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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5.07 08:54
출 항 지 (出 航 地)
/문성수
‘카페 테네리페’
건물 중앙의 캐노피 출입문 위에는 반달 모양의 목판이 걸려 있었다. 원 주변을 따라 ‘Cafe Tenerife’가 둥글게 쓰여 있었고, 그 아래 지름까지의 공간에 ‘出航地’라고 쓰인 상호가 흐릿한 불빛 속에 드러났다.
홀 안에는 원초적인 음성으로 흐느끼듯 부르는 스티브 고울드의 ‘Sympathy'가 축축한 공기 속에 떠다니고 있었다. 벽면에는 선등(船燈) 모양의 백열등이 여러 개 달려 있었으나, 오래되고 낡은 목재 양식의 어두운 색조 탓인지 제 빛을 발하지 못했다. 비 내리는 부둣가의 어둠과 별 나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급이 가져다 놓은 맥주를 컵에 부어 천천히 마시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30여 평의 장방형인 홀 안은 온통 선박에 관련된 기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바텐더가 위치한 목로 뒷면에는 커다란 조타기와 육분의, 측심기가 걸려 있어 그 곳이 마치 브리지와 같은 인상을 주었고, 긴 탁자가 놓인 곳의 벽에는 커다란 해도와 선등, 세마포르 신호기가 걸려 있어 배를 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음악이 ‘Darin Rilli'로 천천히 바뀌면서 분위기를 더욱 고혹적으로 흐느적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오후 들어 태풍경보가 내린 탓인지 세찬 비바람이 적막한 어둠 속의 부둣가를 훑어 지나갔다. 태풍을 피해 내항으로 몰려든 배들이 밝힌 마스트등과 정박등은 높은 파도에 못 이겨 제멋대로 일렁거리고 있음이 창밖에 비쳐졌다. 그 때 웬 사내의 울울한 음성이 터진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같이 들려왔다. 탁자 몇 개 건너 창문 쪽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내였다.
-아, 무서운 폭풍이여! 난폭한 숨결이여! 바다 밑바닥까지 끌어올릴 힘으로 지구 건너편 어둠까지 몰고 와, 그 앞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나를 조롱하듯 비바람을 쏟아 붓는 폭풍이여! 그러나 두려움의 원천은 내 마음이 정처 없음에 비롯된 것. 갈 길을 잃어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기가 죽어 있음에 비롯된 것. 무엇이든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법…….-
사내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팔을 벌려가며 커다랗게 읊조렸으나, 이상한 건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군데군데 탁자를 차지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행과 담소하며 술을 마실 뿐이었다. 사내 역시 독백조의 읊조림을 마치고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텐더에게로 가, 술을 한 잔 청해 가지고는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그의 시선이 사내를 따라 다니는 사이. 긴 머리를 흰 블라우스 위에 늘어뜨리고 짧은 스커트에 앞치마를 두른 여급이 그의 탁자에 와 걸터앉았다. 30대 초반쯤 보이는 늘씬한 미모의 여자였다.
“여기 처음 오셨죠? 여기에 오는 분들은 정해져 있어요. 거의 매일 이 곳에서 살다시피하 는 저기 몇 사람들과 출항을 앞 둔 선원들이죠. 아마 배타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뭐 상관 있나요. 술은 어느 종류든 다 있어요. 원하시는 걸 드실 수 있어요. 그러나 안주는 간단한 마른 것 약간 뿐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먹고 싶은 안주를 밖에서 사들고 오기도 하 지만 아무래도 상관하지 않아요.”
그는 미소를 흘리며 말하는 그녀에게 뭔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잔을 건네 술을 권했으나, 그녀는 손으로 막으며 일어섰다.
“이 곳 규칙이에요. 저희들은 술을 못 먹게 되어 있거든요. 조금 있다가 캡틴이 인사하러 오실 거예요.”
“캡틴이라니?”
“저기에 있는 바텐더 말이에요. 이 곳 주인인데 우린 그냥 그렇게 불러요. 그럼 이따…….”
그녀는 쟁반을 들고 건너편 좌석으로 옮겨갔다. 그는 무엇에 홀린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그 사내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한쪽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술을 마시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일행과의 담소에 열중이었다. 음악이 바뀌면서 불현듯 사내가 읊조린 독백의 내용이 그의 귀에 공명치 듯 되살아남을 느꼈다. -두려움의 원천은 내 마음의 정처 없음에 비롯된 것…….- 어찌 보면 가장 보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평범한 말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늘 그에게 와 닿는 느낌은 그게 아니었다. 꼭 자신의 내부적 상황을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낸 것 같은 아픔이, 마음 속에 번져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요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번민 속에 빠져 있었다. 그 원인이 딱히 무엇이라고 끄집어내기는 힘들었으나, 그가 몸담고 있는 잡지사의 일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아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랬다. 처음 입사할 때의 당당했던 패기와 순수한 열정이 그만 누더기 같은 경력이 쌓아질수록 찬물에 뭐 줄듯이 쪼그라져 버렸다는 사실과, 잡지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지난날들이, 얼마나 무모한 믿음에 지나지 않았던 가를 요즘 들어 아프게 깨우치게 되면서부터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졌던 것이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도시 속의 섬’이라는 주제로 물밑에 가라앉아 있는 소외된 지역의 삶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도시의 일상 속에 드러내기 위한 특집 기획이 있었는데, 그 연속물이 2회 째 나가게 되자 그간 그의 잡지에 별 신통함을 보이지 않던 독자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나타냈었다. 판매 부수의 증가는 물론이고 실린 내용의 장소가 실제로 어디이며, 또 그 주인공들을 한 번 만나 보게 해 줄 수는 없겠느냐는 문의 전화가 하루도 몇 건씩 편집실에 날아왔던 것이다. 그런 독자들의 호응에 한껏 고무된 주간은 내내 싱글벙글 하면서 자축연으로 술자리까지 마련하여 특집을 담당했던 기자들의 그간 노고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건배를 외쳤었다.
그런데 그 날 술좌석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을 때, 갑자기 주간은 마이크를 뺏어 잡더니 느닷없이 그를 가리켜 다음달의 3회분을 그가 맡아 써야 하겠다며 정식으로 지시하였던 것이다.
“강 기자! 요즘 왜 그래? 날이 갈수록 나빠지잖아! 잡지가 어디 편안히 앉아서 머리로 쓰 는 거야 응? 머리로? 쇼킹하면서도 쌈박한 이색적 소재를 발굴해 한번 칼클케 써 보라구, 칼클케! 잡지쟁이 10년이면 송아지하고 부르면 적어도 음메 정도는 나와야 하잖아!”
흥에 들떠 있던 동료들은 예상하지 못한 주간의 갑작스런 태도 돌변에 의아해 하다가, 그게 농담이 아님을 깨닫고는 주간과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만 주흥이 깨져 버린 적이 있었다. 그는 주간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주간의 빈정거림대로 10년 경력을 가졌음에도 기획 특집 같은 데는 언제나 그를 제외 시켰고, 3년 전부터는 아예 편집부에 남게 하여 겨우 다른 기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게 만든 일부터 시작해……. 이번 일만해도 그랬다. 그런 중요한 지시를 다른 곳도 아닌 자축연 술자리에서 그렇게 내던질 성질은 아니었다. 해마다 거듭되는 소비 불황으로 인해 더욱 나빠진 잡지 출판업의 사정을 감안해서라도, 이번 특집 기획으로 겨우 적자를 줄일 정도인데, 아니 어쩌면 독자들의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잡지사의 명운이 달린 문제일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정식 편집회의가 아닌 술자리에서 농담하듯 빈정거리며 내던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걸 모를 리 없는 주간의 돌출적 행동은 요즘 무력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용케 읽어내고, 어떤 저의를 숨긴 의도로써 그렇게 지시했다고 밖에 인정할 수 없었다. 동료들은 다시 분위기에 불을 지펴 흥을 돋우려 했으나, 한번 사그라진 물건은 좀처럼 불길을 일으키지 못했다. 술판은 그만 파장이 되어 버렸었다
그는 홀로 그 곳을 나와 허한 마음을 그대로 안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포장마차에 들렀을 때, 후배인 정 기자가 따라와 붙었다.
“선배님, 너무 언짢아하지 마세요. 주간의 어투가 원래 그렇잖아요? 허지만 선배님, 내가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번 특집 기획을 맡게 됐으니 예전처럼 한번 멋지게 일구어 보세요. 건방진 소리지만 제가 소스 하나 제공할게요. 저 부둣가 수산물 시장 아시 죠? 그 곳에서 남항 방파제 쪽으로 가는 꺾여진 길 있잖아요. 왜 냉동 창고들이 있는 쪽 말이에요. 그 곳에 가다보면 ‘테네리페’라는 카페가 있어요. 그 곳에 한번 가 보세요. 뭔가 얻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지난 호의 특집을 담당했었다. 전속 자리 하나 얻지 못해 떠돌아다니는 악사들의 인력시장 일명 딴따라 노동시장과, 생활의 궁핍 때문에 화가로서의 대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화가들이 은밀히 모여 동서양 명화들을 모작으로 임화하여 수출까지 하고 있는 그늘진 곳을 다루어서 호평을 받았던 여기자였다. 그 날 둘은 만취가 되도록 술을 먹었다.
“저의 카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깊은 생각 속에 잠겨 있다가 자기 앞에 불쑥 나타난 인물에 조금은 놀라면서 엉겁결에 인사를 받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수염을 알맞게 기르고 눈초리가 매서운 초로의 사내였다. 작업복을 아무렇게나 걸쳤으나 상체가 발달되고 키가 커서인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곧 그가 주인 겸 바텐더임을 알았다.
“ 이 곳 주인되신다구요. 좀 앉으시죠. 여쭐 말씀도 있구. 저는…….”
하며 그는 자신이 이 곳에 오게 된 이유와 목적을 밝히려 하자, 사내는 그의 말꼬리를 냉정히 잘라 버렸다.
“아닙니다. 일을 봐야지요. 그리고 이 곳 안에선 누가 누구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느낀 대로 생각한대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빈약한 혀로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 니까.”
브리지 같은 둥근 목로로 되돌아가는 바텐더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머리 속에서 의구심을 동반한 난기류가 일어남을 느꼈다. 어느 외국 항구의 술집에 들어온 것 같은 이국적 정서, 캡틴이라고 부른다는 바텐더의 이해할 수 없는 첫인사,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실내도 두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바텐더를 중심으로 자신이 속한 왼쪽 공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멋 대로였다. 광대 같은 그 사내는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린 채 몸을 의자에 푹 파묻고 있었고, 아까부터 주위에는 아랑곳없이 뭔가 열심히 그리고 있는 젊은 사내, 하얀 해군 제복을 입고 실내를 이쪽저쪽 천천히 거니는 노인, 그런데 오른쪽 공간은 이쪽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간혹 욕지거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여급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희롱을 즐기는가 하면, 한 손에 술잔을 들고 벽에 붙은 해도를 가리키며 ‘우린 이 곳으로 가게 될 거야.’라며 먼 대양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으로 술을 마시는 등, 이 쪽의 차분하게 갈아진 분위기에 비해 그런 대로 생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 곳의 분위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정 기자는 왜 이런 곳을 찾아보라고 했을까. 분명히 여느 술집과는 다른 이색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선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왜 이곳을 찾으라 했을까. 그가 맥주를 들이키며 머리 위에 꽃봉오리처럼 피어오른 의문에 싸여 있을 때, 출입구에는 비에 흠뻑 젖어 세찬 바람과 함께 들어서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잠시 멈추어 서서,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수건을 꺼내 물기로 흐려진 안경을 닦아 다시 썼다. 그리고 바텐더를 향해 손을 약간 올려 보이고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목례를 하면서 광대 같은 사내 맞은편에 가 앉았다.
-오, 친구여! 이렇게 올 수 있도록 폭풍우가 그대를 용서했는가. 그대는 오늘도 진정 사랑 해 보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또 어떻게 강의하고 돌아왔는가. 그대가 사랑하고픈 여자의 눈에는 그대가 캄캄한 밤이었고, 그대를 사랑하고픈 여자에게는 그대의 눈이 칠흑같이 어 두웠던 지난 날. 가엾은 그대여! 그대의 학식과 명예가 그대의 눈을 점령했도다. 자아도취 의 죄악에 대한 치료법은 없나니, 다만 세월의 잔인한 칼에 의한 주름 속에 청춘이 매몰되 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그대에게 여자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쫓아가면 도망하 고 달아나면 쫓아오는, 아! 그대의 운명이 정녕 그러한가. 그래서 인생을 허무하다 할 것 인가. 친구여! 늦지 말게나. 호달마(胡達馬)도 기울면 왕십리 거름 싣게 되고, 기생도 그 릇되면 길가의 주막에 나앉게 되는 법. 사랑할 지어다 미친 듯이 사랑할 지어다.-
의미 모를 광대 같은 사내의 읊조림이 길어지는 동안, 여급은 바텐더가 내어주는 마른 수건과 술을 받아 조금 전에 들어온 사내에게 가져다주었다. 안경 쓴 사내는 마치 거실에서 자기 아내에게 대하듯 자연스럽게 받아 머리를 닦았다.
그는 그들의 기이한 분위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바텐더가 여기에선 누가 누구일 필요가 없으며, 쓸데없는 설명은 불필요하다고 말했으나 참고 견디며 그들을 지켜보기엔 궁금증이 더욱 심해만 갔다. 그래서 그는 광대 같은 사내 곁으로 갔다. 그리고는 명암을 꺼내 그에게 주며 인사를 건넸다.
“이게 뭔가? 이것이 그대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 그래 그대는 무얼 말하고 싶 은가.”
그는 거의 일상적인 수인사를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으나, 돌아오는 사내의 반응은 전연 예상 밖이었다. 그는 당황하여 자리에 앉지도 못해 엉거주춤한 상태로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 앉게나. 구름 같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마디의 명령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 다고 자신하는 제왕이나, 남이 먹다버린 쓰레기통을 도둑고양이처럼 뒤지는 거지들이나 누구든지 와서 앉을 수 있는 자리일세. 그래 그댄 무얼 알고 싶은가?”
그는 사내의 어투와 행동이 마치 가르침을 얻으러 머리를 조아리는 제자에게 내리는 위대한 스승의 거룩한 말씀처럼 들려, 한편으론 우스꽝스럽기도 하면서 황당하고 한편으론 어떤 야릇한 신비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듬거리며 잡지사의 특집 계획을 이야기하고 이색적인 이 곳 분위기를 한번 다루고 싶다는 뜻을 정중히 피력하였다.
“여보시게 친구들! 잠깐 이리 모이시겠나? 여기 이 자가 이 곳과 우리들에 대해 뭘 좀 알 고 싶다고 그러는데 , 대체 누가 말해 줄 수 있겠나?”
그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림을 그리던 젊은이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제 일에 열중이었고, 해군 제복을 입은 노인도 목로 주변을 서성거릴 뿐, 조금 전에 들어온 초로의 사내는 수건으로 머리를 매만지면서 누구와 약속이나 한 듯 출입구 쪽만 흘끔거리고 있었다. 바텐더는 손으로 턱을 괜 채 이쪽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광대 같은 사내는 두 팔을 벌려 으쓱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대여! 보시다시피 그대의 일상적인 말로써는 얻을 것이 없을 것 같으이. 우리는 말로써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환상에 간혹 빠지지는 않았나? 말이란 게 뭔가? 뱉 어 놓고 나면 실체는 사라져 버리고 껍데기의 의미만으로 둥둥 떠다니며 실체에 대한 환상 만 난무하게 만들 뿐,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그 빛으로만 우리에게 보이듯이……. 용서하시게, 그러면 정작 그런 너는 왜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가 묻고 싶겠지. 이해 하시게나. 나는 이렇게 나에게 담겨 있는 쓸데없는 말들을 하나 하나씩 붙들어내 메아리 없는 어둠 속으로 던져 버리고 있는 중일세.-
그는 달리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무어라 대꾸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광대 같은 사내가 뱉어내는 과장된 어투가 그와의 관계를 서먹서먹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그의 말이 전연 그르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랬다. 그의 말대로 말로써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사건이나 자신의 의도를 말이나 글로써 옮기려 할 때, 과연 사실의 실체를 어느 정도나 꿰뚫어 전달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미 말이나 글로 옮겨지는 순간, 윤색되거나 본질과는 멀어져 실체를 흐트러지게 만들지는 않았던가. 그것은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오던 물음, 잡지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보려했던 무모한 시도에 대한 물음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 괴로운 심정으로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의 머리 속에는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 자들은 무엇인가. 즐겁게 떠들면서 혹은 남을 씹으면서 적당히 여급과 즐기면서 술을 마시는 저쪽 편과는 달리, 대화는 별 없었지만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행동으로, 제멋 대로인 것 같이 보이지만 그래도 다소 자유로워 보이는 저 자들은 누구인가. 사내의 말대로 우리 일상에서 살기 위해 가져야 하는 쓸데없는 것들을 비워내기 위해 이 곳을 찾은 자들인가.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가 빠르게 스치는 의문을 쫓아다닐 때, 저편에서 술을 마시던 일행들이 일어나 출항을 위한 건배를 외치고는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바텐더는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선 지 그들 곁에 다가서고 있었고, 곧이어 광대 같은 사내의 울울한 읊조림이 또 들려왔다.
-바다의 자비로움에 폭풍우는 이제 노기를 거둬들이고, 세상의 보석을 모두 깔아 놓은 듯 물결은 찬란하게 반짝거리는구나. 이제 바다의 알맞은 숨결로 돛은 부풀고, 만물을 밝히는 태양이 구름 속을 비집고 나와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를 환히 비추는 도다.-
이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들며 바깥으로 나가는 그들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그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이 이방인처럼 느껴졌는지 어색한 행동으로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정 기자를 떠올렸다. 이 곳을 찾아보라고 한 만큼 그녀는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이 곳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헤집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세찬 비바람은 여전했다. 일렁거리는 배의 마스트에 부딪히는 바람소리가 잉잉거렸다. 마치 악마가 내뿜는 입김 같은 세찬 바람이 짙은 어둠을 이리저리 몰고 다녔다. 그는 스산스런 부둣가를 빠져나와 남포로 건너편에 있는 호텔의 칵테일 바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해 휴대폰으로 정 기자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마침 그녀는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녀가 이리로 올 수 있음을 확인하고는 바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는 겨우 10시를 넘긴 시간임에도 태풍경보가 내린 탓인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는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창 측에 앉아 담배를 꺼내 피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그 곳이 마치 꿈속에 보았던 어떤 곳처럼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취재를 위해 구석진 삶의 현장까지도 두루 다녀 보았다고 생각했으나 ‘테네리페’ 처럼 기이한 느낌을 주던 곳은 없었던 것 같았다. 자꾸 광대 같은 사내의 읊조림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런데 머릿속에 공명치는 그 말을 자꾸 되뇔수록 그것은 꼭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말들이 마인처럼 되살아나, 자신을 깔깔대며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적잖이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연이어 피어댔다.
그가 생각에 묻혀 있는 동안 정 기자가 바 안에 들어섰다. 청동상같이 묵상에 잠겨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앞좌석에 가 앉았다.
“어딜 다녔기에 이렇게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해 가지고 앉아 있어요? 그리고 핸드폰은 왜 꺼 놨어요? 저녁 때 주간이 찾던 눈치던데…….”
“으응, 집에 가 쉴텐데 이렇게 나오라고 해서 미안해.”
그는 아직 생각의 마취에서 덜 풀린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런 일이 언제 있었나요? 난 선배님이 가끔은 이렇게 불러 주었으면 좋겠어요. 술도 종종 사주시구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근데 정 기자, 나 오늘 정 기자가 말하던 그 곳에 갔더랬어.”
“그 곳이라뇨? 아, 아, 그 카페 말인가요. 이렇게 비가 오는데……?”
“응, ‘테네리페’에 대해 정 기자가 뭐 좀 아는 게 있으면 물어 볼려구 불렀어. 우선 술을 좀 시키지. 뭘루 할까?”
“오늘은 양주 한잔하고 싶어요. 커티샥으로 하죠.”
“커티샥?”
“왜 대양을 헤쳐 가는 큰 범선이 그려진 위스키 말이에요. 1860년 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빠른 배 이름에서 유래되었대요.”
“정 기자는 범선에 흥미가 있는 거야 아니면 술에…….”
그는 웃으며 웨이터를 불렀다.
“꽤 부드러우면서도 이름만큼이나 빨리 취하죠. 그러면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듯한 여행 기분에 빠질 수도 있고요.”
그는 웨이터에게 커티샥 두 잔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배를 타고 있는 듯 했던 까페 테네리페를 떠올리며 정 기자에게 물었다.
“정 기잔 그 곳을 어떻게 알았지?”
“제 친구 남편이 원양어선 항해사인데 출항 전에는 꼭 그 집에 한 번은 간대요. 순조로운 항해를 하기 위한 징크스라나 뭐라나. 어지간한 선원들 사이에는 거의 불문율로 통하는 출 항 절차라고 해서 약간의 호기심이 생기고, 또 무슨 쓸거리라도 얻을까 해서 찾게 됐어요. 그 집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던가요?”
그는 웨이터가 갖다놓은 술잔을 들어 맛을 음미하면서 브리지와 같이 꾸민 목로 뒤편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듯한 바텐더의 행동과 선실 같던 분위기, 그리고 광대 같은 사내의 연극대사를 읊조리는 듯한 과장된 몸짓과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다.
“마치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작위적인 면도 보이지만 인물들의 행동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일상이 꿰뚫고 들어오지 못할, 말하자면 일상적 궤도를 벗어나 듯한 분위기인데도 어떤 자유스러움이 풍겨 나오는 기이함에 젖게 되더군.”
“선배님도 역시 그렇게 느꼈군요. 그 곳에선 현실적인 누가 누구일 필요가 없어요. 무슨 행 동을 해도 상관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단지 그들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어요. 주인과 그 곳에 자주 오는 사람들에 대해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아서 나름대로 알아내는데 제법 시간 이 걸렸어요. 선배님, 오늘 톡톡히 한잔 사셔야 해요. 그런데 많은 기대는 말아요. 투자한 시간에 비해 알아낸 사실은 얼마 되지 않거든요.”
그녀는 반쯤 비워진 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고는 웨이터를 불러 다시 주문을 했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파악한 인물에 대한 정보를 풀어놓았다.
쉰이 조금 넘은 주인 겸 바텐더는 전직 기관장 출신이라는 것. 테네리페를 기지로 한 대서양어장에서 조업을 하다 불의의 낙상사고로 인해 다리를 심하게 다쳐 배를 탈 수 없게 되자, 귀항 후 창고로 사용하던 적산 건물을 개조해 카페를 운영하게 된 지 근 15년이 되었다는 것과. 광대처럼 행동하는 사내는 이 도시 연극계에서 지난 날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던 배우인데, 한창 연기가 물이 오를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홀연 사라져 버려 화제가 되었던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서 몇 년 전부터 그 곳에 자주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안경 쓴 이는 현재 대학 철학과 교수로서 학생들로부터는 ‘깐깐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원칙에 매달려 있는 독신남이라는 것과 해군 제복을 입은 노인은 중령으로 제대한 해군 출신으로 가끔 나타나 말은 주로 하지 않고 갑판 위를 거닐 듯 그 곳을 어정거리다 술에 취해 돌아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또 그림을 그리는 젊은이는 화가 지망생으로 구석에 놓인 캔버스 앞에 앉아 있지만 한번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스케치로만 끼적거리는 시작을 되풀이한다는 이야기였다.
“아,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어요. 제 또래의 여자예요. 늘 어디론가 떠나기 위한 사람처럼 캐쥬얼한 복장에 여행용 가방을 매고 간혹 나타나는데, 어쩐지 정상이 아닌 여자처럼 보였 어요. 앞뒤가 맞지 않은 이야기를 자주 하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는 숨긴 채 간단명료한 보고 양식을 택한 듯 인물 소개를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알려 준 내용은 그가 테네리페에 앉아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달아 추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선배님, 출항을 앞 둔 선원들은 무엇 때문에 생긴 징크스인지 모르지만 그 곳을 찾는 이유는 명백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왜 그 곳을 자주 찾는 걸까요? 그 곳이 주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묻히고 싶어서 일까요? 생각해 보세요. 혹시 그들 모두 자신의 어느 반쪽 면만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은 느낌은 받지 않았나요?”
그는 공감했다. 망망대해를 달리는 배 안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그들은 모두 일상을 벗어난 저쪽 면만 보여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 갑자기 그의 머리 속을 스치는 의문이 있었다.
“정 기자, 정 기자 나름대로 많은 것을 취재해 놓고, 왜 그 곳을 나에게 제공했어? 도대체 그렇게까지 나에게 베푸는 진의가 뭔지 알고 싶군.”
“주간이 선배님에게 특집 3회분을 쓰라고 했지만, 다른 기자에게도 은밀히 똑같은 주문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나요? 그럴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선배님이 더 잘 알 수 있을 터 이고. 어때요? 그 곳의 삶을 일구어 한번 쌈박하게 특집을 꾸밀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보 는데……. 하지만, 하지만 진짜 이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어요.”
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그리고 몇 잔을 더한 후 그 곳을 나왔다. 비바람은 여전했다. 휘어지는 우산으로는 겨우 얼굴만 가릴 지경이었다. 로비에서 택시를 불러 그녀를 태워 보내고 그는 다시 빗속을 걸어 테네리페로 갔다. 머릿속에는 진짜 이유를 밝히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이 비수가 되어 뇌리를 아프게 찔러 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그 곳의 홀 안은 여전했다. 한 선원이 싫다고 도리질하는 여급과 입을 맞추는 사이, 다른 사람은 치마 속을 더듬는 등, 진한 행동으로 분위기에 열을 올렸고, 이쪽 편은 제멋대로의 자세로 앉아 선원들의 술자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다가는 광대 같은 사내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등 자기들만의 담소에 열중이었다. 그런데 목로에 앉아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웬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 흩어졌고 여행용 가방이 그녀 곁에 놓여져 있었다. 그는 정 기자가 말하던 이상한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캡틴, 한 잔 더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취하지 않았거든요. 난 곧 테네리페로 갈 거예요. 그런데 캡틴, 테네리페가 어디죠? 어디로 가야 하죠? 어딘지도 모르는 데 난 자 꾸만 가야해요.”
바텐더는 아무 말이 없이 술을 따른 후 그녀 앞에 밀어 놓았다.
“오늘은 산에 올라갔거든요. 그런데 테네리페가 아니었어요. 어떻게 아냐구요? 하늘에 해가 없었어요. 별두 없구요. 비에 젖은 나무만 있었어요. 그 나무가 가지 못하게 나를 붙잡았어 요. 겨우 도망쳤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늦게 왔어요. 나 여기에 와도 괜찮죠?”
바텐더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가며 묵묵히 듣기만 했다. 정 기자의 말대로 그녀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초점을 잃어 풀린 눈동자하며 가늘게 벌어진 입이 오히려 천진스럽게 보였다.
그때, 출입문이 갑자기 열렸다. 웬 사내가 허겁지겁 들어와 실내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더니 목로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뛰어갔다. 숨을 헐떡이는 그는 온몸이 비에 젖은 상태였다.
“여기 있었군!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여보! 제발 집에 있으라고 해도 이렇게 돌아다니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려, 아이들 생각도 해야지! 응, 자. 어서 일어나, 집으 로 가야지. 애들이 울며 찾고 있잖아. 응.”
그는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어린애 달래듯 그녀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그래, 그래. 병만 나으면 내가 어디든 데려다 줄께. 가고 싶은데 어디든 데려다 준대두. 응?”
남자의 팔에 기대어 얌전히 일어서던 그녀가 갑자기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내달았다.
“싫어! 싫어! 나를 도와 주세요! 나무가 나를 붙잡으려 해요! 나를. 나는 집에 안 가! 나는 멀리 떠나고 싶어. 멀리 가고 싶어!”
사내는 재빨리 뒤쫓아 가 그녀를 우악스럽게 붙잡더니 강제로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서 끌고 나갔다.
“빌어먹을. 그래, 어디든 가도 좋아. 가도 좋다구! 그런데 오늘은 안 돼! 집에 가야 해. 제발 정신 좀 차려! 이게 무슨 꼴이야!”
홀 안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문밖으로 거칠게 끌려 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 마디 씩 내던졌다.
-미친 여자였구먼. 얼굴이 아까워.-
-집안 식구들 골병께나 들겠어. 여자가 저 모양이니.-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거야? 어디로 가고 싶은 거지?-
그러나 이쪽 편의 사람들은 모두 침묵으로 출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텐더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넋을 잃은 사람들처럼 그녀가 끌려 나간 빈 공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때 광대 같은 사내의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엾은 여인이여! 그대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대의 비애는 무엇으로 비롯되었는가. 대부분 의 사람들은 하나의 그림자로 만족하지만, 그대는 두 개의 그림자를 가졌기 때문이리라. 머 물 수 없어 달아나는 마음. 미지의 섬을 찾아 닻을 올려 망망대해로 달려가는 마음. 그대의 여행이 비록 고달프고 우울할지 모르지만, 그대가 진정 바라는 목적지는 안락과 휴식이 아니라 이 곳에선 찾을 수 없는 자유의 환상이 가득한 저 미지의 섬인 것을……. 그러나 나는 지난 날 갈구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했음에 한숨짓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옛 비 애에 새삼 괴로워하노라. 그리고 이 밤의 어둠 속에 숨어있는 이 친구들을 위해 메말랐던 나의 눈에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 떠나지 못하는 아픈 마음에 한숨으로 위로하려 할 뿐…….-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린 채, 사내의 읊조림을 들으면서 먼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상의 굴레를 벗고 어디론가 떠나 고 싶어 했다는 것을……, 그래서 늘 이곳에 찾아와 출항을 앞 둔 선원들을 바라보며 새 로운 세계를 향한 떠남의 연습을 계속해 왔다는 것을…….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그들과 닮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슬픔이 밀려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정 기자가 왜 이곳을 찾으라고 했는지 그 진의를 알 것만 같았다.
그가 그들과 같이 멍한 시선을 허공에 던지고 있는 사이, ‘Sailing'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헤집고 울려오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