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양왕용의 시 읽기
작성일 : 2021.10.21 10:28 수정일 : 2021.10.21 10:34
바람이 지나간 뒤
/이 향아
그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간 뒤에 봉놋방에 앉았던 우리들의 자리가 아무
도 모르는 새 바뀌어 버렸다 하늘이 분배한 녹을 지키듯, 우리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바뀐 자리에 복종하였다
징기즈칸이 말을 몰아 들을 달릴 때, 회오리 내지르던 말 울음소리, 바람
은 제 몸을 베어내어 비명을 지른다
그가 한 번 지나가면 언덕 하나 생기고 다시 언덕 하나 없어지는 사막
나뭇잎이 떨어질 때, 빨랫줄이 뒤집히고, 표류하는 어선의 찢어진 돛폭에
바람은 참았던 고백, 짓누른 통곡, 귀먹은 절규를 토해낸다
그럴 거야, 그렇겠지, 예삿일은 아니야, 아무도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바람은 지나가고 우리들만 남았다
-⟪한국현대시⟫ 2020·하반기호
<약력> 1938년 충남 서천 출생, 군산에서 성장. 경희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63-1966년 《현대문학⟫ 미당 서정주 시인 3회 추천완료로 시단 데뷔, 시집 『캔버스에 세운 나라』 『온유에게』 등 24권, 에세이집 17권, 문학이론 및 평론집 8권, 시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창조문예상, 문덕수 문학상 등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의 한국 측 회장 역임, 열두시인 동인, 호 남대학교 명예교수
이향아 시인과 필자는 1999년 기독교시인 동인회인 열두시인 제1기 동인으로 같이 잠시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필자가 그 동안 소원했던 동북아기독교작가회의 2017년 군산모임에 참가하면서 가깝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 모임은 이 시인의 주도로 진행되었는데 2박 3일 동안 일본 기독교 문인들과 한국 기독교 문인들이 숙식을 같이 하는 진지하고 알찬 모임이었으며, 2019년에는 일본에도 함께 다녀왔다. 최근 이 시인은 시단에 데뷔한지 5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젊은 시인들보다 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시 「바람이 지나간 뒤」는 2020년에 발표된 시이다. 그리고 산문시 형태이다. 산문시가 분석적이고 토의적으로 읽힌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감성적이기 보다 이성적으로 읽히는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이 시는 그렇다기보다 독자들에게 격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데서 산문시의 상식을 반한다. 그것이 이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고 장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바람은 예사롭지가 않다. 사막에서 한 번 지나가면 모래 언덕 하나가 생기는 강한 바람이다. 말하자면 기후변화로 빈번해지는 태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태풍을 제재로 하여 전개되는 상상력은 의고擬古적으로 시작된다. 우선 첫 단락에 등장하는 시적 공간 ‘봉놋방’이라는 시어가 그렇다. 봉놋방은 ‘조선 후기 주막집에서 나그네들이 모여 자도록 하는 큰 방’이다. 이곳에서는 체면이나 격식이 없이 그냥 눈을 잠시 부치면서 밤을 지낸다. 바닷길에서 태풍이 한번 지나가면 객실의 손님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것을 연상할 수 있는 방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자연의 장애 앞에 인간은 그냥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시인은 인식하고 있다. 의고적 상상력은 바람소리를 징기즈칸이 말을 몰아 달릴 때의 말 울음소리로 비유한다. 그러다가 사막에 산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빨랫줄과 어선의 돛폭으로 소리내며 절규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단락에서 태풍은 지나가고 온갖 상처를 받은 산야에 우리들 즉 인간만 남는다.
이 시에 등장하는 현상은 분명히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으나 그러한 위기의식이 의고적 상상력으로 표출된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아무리 태풍이 인간을 핍박해도 인간은 살아남는다는 확신도 보인다. (양왕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