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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5.03 12:33 수정일 : 2024.05.03 01:55 작성자 : 김하기
(34)제5부 하지왕과 광개토왕(7)
그동안 명림원지는 고두쇠와 텁석부리를 통해 고구려의 정세를 보고받고 있었다. 그는 광개토대왕이 죽고, 장수왕이 등극한 것과, 임종의 자리에서 하지왕이 대가야의 왕으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대가야 어라성의 집사, 박지에게 달려갔다.
박지는 하지왕의 책사, 명림원지를 보자마자 말했다.
“명림원지, 네 놈 잡기를 학수고대했다. 헌데 웃통을 벗고 제 발로 호랑이굴로 뛰어 들어오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여봐랏, 이 역적 놈을 당장 포박하라!”
창대수염이 난 군신지 석달곤이 즉시 명림원지를 포승줄로 묶었다.
희고 빛나는 이마를 지닌 명림원지는 몸이 묶인 채로 태연하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집사, 정녕 광개토대왕이 승하하기 전 하지왕을 대가야의 왕으로 책봉하고 자신의 딸, 상희공주를 대가야의 왕비로 내어준 것을 모른단 말이오?”
“엥, 광개토대왕이 승하하셨다고? 그게 무슨 제석항아리에 뛰어든 말×같은 소리냐?”
박지는 긴 염소수염을 사르르 떨며 말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젊고 건장한 고구려 태왕이 죽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외교의 귀재라는 집사께서 이렇게 소식이 어두워서야, 원. 이래서야 고양이 눈알같이 불안하게 돌아가는 주변 정국에서 우리 대가야를 어떻게 보존하겠소?”
“네 놈이 옥중에서 잔꾀를 부려 사물가야의 한기를 갈아치운 것을 알고 있다. 또 무슨 허튼 수작을 부리려고 여기를 찾아왔단 말인가.”
신라장군으로서 대가야의 군신지가 된 석달곤도 명림원지에게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고구려 상희공주는 신라대왕 실성마립간과 혼약을 약조한 사이다. 어디서 더러운 거짓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리느냐?”
명림원지는 포박을 당했으나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하하, 석장군! 강대국이 약소국과 맺은 약조는 마루 밑의 헌신짝보다 못하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수행하는데 신라의 실성 마립간보다 대가야의 하지왕이 더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 같소이다.”
이어 명림원지는 박지에게 미소 속에 칼을 감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박집사, 내가 알기론 그대는 판단이 매우 민첩한 분으로 알고 있소. 조금 있으면 하지왕과 상희공주가 고구려 대왕의 칙명을 들고 이곳 대가야에 올 터인데, 그들과 계속 맞설 것이오? 당신이 세운 아들 구야왕을 비롯해 박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할 게 뻔한데 그래도 괜찮은 거요?”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요? 우리 대가야는 고구려의 조종을 받는 그런 꼭두각시 따윈 두려워하지 않소.”
“계란으로 바위 치기보다 우리 서로 지혜를 모아 대가야를 새롭게 재건하는 게 어떻겠소. 그것이 제가 맨몸으로 이곳을 찾아온 이유요.”
박지는 하지가 고구려의 책봉을 받았다는 명림원지의 말에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가슴은 덜컥했다. ‘명림원지는 좌경천리 입경만리(坐景千里 立景萬里)의 재사’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만약 이놈의 말이 맞다면 멸문지화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일단 이놈을 죽이기보다 감옥 안에 처넣고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석장군, 이놈을 감옥 안에 처넣으시오.”
석달곤이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집사, 당석에 이놈을 베어버립시다. 감옥에 처넣었다가 그곳에서 또 무슨 야료를 부릴지 모릅니다. 잔머리를 굴리는 놈들은 미리 싹을 잘라 놓아야 후환이 없습니다.”
“벨 기회는 언제든지 있네. 성급하게 굴지 말고 일단 내 말대로 하게나.”
박지는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궁리가 많은 박지는 남의 말을 듣고 쉽사리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염소처럼 깐깐하게 따져보고 이익의 흐름에 따라 신중하게 발을 옮긴다.
명림원지가 뇌옥에 들어가자 대가야의 장군 후누가 앉아 있었다. 한때 대가야의 병권을 잡고 가야를 호령하던 후누 장군은 석달곤에게 군신지 자리를 빼앗기고 들피진 몸으로 힘없이 옥벽에 기대어 있었다. 야음을 틈타 정변을 일으킨 박지와 석달곤을 막지 못한 탓이었다.
명림원지는 가마니 자리를 깔고 앉은 후누에게 큰절을 했다.
“장군님, 소인 명림원지의 절, 받으십시오.”
“오, 그대가 날 만나러 온다던 하지왕의 책사, 명림원지로군.”
이미 명림원지는 후누 장군에게 옥중에서 만나기로 통기를 해놓았다.
“그러하옵니다. 고명하신 장군님을 뵈오니 광영입니다.”
“패장이 되어 죄수가 되었는데 무슨 고명한 장군이오. 헌데 난 그대가 옥중 면회를 올 줄 알았는데 아예 나하고 똑같은 죄수가 되어 들어왔군.”
“장군님을 편하게 만나기 위해 잠시 쉬러 왔습니다.”
“허허, 그대에 관해 익히 소문은 들었지만, 이 감옥에 쉬러 왔다니 범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군.”
“하도 감옥을 오래 살아 이곳에 들어오면 내 집같이 편안합니다.”
명림원지는 후누와 같은 옥방에 머물면서 하지왕의 근황과 그동안 대가야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이야기했다. 둘은 가야의 미래에 대해 함께 공감하기도 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면서 뜻을 모아갔다. 하지만 박지에 대한 입장 차이로 둘의 의견은 갈렸다. 후누의 입장은 하지왕의 대가야를 빼앗고 국정을 농단한 대간적이자 원흉인 박지는 단매에 쳐죽일 놈이라는 것이다.
명림원지는 후누 장군에게 말했다.
“박지가 신라와 손잡고 정변을 일으킨 후, 자기 아들 구야를 왕으로 세워 대가야의 권력을 농단하고 있지만 강한 나라를 끌어들이는 그의 외교력만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박지는 고구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정치적 안정을 꾀했고, 경제는 정치와 분리하여 적국인 왜와 백제, 먼 중국과도 교역해 실리를 꾀했다. 더욱이 박지가 낙동강 물길이 들어오는 대가야 남부 하원에 저자거리를 조성해 여가전쟁(고구려 가야전쟁) 이후 낙동강을 따라 올라온 금관가야 주민들에게 살 터전을 마련하면서 대가야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왕이 돌아오시면 쌀알처럼 흩어져 있는 22 가야를 일통하는데 그의 악마적 재능이 꼭 필요합니다.”
후누 장군이 콧등을 튕기며 퉁을 놓았다.
“명림원지, 이따위 너저분한 이야기를 하러 이곳까지 왔는가?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간악한 박지와는 손잡을 수 없네.”
“장군, 대업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원한은 잠시 내려두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약한 군사력만으로는 가야를 통일할 수 없습니다. 가야 절반은 무력으로 통합하되 나머지 절반은 박지의 외교술로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이 많고 노회한 박지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난 더러운 박지와는 타협하지 않겠네. 만나는 즉시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네.”
후누 장군의 입장은 바위에 내리치는 서릿발처럼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