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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5.24 12:19
오월이 가지 전에
/윤일현
근심의 신 쿠라가 흙을 가지고 놀다가 형상을 하나 빚었다. 너무 보기 좋아 제우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달라고 요청했다. 제우스의 눈에도 좋아 보여 그것에 훅하고 숨을 불어 넣었다. 인간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간을 두고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흙의 신 호무스는 흙으로 만들었으니 자기 것이라고 했고, 제우스는 생명을 준 장본인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했다. 쿠라는 이 형상을 창안해 빚은 당사자라며 양보하지 않았다. 세 신은 서로 다투다가 결국 심판의 신 사튀른에게 판결을 의뢰했다. 사튀른은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흙으로 빚은 이 생명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 존재가 죽으면 몸은 흙에서 왔으니 호무스가 가져가고, 영혼은 제우스가 줬으니, 제우스가 가져가라. 살아있는 동안에는 형상을 빚은 쿠라가 소유하라. 명판결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근심 걱정의 신 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의 명저 ‘존재와 시간’에서 인용한 인간 창조 우화를 쉽게 풀어 써 보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했다. 인간이란 근심, 걱정 속에 살면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비극적 존재라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한 인간이 참된 존재인가 아닌가는 ‘죽음에 대한 태도’로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동전의 양면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다. 생의 의미란 죽음 앞에서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에게 타인의 죽음은 자신과 직접 관계없는 ‘그들’이란 3인칭의 죽음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저 타인의 죽음일 뿐이라고 말하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너’, 즉 2인칭의 죽음에만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내가 사랑하는 너’ 가 죽었을 때라야 슬프다. 남편, 아내, 자식, 친구도 ‘너’가 아니고 ‘그들’ 관계일 때는 그렇게 슬프지 않다. 여기서 ‘사랑’이란 스피노자의 말처럼 ‘너와 함께할 때의 기쁨’을 말한다. 서로 사랑하며 기쁨과 슬픔을 공유했던 ‘너’가 부재할 때, 우리는 극심한 아픔과 상실감을 느낀다. 나의 죽음, 1인칭의 죽음은 별 의미가 없다.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는 두렵고 고통스럽겠지만, 죽음 후에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나 붓다 같은 성인은 세상 모든 ‘그들’의 죽음을 ‘너’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들 자신이 사랑과 자비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죽음에는 초연해질 수 있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다음이다. 톨스토이의 중편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법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성공 가도를 달리던 이반이 갑자기 원인불명의 병에 걸려, 삶의 의미를 고통스럽게 성찰하며, 고독 속에서 맞이하는 실존적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연민’만이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말년에 톨스토이가 생각한 의미 있는 삶,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의 열쇠는 보편적 사랑이다. 보편적 사랑이란 공감과 연민, 용서다. 톨스토이는 “사랑은 죽음을 막는다. 사랑은 생명이다. 다만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사랑이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과 같고, 서로 사랑하면 육신이 곁에 없어도, ‘너’는 여전히 살아 있는 생명으로 ‘나’와 함께 있다. 그는 가족애를 강조했다.
가정의 달 오월이다. H.G.웰스는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고 사랑이 싹트는 곳이요, 큰 사람은 작아지고 작은 사람은 커지는 곳이다”라고 했다. 더 늦기 전에 멀리 가까이 있는 가족들과 사랑의 마음으로 소통하고, 화해와 용서, 연민과 배려로 혈육의 정을 나누며 결속을 다져보자.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