨간 모자는 늑대가 할머니를 삼킬 기회를 내주었다. 여기서 이 이야기는 소녀에게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오이디푸스적인 문제점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빨간 모자를 늑대가 삼켰다는 것은 늑대가 모성적 인물을 죽일 수 있도록 행동한 빨간 모자에게 당연한 처벌이라고 말해 준다. 네 살짜리 어린이라도 빨간 모자가 늑대의 질문에 대답하여 할머니의 집에 갈 수 있는 자세한 길을 가르쳐 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상세한 정보를 주는 목적은 무엇인가. 늑대가 그 길을 찾아갈 줄 몰랐을까 하고 어린이는 혼자 놀라워한다. 옛이야기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른만이 빨간 모자가 무의식적으로 지체해서 할머니가 늑대에게 잡혀 먹게 된 사실을 놓친다. [브루노 베텔하임(김옥순, 주옥), 『옛이야기의 매력2』, 287쪽]
늑대는 옛날부터 ‘비유를 통한 설명과 이해’의 수단으로 자주 기용되는 동물입니다. 늑대의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악한 권력 의지’나 ‘질투와 지배욕의 화신’ 같은 뜻(원관념)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물질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소통되지 않는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항상 ‘늑대의 우상’이 발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늑대(싸이코)는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싸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말이 주는 경고는 그것들이 함부로 밖으로 나와 싸돌아다닐 때 가차 없이 몽둥이로(민심으로) 때려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작 무의식(싸이코)에 불과한 늑대에게 잡아먹힐 수 있으니까요. 둘러서서 동료가 잡아먹히는 것을 구경만 해서는 절대로 ‘싸이코지만 괜찮아’라고 태연히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가지지 못합니다. 결국 순차적으로 늑대(싸이코)의 먹이가 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설가/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