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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3.04 12:12 수정일 : 2024.03.04 12:17
부잣집 도련님과 공화국의 이상(理想)
/신평
의대생 정원 2,000명 확대의 정부안을 놓고 벌이는 의사들과 정부와의 갈등이 수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당분간 이 대치상태가 지속될 전망이고,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환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런데 이 사태를 주도하는 의사들의 발언을 들으면, 한 가지 이상하고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과연 이 사람들이 그동안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왔던 존재들일까? 그들이 일반의 상식에 너무나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마구 뱉어내기 때문이다.
정부는 결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느니, 무조건 정원확대정책을 취소한 다음에야 대화를 할 수 있다느니, 자신들이 지금 아무 이유 없이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있다느니 하는 그들의 지극히 과장된 감정적 언사가 눈앞을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그중에서도 전국 시·도 의사회장 협의회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는 성명이 눈에 확 띈다. 한 마디로 기가 차는 말이다. 그 성명과는 완전히 거꾸로, 우리 헌법은 제37조 제2항에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공공의 이익이나 질서유지를 위해 제한당할 수 있는 것으로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찌하여 의사들은 거대한 공동체인 우리 사회의 유지와 운영의 원리에 대해 이처럼 몰이해로 가득한 망상이나 환상에 빠져 살아왔다는 말인가? 버릇없이 자란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세상은 오직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유치하게 생각하며 거리낌 없이 막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영문명 ‘The Republic of Korea’에서 알 수 있듯이 ‘공화국’(Republic)이다. 공화국은 사적 이익의 추구보다 공적 이익을 중시하고, 시민의 삶에 대한 국가의 관여를 전제한다. 이에 따라 시민은 정치의 자주적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공화국의 이념은 구성원인 시민이 공민적 덕(civic virtue)을 갖추지 못하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으로 귀착한다. 지금 의료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의사협회나 그 임원들이 과연 우리 ‘공화국’에 살 수 있는 공민적 덕을 충분히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우리는 해방 후 지금까지 80년이 다 되어가나 아직 공화국의 전통이 길다고 할 수 없다. 또 해방 자체가 선열들의 독립운동의 결과라기보다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일본 등의 추축국에 승리하여 짜인 새로운 세계질서의 한 부분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국민의 공민의식이 여전히 충분치 못하고, ‘공화국’의 이상은 아직 우리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 폐단이 이번 사태의 주원인으로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
더욱이 한국은 전통사회의 유습이 강하게 남아 연고주의(nepotism)의 폐습이 온존하고 있고, 집단 이기주의의 함정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특히 엘리트 집단에 의한 직역 이기주의, 특권의식은 다른 선진사회와 비교하여 몹시 두드러진다.
이번에 만약 정부가 의사집단의 압력에 일방적으로 처절하게 굴복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특권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접어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제11조에서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숭고한 원칙을 천명한다. 그리고 그 제2항에서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든 이를 창설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정부는 수많은 생명들을 위협하는 이 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대책을 강구하고, 또 의사들과의 대화와 타협을 통한 대책을 수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고귀한 헌법원칙을 추호라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마지노선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사는 ‘공화국’의 찬란한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