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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15. 비둘기와 누드

작성일 : 2024.04.04 11:40

<짧은 소설>

15.비둘기와 누드 /박명호

1.

내가 뛰어올 동안 다행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창한 봄날씨에 다들 소풍을 나갔는지 거리에는 강아지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헐떡이는 숨이 진정되자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조 건물 2층 카페는 온통 핑크색이었다. 우선 커튼이 그랬고 마담이 입고 있는 원피스 의상이 그랬고 탁자에 놓여 있는 꽃들이 모두 핑크색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실내 음악마저 굳이 표현하자면 핑크색이었다. 스콧 메킨지가 부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그 머리에 꽃도 핑크색일 것 같고 곡조도 가수의 목소리도 마냥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마치 핑크색으로 물감을 뿌려놓은 수조 안에 물고기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수조 안에 물고기가 털이 없는 맨살이 듯이 나는 몸에 옷이 하나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스스로에게나 마담에게 자연스러운 태도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리에 꽃을 꽂는 것처럼 이 분홍빛 카페에서는 옷을 벗어도 괜찮다. 괜찮다가 아니라 오히려 옷을 벗지 않으면 이상하다. 최소한 걸치고 있는 옷 하나는 벗어야 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개인의 행동에 대해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남자든 여자든 머리에 꽃을 꽂는다. 최소한 그 노래의 의미는 그렇다.

내가 왜 그 자리에 완전 누드로 앉아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 놈의 비둘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앞서 나는 친구들과 카페 부근 꽃나무 아래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꽃잎은 하염없이 술잔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분위기에 나는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난데없는 비둘기 떼가 습격하듯이 술판 위를 지나가면서 노래가 중단되었고 술맛도 날라 가버렸다. 노래는 중단되었지만 내 흥은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웃옷을 홀랑 벗었다. 친구들이 손뼉치며 좋아했고 거기에 고무된 나는 팬티마저 홀랑 다 벗어버리고 말았다. 옷을 다 벗은 나는 막상 그 다음 일이 막막했다. 해서 청년시절 유행했던 스트리킹을 시도했고 인근에 있는 우리의 단골 카페까지 뛰어든 것이었다.

마담은 색안경을 끼고 있었고, 뛰어오느라 땀을 흘리던 나에게 격려의 의미로 수건을 건넸다. 그리곤 곧장 당신이 만약 샌프란시스코에 간다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라는 노래를 틀었다.

 

2.

한가하고 나른한 오후였다.

누군가가 열어놓은 창으로 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자극했다.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유혹받는 것 같은 달콤함이었다. 입술을 다시며 비몽사몽의 세계를 왔다 갔다 했다. 그때 그 경계 사이를 빠르고 날카롭게 가르는 것이 있었다. 한 마리 비둘기였다.

여직원들의 비명이 터졌고 달콤함에 젖어 있던 꿈결은 찬장만장 날라 가버렸다. 몇몇이 빗자루를 들고 흔들었고 몇몇은 볼펜이나 서류 뭉치를 던지기도 하면서 비둘기를 몰아내려 했다. 사무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비둘기도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유리창에 머리와 날개를 들이박았다. 사무실 직원들이 모든 창문을 다 열고 비둘기를 쫓아냈지만 비둘기는 기진맥진 나가기를 포기한 채 사무실 구석 캐비넷 위에 앉아 있었다. 사무실 직원들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는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자유의 시간이었다.

 

3.

마담이 창을 열었다. 순간 카페 안에 고여 있던 핑크색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마담의 긴 머리카락이 치맛자락과 함께 바람에 흩어졌다. 그 바람은 내 쪽으로 불어와서 내 가슴팍을 그대로 통과해 갔다. 가슴이 고속도로가 난 것처럼 뻥 뚫렸다.

그녀도 나도 자유다.

<시민시대. 2024.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