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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10.15 11:44
싸움의 기술⑯ - 죽음에 대한 저항과 부활하는 사랑
/양선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봅니다. 47년 전, 고등학교 때 사진입니다. 편집위원 일동이라고 사진 밑에 적혀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몇몇 친구들과 함께 사진관 골방에 들어앉아 졸업앨범을 만들었습니다. 마침 사진관이 교명이 같은 여고 앞에 있었습니다. 누구의 소개였는지(사진 속의 한 인물이었을 겁니다) 미대를 지망하던 그 학교 여고생 두 명도 작업을 도왔습니다. 두 사람 얼굴과 이름이 가물가물합니다. 지금 만나면 분명 못 알아 볼 것 같습니다. 아마 다시는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다시 보지 못했으니 여생동안도 그렇게 될 공산이 큽니다. 47년 더 살 것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으니 더 그렇습니다. 먼저 떠난 사진 속의 친구들처럼 다시는 못 볼 사람과 물건들로 세상은 가득합니다.
모든 게 시간의 짓입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탈색시킵니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망각의 세계로 데려 갑니다. 망각과 영원한 고립의 세계, 아마 그것이 죽음일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누구나(무엇이든) 한 발 한 발 죽음을 향해 걷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죽음은 그렇게 조금씩조금씩 나의 것을 자기 영토 안으로 옮깁니다.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문득 어머니의 사진에서 ‘죽음’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빛과 시간의 정지, 특히 흑백의 명암이 주는 이미지는 죽음을 연상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이미지가 있어서 살아있는(살아있던) 것들은 더 화려합니다. 그는 죽음에 대비되는 '부활하는 사랑'을 사진 속에서 발견합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진은 죽음에 저항하고 사랑의 부활을 도모합니다.
죽음과 사랑 :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두 운명이 죽음과 사랑이라면 사진 또한 다르지 않다. 바르트가 말하듯 사진의 아이도스(eidos)가 죽음이라면(eidos : 관념체계·경험의 해석 기준 따위, 하나의 문화가 갖는 형식적인 내용) 사랑은 또 하나 사진의 본질인 인덱스 (index, 목록)다. 사진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음의 이미지로, 정지의 이미지로 바꾸지만, 동시에 그 죽음의 이미지는 사랑의 사건 속에서 베로니카의 손수건처럼 보는 이에게 생생하게 부활한다. ‘그때 거기서 그랬었다(that has been so)'라는 명증성, 즉 빛의 자국들인 사진의 인덱스 이미지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애도의 슬픔과 고통과 만날 때, 죽음에 대한 강력한 사랑의 protest(항의)가 된다. [김진영, ’사랑과 죽음 그리고 사진 : R. 바르트의 밝은 방 『카메라 루시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이 흑백 사진이 바르트가 말한 대로 ‘죽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되고 있는지, '부활하는 사랑'의 전도사가 되고 있는지 오랜만에 보는(처음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없습니다. 이 사진은 한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려 준 것을 캡처한 것입니다) 사진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직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혹여 사진 속의 인물들과 함께 한 '사랑의 시간'이 길지 않았던 때문이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가 ‘사랑의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찰나의 만남이 다이아몬드의 빛나는 광채로 평생을 비출 수도 있습니다. 좀 더 두고 보면서 찬찬히 사진 속 과거의 시간들을 떠올려볼 생각입니다. 시간이 하는 일들 앞에서는 차분하게 그(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가 /대구교육대 명예교수>