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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10.23 10:49 수정일 : 2021.10.23 10:53
김추자, 빗속의 여인
/이승주 시인
불을 끄자, 방안은 캄캄한 어둠의 심연. 그 고요하고 아늑한 심연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이때가 가장 좋고, 이때부터 숨쉬기는 한결 수월하고 편안하다. 수심은 천장의 높이만큼. 나는 기꺼이 침잠한다. 아늑한 심연 속에서 아주 천천히 드러나는 얇은 미명(微明)의 옷자락에 싸인 어둠의 알몸을 본다. 이따금 고요한 어둠 속에서 어둠의 심연으로부터 올라온, 어둠이 내쉬는 날숨의 기포들이 수면에 닿아 툭 툭 터지는 소리에 귀를 모은다. 터진 소리들이 수면 밖으로 튕겨지며 흩어지는 걸 즐긴다.
오늘밤도 쉬이 잠들기는 틀렸다. 자리에 누워 뒤척이다 시마(詩魔)에 부름에 이끌려 시를 낚으러 불면의 강으로 나선다. 강가 어둠 속에서 시가 오는 물때를 기다린다. 시의 어망(魚網)을 채우는 것은 늘 고된 작업.
유리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아낌없이 참 순하게 비가 내린다. 집들은 지붕 아래로 더욱 몸을 낮춰 웅크리고, 투정하던 세상도 조용조용 점점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가늘고 긴 고운 손가락의 부드러운 애무의 손길로 어둠의 속살을 적시며 내리는 밤비. 시간은 흐름을 거슬러 삼십 년 전의 어느 봄밤에 멈춘다. 빗발들이 자욱이 일어서는 비숲〔雨林〕을 우산도 없이 걸어갈 때….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노오란 레인코트에
검은 눈동자 잊지 못하네
다정하게 미소지며
검은 우산을 받쳐주네
나리는 빗방울 바라보며
말없이 말없이 걸었네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다정하게 미소지며
검은 우산을 받쳐주네
나리는 빗방울 바라보며
말없이 말없이 걸었네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오랜만에 세월의 강 저 건너편에 버려둔 내 낭만과 서정의 묵정밭을 적시는 빗소리 때문에 시를 잊는다. 비와 빗소리 사이, 시가 놓일 그 자리에 김추자의 「빗속의 여인」이 파고든다. 일찍이 그만한 개성적인 가창력과 무대와 객석의 장악력을 본 적 없는 김추자. 「빗속의 여인」과 함께, 그 ‘검은 눈동자’ 내 가슴에 다시 살아오는 젊은 날의 그 ‘빗속의 여인’….
노래의 가락은 시종 내리는 비처럼 하염없이 흐르고, 유리창의 어둠을 가리는 빗물의 커튼 너머 정념과 노래가 서로의 몸을 탐하는 열락(悅樂)의 한때를 본다. 때마침 물때에 맞춰 잊고 있던 시 한 마리가 흰 물살을 일으키며 내게로 온다. 오늘밤, 시마가 내게 주는 감사한 선물이다.
도도한 정념의 용광로,
얼음 속에 일렁이는 불덩어리
춤이라면 「빌리 진」의 마이클 잭슨,
노래라면 「빗속의 여인」의 김추자
우리 가요사에 배호 이미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김추자도 있었네
남진 나훈아가 있어
김추자가 있었네
우리 가요사의 한 획,
우리 가요사의 새로운 기원(紀元),
김정호 신중현이 있어
김추자가 있어야 했네
그리고 지금
여기 또 하나의
이 보잘것없는 시가 있어야 했네
김추자의 가요에 대한 너무나도 약소한 노래값이
더 있어야 했네
―이승주, 「한국가요사에 김추자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